(제 64 회)
제 3 장
8
(1)
쑤다에브가 림춘추를 만난 곳은 바다기슭의 집필실에서였다. 그는 2층으로 된 이 건물을 림춘추의 개인별장이라고 추측했다. 림춘추는 쑤다에브를 오랜 막역지우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러나 어줍은 미소를 띤 쑤다에브의 서름서름한 눈길은 집필실안의 앞차대며 책상우에 무드기 쌓인 원고지들에서 떠날줄 몰랐다.
《쑤다에브선생, 별로 차린건 없지만 식사부터 합시다.》
1층에 있는 집필실의 식사칸은 어딘가 아늑한감을 주었다. 창턱엔 선인장화분과 국화꽃이 망울진 재빛색의 화분이 놓여있었다.
쑤다에브에게 의자를 당기며 어서 앉으라고 손짓하는 림춘추의 몸가짐이 어딘가 무거워보였다. 쑤다에브는 천천히 의자에 앉으며 넌지시 물었다.
《지금 무슨 글을 쓰고계십니까?》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것이였지만 상봉인사를 나눈 마음으로는 처음으로 되는 질문이였다.
《소설을 쓰댔습니다.》
《소설이요?!》
자서전같은것을 예상하며 던진 물음이였는데 소설이라니 잠시 의아해졌다.
쑤다에브는 얼마전에 몰로또브와 나눈 대화를 다시 상기했다.
…10월혁명시기 뻬뜨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몰로또브는 제2차 세계대전기간에는
쑤다에브는 정원에서 해바라기모를 옮기는 몰로또브를 만났다. 그때 몰로또브는 림춘추를 만나려고 평양에 간다는 쑤다에브의 말에 손금같은 주름발이 얼기설기한 입가녁에 어딘가 쓸쓸한 미소를 그렸다.
《벌가리아대사로 있다가 추방되였지요?》
《그랬댔지요.》
《그는
몰로또브는 외무상에서 해임된 후 레닌묘앞에서 림춘추를 만났던 일을 들려주었다. 그때 몰로또브는 림춘추에게 흐루쑈브의 수정주의로선으로 레닌이
추켜올린 붉은기가 변색될 위험에 처했다고 하면서
몰로또브는 쑤다에브로부터 대사에서 추방된 림춘추가 귀국후 얼마 안있어 공화국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으로 되였다는 말을 듣고 충격은 받았지만 그닥 놀라는 기색이 아니였다.
《나는 그 사람이 형제당과의 관계를 악화시킨 책임을 지고 어떤 화를 입었으리라고 생각했댔는데 조선외무성 부상에게서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댔습니다.》
쑤다에브의 말에 몰로또브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나서 인차 가로저었다.
《조선에서는 십분 그럴수 있습니다.
당 제20차대회가 있은 다음 사회주의나라 당들가운데서 조선당이 제일먼저 당대회를 했는데 지금의 브레쥬네브가 그때 쏘련당대표단 단장으로 가앉아있었지만 조선당은 대회에서 흐루쑈브의 로선을 하나도 받아물지 않고 자기들의 독자적인 로선만을 천명하였습니다.
나는 몽골에 가있을 때 조선에서 외무상을 빨찌산출신으로 바꾸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쏘련과의 관계에서도 그럴진대 외교관례상 환영할수 없는 행동으로 벌가리아에서나 추방됐다고 처벌할 조선당이 아닙니다.》
몰로또브다운 랭정하고 정확한 판단에 공감하면서도 자기 나라에 대하여 역시 몰로또브식의 랭혹하고 직선적인 태도에는 속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모스크바에 구름이 끼면 쏘피아에서는 우산을 들고 나서야 한다는 유모아가 공식출판물에까지 나돌 지경이니 할수 없는 일이였다.
《당신은 왜 조선을 방문하려고 합니까?》
림춘추를 만나보기 위하여 조선으로 간다고 말했는데 굳이 방문목적을 다시 물으니 쑤다에브는 대답이 궁해졌다.
《평양에 가서 얼마간이라도 괴로운 마음을 달래보려는 그 심정은 리해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목적은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에 대한 어떤 해답을 찾고싶겠지요.
우리 나이, 우리 처지에서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자기가 걸어온 길과 해놓은 일들이 후대들의 존경을 받는 그런 미래, 당신은 그것을 찾아 머나먼 동방행을 하려고 합니다. 옳습니까?》
쑤다에브는 두팔을 쩍 벌려보였다. 역시 몰로또브는 몰로또브였다.
하긴 왕년에 파시즘의 힘을 빌어 쏘련을 없애려는 서방의 음흉한 모략외교를 짓부시고 《쏘도불가침조약》의 체결로 귀중한 시간을 얻어냈고 간특한 사무라이들과의 외교전으로 《쏘일중립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동서협공의 위기를 막아낸 쏘베트외교의 거장이 자기 한사람 속마음이야 넘겨짚지 못하겠는가.
《명백합니다. 쓰딸린시대나 지미뜨로브시대라면 나나 당신의 처지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것입니다. 문제는 령도의 대가 어떻게 바뀌는가 하는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나의 두눈도 함께 가지고가서 잘 보고 오기를 바랍니다.》
몰로또브는 역시 아무리 삼거웃처럼 뒤엉켜있는 현상속에서도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볼줄 아는 정치가였다. 그와의 담화에서 쑤다에브는 딱히 무엇이라고 찍지는 못했던 자기의 평양방문목적을 명백히 깨달았다.
쑤다에브는 지금 림춘추가 마련한 이 식탁이 자기의 목적을 달성할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에 얼굴의 주름살을 펴며 왼손의 장지가락을 폈다.
《림선생, 지금의 내 인생에서 행운이라고 할가 그게 뭔지 압니까?》
림춘추는 그의 앞가슴에 달려있는 쏘련 적기훈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제2차 세계대전시기 반파쑈항전에 참가한 지미뜨로브공산당의 당원이라는 자부겠지요.》
쑤다에브는 눈가에 알릴듯말듯 쓸쓸한 미소를 피워올리며 백발의 귀밑머리를 쓸어넘기다가 가슴의 훈장을 매만졌다.
《물론, 하지만 그건 지니간 과거고 이렇게 림선생과 마주앉고보니 조선말을 익힌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안해와 림선생한테서… 그래서 림선생은 나에게 더 고마운 동지지요.》
《허… 너무 춰주니 되려 나무람처럼 들리는군요. 그래 댁에선 다 무고한가요? 부인이랑 아들딸두…》
쑤다에브는 대답을 피하며 잔에 술을 부어 대번에 쭉 마시였다. 사실 쑤다에브나 림춘추는 술은 한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 성미였다. 물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그걸 잘 알고있는 림춘추가 물끄러미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술은 냄새만 맡아도 질색이던 선생이 이게 웬일입니까?》
《놀라울겁니다. 바다속의 고래가 산에 나타난것만치나 말입니다. 허지만 이젠 술이 나한텐 세가지로 유익한 벗이 됐습니다.》
쑤다에브는 엄지손가락을 펴보였다.
《소경이 되게 해주는것!》
《소경? 둘째는요?》
《귀머거리가 되게 해주는것!》
《저런? 셋째는요?》
《저승에 빨리 가게 해주는것!》
어깨를 으쓱이며 또 잔에 술을 붓는 쑤다에브의 손을 림춘추가 잡았다.
《여긴 조선입니다. 이 땅에선 선생이 말하는 술의 그 〈유익성〉이 곧 해독성입니다.》
《해독성… 알겠습니다. 그럼 방금 림선생이 한 질문에 대답하겠습니다. 우리 집 사람들의 안부를 물었지요?》
쑤다에브는 품에서 사진 한장을 꺼냈다. 그것은 행복에 도취되여 웃는 쑤다에브네 가족사진이였다.
림춘추는 가족사진을 보며 감회에 젖어 추억했다.
《부인이 끓여주던 풋고추료리랑 눈에 선합니다. 참 별맛이였는데… 저런, 안나는 더 활짝 폈군요. 안드레이두 사내답게 번졌는데요. 이젠 대학을 졸업했겠구만요.》
《난 그녀석을 잃었습니다.》
쑤다에브의 한숨섞인 쓸쓸한 어조에 림춘추는 낙지회가 담긴 접시에 가져가던 저가락을 흠칫 멈춰세웠다.
《도대체 어떻게?》
《몹쓸 병에 걸려서…》
《무슨 병이길래? 치료를 받아보았겠지요?》
《병원에서두 못고치는 병에 걸렸댔지요.》
유격대 군의였던 림춘추는 암이였구나 하고 직감했다.
《그러니 암에?》
《암보다 더 무서운 병입니다. 그건 지금까지 의학이 발명한 약으로는 고치지 못하는 병이지요. 약물로도 수술칼로도…
안드레이 그녀석이 미국에 가서 류학하겠다고 너무도 조르길래 내키지 않은걸 보냈더니 허, 고현놈, 덜컥 망명했구만요, 미국시민증을 받고 말입니다. 음…》
쑤다에브가정의 비극사를 들으며 림춘추는 동정을 금할수 없었다. 자연 공식적인 석상의 관례를 탈피하게 되였다.
《결국 이 쑤다에브의 집에서부터 붉은기가 변색되기 시작했다고 할가. 림선생, 문필가들은 태를 묻은 땅을 두고, 조국을 두고 많이 노래했습니다, 정든 고향집뜨락으로, 삶의 보금자리로… 하지만 그 조국이 고통과 괴로움만 주는 심술사나운 이붓어머니로 될수도 있지요.》
쑤다에브는
《태를 묻고 나서자란 고향, 그 조국을 타매하진 마십시오. 땅도 그 땅, 바다도 그 바다, 하늘도 그 하늘입니다. 쑤다에브선생도 그래서 그 땅을 지켜 히틀러도당과 피의 격전을 벌리지 않았습니까.》
《그랬댔지요. 그 땅, 그 바다, 그 하늘을 지켜 몰로또브도 싸웠지요. 하지만 그는 오늘 크레믈리의 버림을 받은 신세가 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견결한 사상과 뛰여난 두뇌로 조국을 지켰는데 바로 그 조국이 자기의 수호자를 배신했단 말입니다.》
《쑤다에브선생, 조국이 몰로또브를 배신한건 아니지요. 찍어말한다면 쓰딸린을 배반한 흐루쑈브가 그의 동지인 몰로또브도 밀어던진것입니다.》
쑤다에브의 눈에 섬광이 번뜩이였다. 레닌이 창건한 사회주의쏘련, 레닌의 위업을 계승하여 쓰딸린이 수호한 쏘련을 상기했다. 그때의 쏘련은 빛이였다. 쏘련인민들에게뿐 아니라 자기들, 동유럽의 혁명가들에게도 삶의 희열과 함께 힘과 용기를 안겨주는 빛이였다. 전세계혁명가들의 등대였다. 하지만 쓰딸린의 화장과 함께 그 위업이 재로 변한 오늘에 와서도 등대인가?
안주도 들지 않고 화술로 격한 심정에 불을 단 쑤다에브는 식탁을 치며 낮으나 진중한 어조로 대화의 본질로 파고들어갔다.
《계승성을 잃으면 그 어떤 정치나 서산락일로 끝나듯이 〈뽐뻬이의 마지막날〉은 그 어느 나라에나 예고없이 들이닥치지 않을가요? 밀물과 썰물의 법칙처럼.》
쑤다에브는 자기가 식탁에 터친 폭탄에 대한 림춘추의 반응을 엿보았다. 하지만 림춘추는 눈섭 한오리 까딱하지 않았다. 쑤다에브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그러나 림춘추는 더 말이 없이 음식만 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