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2 장

정사가 부패하면 성돌이 썩는다

2

(2)

 

청주는 공주에서 동북쪽으로 백리되는 곳에 있는데 고을읍은 거대령아래에 있다. 거대령은 동쪽 백리되는 곳에 있는 속리산의 한 지맥이 뻗어내린 령이다. 

청주성은 거대령을 자연그대로 동쪽성벽처럼 리용하고 남쪽과 서쪽, 북쪽에는 돌과 흙으로 쌓은 큰 성이다. 성안에는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이 있었다. 그만큼 전략적의의가 큰 군사적요충지였다.

덕보는 청주성과 거대령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언덕에 말을 멈춰세우고 안심사가 자리잡고있는 산줄기를 더듬었다. 안심사는 거대령의 산발중에서도 깊은 산골짜기를 이룬 안심동에 있다.

청주성으로부터 20리쯤 떨어진 곳이다. 안심동이라 부르는것은 이 세상 그 어떤 풍파도 미치지 못한다는 깊은 골이라는 뜻에서 안심골이라고 하는데 참말이지 속세와 인연이 없는것처럼 계곡의 맑은 물소리와 산새소리만이 있을뿐이였다.

덕보는 열다섯살 어린 나이로 아버님의 머리를 어느 깊은 산중에 안장하고 어떻게 여기까지 올수 있었는지, 보은현으로부터 600여리가 넘는 무인산중의 숲속을 어떻게 헤쳐왔는지 자신부터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며칠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여 어느 숲속에 쓰러졌는데 바로 자기 얼굴옆에 푸르싱싱한 고사리가 있었다. 그는 고사리를 꺾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한번 또 한번 몇번씩 모지름을 써서야 가까스로 고사리대 하나를 잡아당겨 입에 넣었다. 했더니 기운이 돌아서고 일어나 앉을수 있었다. 그때부터 덕보는 산나물을 뜯어먹고 도라지도 싱아도 먹을수 있는것은 다 먹으며 정처없이 가고 또 갔다. 그러나 산이면 산마다 먹을수 있는것이 다 있는것이 아니였다. 그는 다시 굶어쓰러졌었다. …

덕보는 쓰라린 추억을 더듬으며 말우에 올라앉았다. 그가 아름드리로송들이 울울창창 들어찬 숲속의 오솔길을 따라 이끼푸른 벼랑층계를 올라서 안심사의 넓은 마당에 들어섰을 때에는 중낮이 조금 지난 때였다.

안심사는 고요한 정적속에 불경을 외우는 소리와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있는것처럼 말없이 솟아있었다. 솔숲에서 시원히 불어오는 바람에 대웅전의 네귀 추녀끝에 매달려있는 풍경이 흔들거리면서 은은한 소리를 내였다.

덕보는 령규스님이 자기를 부처님앞에 데리고와서 향을 사르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을 부르며 불쌍한 소년을 재생의 길로 인도해달라던 그때가 어제처럼 방불히 떠올랐다.

《군정님은 불경을 드리려고 오셨소이까?》

문득 옆에서 조용히 울리는 말소리에 돌아보니 어린 소년중이 두손을 합장하고 빡빡깎은 머리를 숙이고있었다.

덕보는 벙긋이 웃었다. 나도 여기서 저처럼 소년중이 되려고 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절로 났기때문이였다. 만약 그때 아버님의 머리를 어머님묘곁에 안장하고 돌아오는 길에 키꺽다리 맹영달이에게 붙잡히지 않았다면 중이 되였을것이였다.

《아니, 난 주지님을 뵙자고 왔네, 령규스님은 나의 은인일세.》

《그렇소이까. 그러면 주지방으로 가십시다.》

잠시후 덕보는 령규스님을 뵈웠다. 스님은 둥글둥글한 얼굴에 굵은 주름살이 깊숙이 새겨져있고 수리개의 날개와 같은 장미아래 두눈이 맑고 시원스러웠다. 아마도 머리를 기르고 수염을 자래웠다면 변방장수와 같아보였을것이다. 스님은 아직도 정정하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기쁨의 눈물이 불쑥 솟아올랐다.

《스님, 그간 안녕하셨소이까. 소인이 어렸을 때 스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난 한기남이옵나이다.》

덕보는 본래이름으로 자기를 소개하면서 무릎을 꿇었다. 그래야 스님이 자기를 기억해낼수 있으리라고 여겨졌던것이다.

령규스님은 처음엔 웬 군정일가 하듯이 두손을 합장하고 무릎을 꿇는 젊은 군정을 내려다보더니 번개처럼 떠오르는 지난날이 생생히 눈앞에 다가드는듯 《아, 한기남!》하고 놀라 부르며 덕보의 손을 덥석 잡아 일으키였다.

《스님, 죽어도 갚을길 없는 은혜를 입고도 여지껏 찾아뵙지 못하고 지금에야…》하고 령규스님앞에 다시 부복하여 절을 드리면서 어깨를 들먹이였다.

《기남이가 이렇게 꿈과도 같이 군정이 되여 장하게 번진걸 보니 기쁘기 그지없소. 소승은 기남이 관가에 붙잡힌것이라고 생각되여 부처님께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더니… 아 아, 이렇게 살아서 왔구만. 자, 어서 일어나소.》

령규스님은 감개무량하여 어쩔줄 몰라하였다. …

덕보는 안심사를 떠난 후에 지금까지 있었던 자초지종을 빠짐없이 다 이야기하였다. 아버님의 머리를 어머니묘곁에 정히 모시고 안심사로 돌아오던 도중에 키꺽다리 맹영달에게 붙잡히게 된 사연과 통진현 신임사또가 자기를 압송해보내는척 하면서 구원해주었던것도, 자기를 먼 친척 조카벌되는 선우덕보의 이름으로 고쳐서 연안성군사로 보내준 일 그리고 지난해 섣달 귀양지에서 돌아오는 옛 보은현 원을 마중해 고향으로 모셔다드리고 오라던 연안성부사님의 분부를 받고 마천령을 넘었다는 이야기를 죄다 쏟아놓았다.

령규스님은 덕보의 이야기를 념주알을 하나씩하나씩 세여넘기면서 듣다가 나중엔 너무나 감동되여 셈세기도 잊고 들었다.

념주알은 모두 108알인데 108가지의 번뇌를 가셔준다는 의미로 해석되여 스님들이 언제나 목에 걸고다니면서 때없이 그것을 세여넘기는 습관이 붙은것이다. 그런데 지금 령규스님은 그 습관도 잊은것이다.

아버님에 대한 너의 효행도 독사에 물린 랑자를 구원해낸 소행도 고금에 없고 불가의 전세와 현세에 없는 일이니 이런 너를 보은현 사또님이 어찌 죄인이라 하여 살려내지 않으랴. 그런즉 그 보은현 사또님도 석가여래와 같은 사람이 분명쿠나. 그분이 귀양갔다가 돌아왔다니 한번 만나 깊이 사귀고싶구나.》

스님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스님은 벌써 그분을 재작년 5월에 마천령을 넘으시다가 만나보셨소이다. 역병에 죽게 된 그분의 부인에게 약도 주어 살려내지 않았소이까.》

《뭐, 이 소승이?! 마천령을… 아, 그럼 그때 그 사람들이?! 아니, 이런… 지금 그분이… 호환을 당할 처지에 있었던 이 소승을 구원해준 그… 그분이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옥천에 계시나이다. 제가 바로 그분이 스님에게 보내시는 편지를 가지고왔소이다. 그분이 귀양지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임금께 또 상소를 올렸다가…》

《그렇다면 조헌이란 선비로구나. 그 소문이 여기까지 미쳐왔다. 나라일을 바로잡기 위해 제 머리를 대궐주추돌에 짓쪼아 죽으려 했다던 선비가 틀림없구나. 그분의 편지를 빨리 주게.》

편지를 받아서 두번씩이나 보고 또 본 령규는 조헌의 인간됨을 다 헤아린듯 머리를 연신 끄덕이였다.

《그래그래, 그분이 옳게 썼어. 우린 서로 뜻이 맞아. 놈들이 머지않아 병란을 일으키리란 예언도, 그에 대처할 준비를 미리 다그쳐야 하리라는것도 이 소승의 생각과 꼭같구나. 아, 참으로 고명하시고 소탈하신분이시다.

이 소승이 구원해준 너를 그분이 뒤이어 또 너를 구원해주었으니 이게 우리 두 사람의 우연한 일치이겠느냐. 소승이 먼저 그분을 찾아가 뵈우리로다.》

령규스님은 조헌의 편지를 소중히 접어서 품속에 간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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