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2 장
정사가 부패하면 성돌이 썩는다
1
(1)
조헌이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인 그때로부터 어느덧 한해가 지나가고 신묘(1591)년이 찾아와 벌써 새봄을 불러왔다.
옥천시내가에 얼음이 풀리고 맑은 물이 돌돌 흘렀다. 버들개지가 깨여나 노르스름한 솜털옷을 입고 봉긋이 부풀어오르더니 며칠이 지나서 살구꽃이 꽃구름처럼 피여나고 뒤이어 산야에 불붙듯이 진달래가 만발하였다.
약동하는 이 계절에 산천초목이 파랗게 살아오르는것과 같이 조헌의 이마상처에도 새살이 돋아오르고 차츰 아물어갔다. 그가 죽으려고 머리를
대궐주추돌에 련이어 짓쪼아 피를 쏟으며 의식을 잃었을 때에는 죽은 몸이나 다름없었다. 완기와 해동이, 덕보들이 《앗,
오늘은 처음으로 혼자서 바깥에 나왔다. 흰무명바지저고리에 흰무명수건으로 머리를 감싸매고 봄날의 푸른 하늘을 처음 보듯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눈확이 푹 꺼지고 얼굴은 병색이 짙었지만 다박수염은 예나제나 단정하게 가다듬어있었다.
부인과 가족식구모두가 밭에 나가서 집은 조용하였다.
그는 소일거리삼아 마당비를 들고 뜰을 쓸다가 잠시 허리를 펴고 집을 정겹게 돌아보았다.
안채는 아래웃간 두방에 부엌이 달리고 웃간에 곁달려 서재로 쓰이는 방이 따로 있다. 앞채는 대문칸을 사이에 두고 왼쪽과 바른쪽에 각기 살림방들이 있는데 왼쪽엔 완기부부가 얼마동안 살던 방이고 바른쪽엔 할멈(늙은 하인 녀자)내외와 삼녀가 사는 방이다. 거기에 잇달아 엇걸이로 꾸린 자그마한 방에는 해동이가 산다. 집은 옛날부터 대를 이어 물려주고 물려받은 집이여서 낡았으나 해마다 손질을 알뜰히 하여 비가 새거나 기울지도 않았다.
조헌이 귀양간 다음에도 늙은 할멈내외가 제집처럼 거두고 누가 어쩔세라 지킨 덕에 바람벽 흙 한줌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조헌이 귀양살이 떠날 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듯이 몇십리를 눈물로 적시며 따라나와 바래주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렇게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랐건만 정작 돌아온 나리님을 보니 생사를 알길없는 형편이여서 또 눈앞이 캄캄해왔다. 그래서 다시 마음속으로 우리 나리님 병을 털고 어서 일어나시라고 빌고 또 빌었다. 그 간절한 소원을 천지신명이 알았는지 반갑고도 기쁘게 나리님이 일어난것이다. 온 집안식구들은 구름장처럼 떠돌던 근심걱정이 가셔지고 개인날씨처럼 마음이 밝아져 요즈음엔 봄농사차비로 밭에 나간다.
《에구나 나리님, 그만두시우. 마당이야 쇤네가 쓸지 않으리오. 봄바람에 여우도 눈물을 흘린다는데 쌀쌀하오이다. 찬바람을 주의하여야지요.》
물동이를 안고 나오던 할멈이 입가에 반가운 웃음을 활짝 지으면서 조헌을 걱정해주었다.
《예, 주의하겠소이다.》
조헌은 할멈의 손을 다정히 잡았다.
《할머니가 이 사람의 상처를 낫게 해달라구 천지신명께 자꾸만 빌어서 내가 일어나게 되였수다. 하하-》
《나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왜 그런지 눈물이 나오이다.》
할멈이 눈물이 글썽하여 웃었다.
이때에 대문밖에서 《할머니-》하고 명랑쾌활히 찾으며 들어오던 삼녀가 나리님과 할멈이 즐겁게 웃는것을 보고 《아이 나리님, 웃으시네!》 하면서 미끄러지듯 달려와 조헌의 팔을 꼭 붙잡고 껑충껑충 좋아라 뛰였다. 나리님이 밖에 나와 오래간만에 웃으니 마당안팎이 환히 밝아진것같아서 더 반갑고 기뻤던것이다.
《아서라, 나리님 팔 상할라? 너는 인젠 색시가 되였어. 시집간 색시가 어린애처럼 버릇없이…》
할멈은 이발이 몇대밖에 없는 입을 하 벌리면서 웃었다.
《에그머니, 내가 정말 버릇없이-》
삼녀는 얼굴을 살짝 붉히였으나 조헌의 팔을 놓지 않았다.
《삼녀는 내 딸처럼 정이 가는구나. 너희들의 혼례를 잘 차려주지는 못했지만…》
삼녀는 어리광치듯 조헌의 팔을 더 껴안으면서 할멈을 곱게 흘기였다.
《할머니 보시라구요, 나리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나, 호호…》
《하긴 뭐, 이 늙은이도 너와 같은 마음이다. 나리님과 마님이랑 이 쇤네를 친할머니처럼 여겨주시니…》
할멈은 눈물이 글썽하여 삼녀를 바라보았다.
《너는 왜 나를 찾았니?》
《할머니, 오빠들이 지금 한창 두엄지게를 지고 줄달음치면서 땀을 동이로 흘려요. 마님도 땀을 흘리셔요. 마님이 샘물을 떠오라구 분부하셨어요.》
《그렇지 않아두 내 벌써 물을 떠가려구 했던 참이다.》
삼녀는 할멈이 안고있는 물동이를 받아들고 《나리님, 물을 떠가지고 밭으로 가겠나이다.》 하고 방긋이 웃으며 밖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새색시답게 쪽진 머리가 사랑스럽게 보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