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 회)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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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방에서 울리는 바이올린의 선률과 대조되게 아래방에서는 가슴을 허비는 흐느낌소리가 높아가고있었다. 안해 순애의 흐느낌소리였다.
옆에서 엄씨가 꺼지게 한숨쉬며 넉두리했다.
《어이구, 세상에 이런 변이 어디 있담. 뭐 반역자?! 이게 무슨 생벼락이냐, 생벼락!》
마침내 웃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상룡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방에 들어온 사람이 안해임을 알고있었다. 그는 활을 내리웠다.
《부국장동지네 집이 어디예요? 내 가서 다시 알아보겠어요.》
《그럴 필요없소. 그분은 터놓기 힘든 진실을 말했으니까.》
《진실?… 그럼 왜 조직에 찾아가 이야기하지 않는대요?》
이때 뒤따라 들어와 듣고있던 엄씨가 끼여들었다.
《그러게 내 말은 지금까지도 비밀을 지켜준 그 령감이 입에 자물쇨 더 든든히 채우구 모르쇠를 하면 만사가 무사무탈할게 아닌가, 엉?!》
《어머니, 설사 그분은 비밀을 지켜준다고 해두 저야 어디에 숨겠습니까? 량심앞에서는 숨을데가 없습니다.》
《량심? 량심두 살구야 량심이지 죽어 나자빠지면 그 량심을 누가 알아준다던가? 이 사람아 너무 고지식해두 못살아!》
엄씨의 역증엔 응대도 없이 덤덤히 서있는 유상룡을 흘기던 순애가 다시 캐물었다.
《도대체 변절자라구 하는 시아버지이름은 뭐래요?》
《이름은 모른다고 했소.》
《이름두 모른대요? 그럼 변절자루 처단되는건 봤대요?》
《보진 못했지만 들었다고 했소.》
순애의 두눈이 경악으로 뒤집히는데 엄씨가 더 결이 나서 주먹으로 방바닥을 쾅쾅 내려쳤다.
《아니, 이름 석자도 몰라, 죽는걸 제눈으로 보지두 못해, 천하에 지나가던 사람의 말 한마디를 듣고 〈난 변절자, 역적의 아들이웨다.〉 하겠다는건가, 엉? 호박쓰고 돼지굴에 뛰여들어두 분수가 있지. …》
순애도 옆에서 애타게 부르짖었다.
《여보, 과학적인 증거두 없는데 그 말을 믿어요?》
《증거가… 있소.》
《있다구요? 무슨 증거예요?》
《그 반역자가 엿장사라는거요. 왕우구근방을 돌아다닌 엿장사는 나의 아버지요.》
《정말, 엿장사같은 소릴 한다. 왕우구에 엿장사는 자네 아버지 혼자뿐이라던가?》
엄씨의 말에 이어 순애도 소리쳤다.
《아버지라는걸 누가 증명해요, 그 부국장이?》
《아니요.》
《그럼 누구예요?》
유상룡은 괴로움에 싸여 눈을 꽉 감고있는데 으스러지게 틀어쥔 그의 두주먹이 푸들푸들 떨고있었다.
《아, 어서 말해요, 누구예요?》
순애도 엄씨도 상룡의 입에서 터질 말을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저 입에서 과연 어떤 폭탄이 또 터질것인가.
《그 사람은… 그 사람은 나요.》
《당신이?!》
순애는 눈앞이 캄캄하여 휘청거리다가 졸지에 오금을 꺾으며 풀썩 주저앉았다. 엄씨도 너무 억이 막혀 벌린 입을 닫지 못하고 물기어린 눈만 껌뻑거렸다.
《에그마, 듣기에두 끔찍해라. 아, 제집안 허물을 제가 들춰 말하겠다?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구 동네방네 소문내. 미쳤구나, 미쳤어!》
고개를 떨구고 황소숨만 톺던 유상룡이 창가에서 획 돌아서며 옷걸이의 양복을 벗겨들었다. 순애가 겁질린 눈길로 오돌오돌 떨며 쳐다보았다.
《어델 갈려구 그래요? 이밤에?》
《이대로는 괴로워서 못견디겠소, 당조직에 찾아가서…》
순애의 얼굴은 백합처럼 하얗다못해 파랗게 질렸다. 엄씨가 벌떡 일어나 유상룡을 와락 잡아채서 돌려세웠다.
《아니, 제발루 꺼이꺼이 찾아가 날 죽여주시우 해?》
《그 길밖엔 없습니다, 그 길밖엔…》
《임자 실성했나, 엉? 제정신인가 말이야?》
《어머니, 제가 어떤 사람입니까?》
《거… 거야 내 사위구…》
《전… 당원입니다.》
당원이라는 소리에 일순 굳어졌던 엄씨가 흐트러진 머리를 무섭게 도리질했다.
《아니, 임잔 이 집안의 세대주야, 남편이구 아버지구. 그래 저 철이의 이마빡에 역적의 손자라는 글을 쪼아박겠다는건가, 엉?》
아들의 이름이 나오자 유상룡은 등골이 오싹했다. 지금까지는
《설사 철이에게 어떤 고통이 차례진다 해도 이 일은 숨길수 없습니다.》
《어이구, 코막구 답답해라. 이보라구, 구멍은 깎을수록 커지는 법이야. 제발 이 가슴이 터지는걸 보지 않겠거든 오새없이 놀지 말라구.》
《어머니, 당을 속이는건 아버지처럼 역적이 되는 길입니다.》
유상룡이 완강하게 나오자 엄씨도 단호한 결단으로 맞섰다.
《좋아, 가라구, 가! 난, 역적자식의 가시에미는 못되겠어. 에익, 더러운 꼴 보기 전에 나부터 죽어야지!》
엄씨가 문을 차며 달려나갔다.
《아니, 어머니!…》
순애가 울며 소리쳤다. 엄씨는 신발도 신지 않은채 맨발바람으로 아빠트계단을 내리뛰였다.
《어머니, 어데 가요, 서라요!》
아빠트 앞마당으로 향방없이 내달리는 어머니의 팔을 잡아채며 딸은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 어머니까지 이러면 난… 난… 어떡해요.》
《놔라. 나부터 죽겠다, 나 죽는걸 봐야 저 사람이 정신차려!》
엄씨가 딸 순애를 콱 밀쳤다. 순애가 뒤로 나가넘어지며 땅을 내려쳤다.
《그럼 내가 먼저 죽겠어요, 내가… 흑- 흐흑…》
《이것아, 너 죽으면 철이는 어쩔테냐! 철이는, 헉… 허헉…》
《어머니!-》
모녀가 불안고 오열을 터뜨렸다.
마당까지 쫓아나온 유상룡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넋나간 사람인양 멍하니 말뚝처럼 굳어져버렸다. 그는 반역자의 아들이라는 심리적중압감에서 순간이라도 벗어나고싶었으나 그 어떤 방도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 택한 길을 두고는 사소한 주저와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