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1 장
귀양지에서 돌아온 조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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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기서 조헌은 쓰고 단 인생의 험난한 령마루를 넘었다.
그는 고을과 고을을 지나면서 설한풍에 문짝들이 이리저리 열렸다 닫겼다 몸부림치는 빈집들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어디서나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나간것이다. 산야가 텅 비고 인가가 텅 비고 백성들의 마음이 텅 비였다. 이 공간으로 왜적이 쳐들어온다면 거침이 없을것이였다. 그는 그것이 당장 눈앞에 보여오는것처럼 몹시 불안하고 초조해지는것을 느꼈다.
며칠이 지나 경기땅에 들어서고 또 하루가 지나서 한성성밖 안세희의 집에 들리였다. 여기서 하루이틀 안해의 병조리를 하고 가려는것이다.
안세희는 환하게 웃으며 두팔을 활짝 펼치고 대문밖으로 뛰여나왔다.
《왔구만, 왔어. 수고했네. 고생했네.》 하고 조헌을 부둥켜안고 반기다가 《부인님이 무사히 돌아왔으니 그게 제일 기쁘오이다.》 하면서 또 완기의 손을 잡아흔들기도 하였다. 그는 사랑채 아래칸, 웃칸을 통채로 내주었다. 한때 소년과거를 보이려고 왔던 완기에게 내주었던 방이다. 완기는 너무나 송구스럽고 황송하여 어쩔바를 몰랐다.
《어르신님은 이런 때, 저런 때를 가리지 않으시구 우리를 도와주시니 감격이 그지없소이다. 소자가 벼슬에 올라 은공을 갚으려 했었는데 이제는 무엇으로 보답할지 모르겠나이다.》
《원, 별소릴. 가는 정, 오는 정인데.》
…잠시후에 조헌은 황윤길과 김성일을 상사와 부사로 임명하여 일본국에 우리 나라 사신을 보내기로 락착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헌은 대경실색하여 그것이 안세희의 잘못인것처럼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당치않은 소린가, 응? 왜놈들의 강박에 우리가 굴복한 격이 아닌가. 조선국왕이 새로 선 일본왕을 뵈우러 가야 한다, 조선임금이 일본왕에게 편지를 보내야 한다고 교만하게 놀아나는 왜놈사신들을 가만두더니 이제 와서는 끝내 손을 들고말았단 말인가?》
《일인즉 그렇게 되였네. 왜나라에 가는 상사 황윤길이 왜사신 겐소에게 <우리들이 귀국에 가게 되면 왜왕이 반드시 접대하는 절차가 있을것인데 그때의 절차에 대하여 자세히 들려줄수 있는가?> 고 물었네. 이것은 나라와 나라간에 호상존중하도록 례의절차를 의논하자는것인데 왜사신 겐소는 <우리 나라에서 접대하는 절차는 지금 확정하여 말하기가 어렵다.>고 뻔뻔스럽게 대답하였네. 이건 우리 사신을 국빈으로 대하지 않고 소똥차기로 맞겠다는 소리요.》
이렇게 말하는 안세희는 격분하여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통분하구나. 그 왜사신놈들을 당장 목을 쳐야 하는건데. 우리 나라를 치욕스러운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놈들을 어찌 용서한단 말인가.》
조헌은 앞에 있는 겐소를 내리치는것처럼 부르쥔 주먹으로 방바닥을 꽝 내리치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교활한 놈들이 우리 나라를 얕잡아보이는 행위를 천하에 드러내면서 여우처럼 우리의 눈치를 엿보는구나. 우리 임금과 조정이 저들과 대처할 힘이 있는지 알아내려고 앙큼한짓을 서슴지 않았는데 나라의 큰 벼슬을 차지하고있는 신하들은 무엇을 하고있는가. 어째서 왜놈들을 처단하지 못하는가, 왜 왜놈들과 관계를 끊어버리고 방비대책을 세우자고 임금께 말 한마디 올리지 못하는가.》
조헌의 가슴에는 분노가 설설 끓어올랐다. 뢰우가 터지기 직전처럼 두사람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래서 어쩌자는것인가 또 상소를 올리려나? 자네 혼자 그래야 닭알로 바위치기지. 이번엔 참고 견디게.》
《나도 아네. 하지만 왜놈들이 몇해안팎에 쳐들어올텐데 참고 견딜 시각이 없네. 이번에 마천령을 넘어오면서 보니 백성들이 굶어죽고 얼어죽고 마을마다, 집집마다 빈집이 많았네. 산야도 텅텅 비고 인가도 텅텅 비고 민심도 텅텅 비였네. 하니까 왜적이 거칠데없이 쉽게 쳐들어올수 있다고 생각하였네.》
《허지만 왜놈들이 쳐들어올지 어찌 알겠나?》
《허, 그게 무슨 소린가? 왜놈들이 놀아대는 꼴을 보고도 몰라? 왜나라 사신놈들이 우리 임금을 저희 나라로 오라가라 하면서 마치 우리 나라를 저희네 속국처럼 대하고있는것을 보아도 그래, 왜놈렴탐군들이 중이나 혹은 행상군으로 가장하고 우리 나라의 산과 강, 길들의 형편을 알아내려고 싸다니는걸 봐도 그래, 연해안의 우리 백성들과 군사들을 랍치해다가 성곽의 방비상태와 군사수를 알아내려고 하는것을 봐도 그래, 더우기는 충주에서 귀화한 일본인 가도쯔기놈이 정탐질을 하다가 매맞아죽은 사건을 봐도 그래, 왜놈들이 하는짓이 모두다 우리 나라를 침략할 준비를 갖추기 위한것들뿐인데 왜놈들이 쳐들어올지 알겠나가 무슨 소린가? 엉?-》
《중봉의 말이 옳네, 자네가 옳게 판단했네.》
안세희는 조헌에게 심중한 낯빛으로 머리를 끄덕이였다.
조헌은 흥분을 삭이듯 한동안 말이 없다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였다.
《개주역참의 늙은 역졸은 임금께 백성들을 굽어살피소서 하는 상소문을 올려달라고 했었네.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네. 언행을 삼가하라는 임금의 어지를 받은 몸이 아닌가.》
《잘했네. 이번에 리조(조선봉건왕조시기 관리임명 및 파면을 맡아보는 부서)에서 자네를 전적의 벼슬(성균관 정6품벼슬)에 올렸네, 이번에 또 상소를 하면 들어오는 복을 제발로 차버리는거라네. 견물우환이라고 하지 않나. 눈에 거슬리는것을 보고도 못본체 하면 되네.》
조헌을 전적의 벼슬에 추천한것은 새로 임명된 리조판서 홍세민인데 그는 임금이 《조헌을 용서하여 귀양을 풀어주노라. 너는 고향으로 돌아가 차후지시를 기다릴것이다.》라고 하였기때문에 조헌을 벼슬자리에 추천한것이다. 또 홍세민은 조헌의 상소에 한번도 규탄받지 않았던 사람이여서 조헌을 은근히 좋게 본탓인지도 몰랐다.
《뒤집힌 둥지에 성한 알이 없다고 불원간에 나라가 통채로 왜놈들에게 삼키우게 되였는데 그 벼슬은 해서 무슨 소용인가. 그것도 그렇지만 내 벼슬을 바라고 상소를 올리는것이 아니네. 왜놈들을 막고 나라와 백성들을 구원하자는것이지.》
《그걸 누가 모르나. 이번엔 반드시 자중하게. 내 자네를 위해 하는 말일세.》
《고맙네. 아, 왜 이리도 가슴이 아픈가. 우리가 굴복하여 왜나라에 사신을 보내다니. 정말 참아내지 못하겠네.》
신씨는 앓는 몸을 힘겹게 일으켜 나앉으며 곡진히 권유하였다.
《어른께서 또 상소할 생각이오이까? 너무 서두르지 마시옵소. 급히 먹는 밥이 얹힌다고 하였으니 고향에 내려가 몸과 마음을 안정하면서 임금의 어지대로 차후지시를 기다려야 하오이다.》
조헌은 괴롭게 긴숨을 내쉬면서 한동안 묵묵히 있다가 사색깊은 눈길을 들었다.
《부인에게 미안하오. 오늘 못하면 래일엔 벌써 늦소. 왜적을 오늘에 미리 방비하지 않으면 래일에 나라가 망한다는것이요. 이것을 누구도 모를리 없겠는데 나서는 신하들이 없소. 나 홀로라도 임금을 깨우쳐드릴수밖에 없소. 언행을 삼가하라던 어지를 어기고 또다시 상소하면 나는 죄를 짓고 처형당할수도 있소. 내 죽어 한줌의 흙이 되여서라도 임금이 딛고있는 땅을 보태고싶소.》
(아, 죽어 한줌의 흙이 되여서 임금의 땅을 보태겠다고?!)
신씨는 남편의 충정에 뜨거운 눈물을 뿌리고 안세희도 깊이 감복되여 그를 막지 못하였다. 완기와 해동이, 덕보도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