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1 장
귀양지에서 돌아온 조헌
6
(2)
덕보는
《그래서 그 스님의 팔뚝에 험상궂은 뜸자리가 많사오이다.》
《병자의 고통을 함께 겪는다고 생뜸을?!》
조헌은 놀라운 사실에 깊이 감동되여 《그 주지님이야말로 생불이시고나.》 하고 거듭 감탄하였다. 그 스님을 어느때든지 꼭 만나보고싶어졌다.
그들은 마천령굽이굽이를 돌아올라 마침내 령마루 고개길을 넘어섰다. 그러나 내리막길을 내리기도 헐치 않았다. 휘몰아치는 눈보라는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던것처럼 산등성이를 세차게 훑으며 치달아올랐다. 저 멀리 아득히 펼쳐진 벌판에서 거칠데없이 불어오는 찬바람은 모두 마천령에 부딪쳐서 아우성쳤다.
조헌의 일행은 신각이 보내준 두툼한 솜중치막을 입었지만 살을 에이는듯한 추위를 막아내기가 어려웠다. 말들도 어쩔줄 몰라 앞발을 공중걸이로 쳐들어올리면서 《오호웅-》 부르짖기도 하고 고삐를 나꾸채며 갈팡질팡하였다. 자칫 발을 잘못 짚으면 말도 썰매도 모두 가파로운 령길아래로 미끄러져내려 자취없이 눈사태속에 파묻혀버릴수 있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자연과의 싸움에서 그들은 끝끝내 이기였다.
가파로운 내리막길이 끝나고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펑퍼짐한 길이 나졌다. 찬바람이 불어오던 벌방지대도 산에 가리워보이지 않았다. 바람도 잦아들고 추위도 퍽 가라앉았다.
조헌은 서리가 하얗게 내돋은 이불깃을 가만히 들어올리고 안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신씨는 푸르스름히 얼어든 입술을 힘들게 열었다.
《어른께선 몸이 얼지 않았소이까?》
조헌은 빙그레 웃었다.
《내 걱정은 마우. 그저 부인만 견디여내면 되오. 해지기 전에 인가를 찾아낼수 있을거요. 그러면 더운 방에서 며칠이건 부인이 길을 떠날만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도록 합시다.》
신씨는 고개를 돌려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해를 이윽히 바라보았다.
《어른이 계시는데 어이 견디지 못하리까. 어서 떠납시다.》
말들은 썰매발구를 끌고 잦은걸음으로 잘 달리였다.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좋은 길을 만날 때 사람들의 마음이 즐겁기마련이다.
허지만 그들의 마음은 무거웠다. 완기의 삼촌이 누워있는 산기슭이 보여왔던것이다. 아름드리소나무가 두 봉분을 묵묵히 지켜서서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눈가루를 뿌려주고있었다.
조헌이네들은 봉분이 올려다보이는 길가에 발구를 멈춰세웠다.
완기와 해동이, 덕보는 묘지에 올라가 그옆에 잔솔나무가지들을 꺾어서 묘지의 눈을 정성껏 쓸어냈다. 그리고 다 함께 엎드려 세번 절을 하였다. 조헌은 안해를 안아일으켜서 묘지를 향해 앉혀주었다. 신씨는 눈물을 뿌리며 앉은절을 하였다.
《삼촌, 차디찬 땅속에서 얼마나 추우리까. 우리와 함께 삼촌이 돌아갈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이고… 하늘도 무심하오이다. 조천삼촌…》 하고 목놓아 호곡하였다.
조헌은 묘지를 향해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삼키였다. 잠시후에 그들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기였다.
해는 이미 산넘어지고 피빛같은 저녁노을이 비껴왔다. 점점 뒤로 멀어지는 묘지를 뒤돌아보는 조헌은 칼로 가슴을 베이는것같이 아팠다. (아, 나의 귀양살이를 돌봐주려고 따라오다가 이렇게 무인산중에 묻히였으니 이 무슨 일이냐. 동생 하나도 구원 못하는 내가 나라를 구원한다고 어찌 임금께 상소를 올렸던가. 나 하나 잘못한탓으로 사랑하는 너도 이 세상을 하직하고 종도 너를 따라갔구나.
물어보자, 마천령아. 너 수천년 여기 솟아있거늘 너는 보았을것이로다. 멀고먼 옛날 단군조선이래 이 땅에 흥했다가 쇠하고 쇠했다가 망한 나라가 많았지만 오늘처럼 백성들이 굶주리고 전염병에 무리죽음을 내던 때가 있었더냐 없었더냐.)
조헌의 마음처럼 저녁노을이 더더욱 피빛으로 타올랐다. 조헌은 발구들앞에서 말을 몰아 습보로 달리였다.
그들이 어느한 굽인돌이를 돌아서는 순간 갑자기 눈길우에 그리 크지 않은 소나무가 뿌지직소리를 내면서 행길을 가로지르며 넘어졌다.
하마트면 조헌과 신씨가 누워가는 썰매가 소나무에 깔릴번하였다.
모두 말과 썰매를 멈춰세우고 나무가 넘어진 산비탈우를 바라보았다. 소나무가 저절로 넘어질수는 없었다.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다를가 산비탈우에 사나이 셋이 우뚝우뚝 솟더니 껄껄 웃었다. 말발구주인들을 깜짝 놀래운것이 통쾌한듯이 -
《이놈들, 게 섰거라. 청석골에서만 림꺽정이가 나타났다더냐. 이 마천령에도 림꺽정이가 있다. 너희 량반토호놈들의 길목을 지키고있는 림꺽정이다. 알아들었느냐?》
림꺽정이 악질관리들, 토호들을 족쳐대던 때가 불과 30~40년전의 일이라 당시의 백성들은 림꺽정을 잊지 않고있었을뿐만아니라 또다시 그런 의로운 사람들이 들구일어나기를 바라고있었다.
조헌은 사태를 알아차리고 그들에게 껄껄 마주웃어주었다.
《허, 마천령의 림꺽정이라. 너희들이 진짜 림꺽정인지 가짜인지 알아야 하겠으니 이리 내려와 뵈워라. 그리고 우리가 악덕관리인가 아닌가도 볼겸 어서 내려오너라.》
산비탈에 서있는 세사람중에 우두머리인듯한 사나이가 매우 사납게 호령하였다.
《네놈들이 말을 세마리나 끌고 발구에 짐을 그득히 실었으니 백성들의 등껍질을 벗겨가지고가는 놈들이 헨둥한데 무슨 잔말이냐. 언거언래할것 없다. 살겠거든 말과 발구를 고스란히 놓고가거라.》
산발이 쩌렁쩌렁 울리는 그 목소리에 이어 이번에는 그옆의 사나이가 서리발이 시퍼렇게 내돋은 도끼를 번쩍 높이 들어올리였다.
《이놈들, 이 도끼를 봐라. 방금 나무를 찍어넘긴 도끼다. 다음은 너희들의 모가지들을 찍어넘길 도끼다. 너희놈들이 군사 하나를 데리고간대야 무슨 소용이 되겠느냐, 어서 두령님의 령대로 하지 못하겠느냐. 불복하면 모가지없는 귀신이 되여 이 추운날에 돌덩이처럼 얼어버리리라.》
조헌은 갈길이 지체되는것이 급난이였지만 침착하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림꺽정의 이름을 팔아먹으면서 행인들을 털어내는 좀스러운 길도적이로구나. 오냐, 이리들 내려오너라. 백성들의 등껍질을 벗겨서 실어가는 재물이 있거든 너희들 마음대로 다 가져가거라. 재물이 없거든 이 소나무를 너희들의 손으로 치우고 길을 열어라.》
《무엇이야? 하루강아지 범무서운줄 모른다더니 네놈들이 감히 누굴보고 길도적이래? 누굴보고 림꺽정의 이름을 팔아먹는대? 이놈들 진짜 림꺽정의 맛을 보고싶으냐?》하고 우두머리인듯한 사내가 등뒤에 지고있던 장칼을 쑥 뽑아들었다. 그옆에 있는 다른 사내도 싸움칼을 번쩍 뽑아들고 손바닥에 침을 탁탁 뱉아서 다시 칼자루를 잡아쥐였다.
《해는 지고 날은 저무는데 너희들은 무인산중에 얼마나 고생을 하느냐. 어서 내려들 오게. 와서 제눈으로 봐야 내 말이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알게 아닌가. 말공부는 그만하자.》
조헌이 이렇게 《림꺽정》이들을 타이르듯 하자 두령인듯한 사내가 놀림을 당한듯 약이 올라 입에다가 손가락을 집어넣고 휘파람을 불어대였다.
《형제들, 저놈들을 사정두지 말고 모조리 목대를 꺾어놓아라.》
순간 보이지 않던 《림꺽정》패들이 눈속에서 불쑥 솟구쳐올랐다. 열두엇이 되였는데 모두 싸움칼을 들었다. 이미 두령과 함께 있던 사내들까지 합치면 열다섯이 되였다.
완기와 해동이, 덕보는 조헌의 옆으로 다가섰다.
열다섯과 넷, 차이가 엄청났다. 그러나 그들은 배심이 든든하였다.
완기, 해동이는 혼자서라도 너덧놈은 얼마든지 당해낼 무술과 택견술을 지니고있었고 덕보는 신각사또님의 슬하에서 무술을 닦아온터이라 대여섯을 능히 제낄수 있는것이다. 조헌은 말할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