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1 장

귀양지에서 돌아온 조헌

4

 

방울이 할머니걱정에 잠못이루고 백성들의 하정을 모르는 임금과 조정이 한스러워 뜬눈으로 밤을 새운 조헌은 새벽일찌기 가족을 이끌고 길을 떠났다.

방울이 할머니에게 어제저녁 먹던 밥과 떡을 도시락에 담아 안겨주고 떠났지만 도무지 그들의 처지가 못내 가엾어서 마음이 편안치 않았다.

길이 좋고 날씨가 좋을 때에는 하루에 80여리를 어둡기전에 축냈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60리이상 벗어나지 못하였다. 더구나 굶어죽은 사람들을 만나면 눈으로라도 봉분처럼 만들어주고 그 사연을 그 고을관가나 인가를 찾아가 알려주고 가느라고 더욱 늦어졌다.

해동이 입에서 건드러지게 흘러나오던 흥타령이 어느사이에 가뭇없이 사라지고 하루종일 가도 말 한마디없이 갈 때가 많았다.

이따금 삼녀가 《마님, 춥지 않소이까?》하거나 또 《해동오빠, 좀 세워줘요. 나리님, 마님이 괴로와하나이다.》 하는 소리가 날뿐이다. 그럴때면 앞서가던 조헌이 말을 내려 안해의 이마를 짚어보고 이불속에 손을 넣어 맥을 보기도 하고 침을 놓기도 하였다.

신씨가 앓아눕게 된것은 지난봄에 귀양지로 갈 때 마천령지경에 이르러 역병(전염병)에 걸렸던탓이다.

당시에 강원도일대와 함경도근경에는 몹쓸 역병이 돌아서 많은 백성들이 죽었다. 변변히 먹지 못하고 고역에 지쳐서 뼈만 남은 사람들에게 역병이 쉽게 접어들었다. 이런 지경을 며칠동안 가는중에 형을 도와 귀양길에 따라나섰던 조헌이의 동생 조전과 그의 종이 역병에 전염되여 사흘만에 객사하였다.

조헌에게는 참으로 귀중한 동생이였다. 그도 과거를 보면 능히 장원급제를 할수 있었건만 형님의 벼슬살이를 보고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전염병에 걸린 조전은 자기를 업고가기도 하고 안아서 눕히기도 하면서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는 종에게 《나는 전염병에 걸린 사람인데 네가 나와 한몸처럼 붙어있으니 전염될라. 이제부터는 내곁을 가까이하지 말아라.》라고 하였지만 종은 그럴수록 자기 상전과 떨어질념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기의 상전인 조전을 뒤따라 죽었다.

조헌은 사랑하는 동생을 그러안고 신씨는 시동생의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쥐고 목놓아울었다. 그 두사람을 마천령기슭의 양지바른 곳에 나란히 안장하였는데 봉분을 꼭같이 하였다. 어느 묘지가 상전의 묘지이고 종의 봉분인지 구별할수 없었다. 조헌이 사람에 대하여 차별을 두지 않는것은 이와 같았다.

하루가 지나 마천령을 내리는 중낮부터 신씨의 몸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날씨가 한증칸처럼 무더워서 신씨가 더 괴로와하였다.

조헌이 병세를 보니 안해가 전염병에 걸린것이 분명하였다. 아아, 이를 어쩔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제는 동생을 잃고 하루가 지난 오늘에는 안해마저 잃게 되지 않았는가.

그는 절로 솟아나는 눈물을 삼키고 사방을 두릿두릿 살피였다.

마침 가까운 곳에 맑은 물이 돌돌 흐르는 작은 시내가 풀숲에 가리워있었다. 그는 그옆에 초막을 짓게 하고 안해를 안아눕히였다.

조헌은 완기와 삼녀에게 긴히 일렀다.

《너희들은 어머니 이마와 목부위에 찬물찜질을 열심히 해드려라. 열독을 직심스럽게 뽑아야 한다. 해동이와 나는 약을 구하러 인가나 의원을 찾아다녀봐야겠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겠다.》

조헌과 해동이는 말에 올라 급히 채찍을 얹었다. 조헌이 탄 말은 집에서 부리던 말이고 해동이가 탄 말은 옥천을 떠나올 때 마을로인이 준 말이다. 그들이 숲이 무성한 산골길을 굽이돌아가는데 뜻밖에도 어떤 중 하나가 호랑이앞에 맞서있었다.

호랑이는 얼룩얼룩한 꼬리를 슬근슬근 휘저으면서 시뻘건 입을 벌리고 으르렁거리고 중은 주먹을 꽉 부르쥔 왼손을 마치 방패처럼 억세게 굽혀 가슴앞으로 내댔는데 오른손엔 지팽인듯한것을 장검처럼 머리우에 비껴들고있었다. 호랑이가 달려들면 단매에 꺼꾸러뜨릴듯 그 기상이 용맹무쌍하였다.

순간 조헌과 해동이는 벼락같이 말을 몰아 달려나오며 뢰성처럼 소리쳤다.

《이놈의 호랑이, 죽어봐라!》

호랑이는 말탄 두사람이 짓쳐나오는 기세에 놀라 도망쳤다.

《스님은 참말 대담하시오이다. 어디 다친데는 없소이까?》

조헌은 말에서 내려 중과 인사를 나누었다.

《아니옵니다. 보잘것없는 소승을 무인산중에서 구원해준 그 은혜 무엇으로 갚겠소이까.》

중은 몸도 거쿨지고 목소리도 우렁우렁하여 중이라기보다 무인다왔다.

《스님은 혼자서라도 호랑이를 당할수 있었는데 혹시나 하여 우리가 나섰소이다. 대담하고 용감하고 침착한 스님의 모습에 실로 감복되옵니다. 그럼 우리는 급한 병자가 있어서 가겠소이다.》

조헌과 해동이는 다시 말우에 올라 고삐를 잡았다.

《요즘 급한 병이라면 역병이겠는데 소승에게 마침 약이 있소이다. 소승이 여기 마천사에 왔다가 주지님이 주는 약을 가지고 가는 길인데 약효가 대단하다고 하옵니다. 어서 병자가 있는 곳으로 갑시다.》

신씨는 스님이 주는 약을 먹고 열이 씻은듯이 내리였다. 며칠만에는 병이 나아서 귀양지까지 무사히 가낼수 있었다. 그러나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데다가 귀양살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였다. 하더니 끝내 자리에 눕게 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날에도 썰매에 누워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길주 령동역을 떠나서 여드레째되는 날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저녁때에 고래등같은 관가가 멀지 않게 나타났다.

마천령을 뒤에 두고 넓은 벌을 안고있는 동주고을(김책)은 예로부터 땅이 기름지고 낟알이 잘되여 물산이 풍부하기로 소문난 고장이다.

마천령의 깊은 계곡마다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합수되여 동주천을 이루고 동주천은 생명수가 되여 오곡을 풍성히 자래운다. 동주천을 따라 하류에 가면 큰 포구가 있어서 고기실은 돛배들이 분주히 드나든다.

땅에선 오곡을 키우고 바다에선 물고기를 잡아들이고 마천령산발에선 나무를 실어내려서 목재로 집을 짓고 장작불로 생선국을 끓이고 노랗게 물고기를 구워먹는 곳이라 점차 인총이 많아지고 고을이 번창해져서 고을원으로 목사가 틀고앉은것이다.

이런 부유하고 먹을알이 있는 노란자위고을에 관장으로 부임되기는 쉽지 않았다. 큰 세줄을 타지 않거나 큰 뢰물을 섬겨바치지 않고는 바랄수 없는 벼슬자리였다. 이 고장 목사도 그렇게 부임되여왔을것이라고 조헌은 생각하였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앓는 안해를 하루밤이라도 더운 방에서 재워야 하였다.

그는 썰매를 멈춰세우고 관가를 바라보았다. 멀리에서 보아도 관가를 둘러싸고 즐비하게 늘어선 석축담장이 위엄을 무상히 돋구고 주홍색의 커다란 대문이 무겁게 닫혀있는것을 알아볼수 있었다. 그안에 관가가 궁궐처럼 우뚝 솟아있었다. 관가가 저렇게 거루고각으로 솟아오르면 백성들의 집들은 기둥과 서까래가 기울어지며 이영이 썩고 피페해지는것이다. 마치 큰 나무아래 작은 나무가 자라다가 말라죽고 뿌리가 썩는것과 마찬가지다. 이 고을아근을 지나오면서 본 빈집들, 류랑걸식으로 떠나간 주인들을 부르며 쓰러져가는 게딱지같은 집들이 그것을 잘 말해주는것이다.

내 어찌 백성들을 짓누르고 솟아있는 관가를 찾아들수 있겠는가. 조헌은 그냥 지나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또 앓는 안해를 생각하면 그렇게도 할수 없었다.

아버님, 오늘밤은 어머님을 더운 방에 모셔야 하겠소이다.》 완기가 간청하듯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는 어머니를 위하는 효심이 이글거리고있었다. 조헌은 그 마음을 물리칠수 없었다.

《그러자.》

조헌은 마침내 말머리를 돌려 관청으로 접어드는 길에 들어섰다.

해동이도 삼녀도 오늘밤 마님이 걱정스러웠는데 그 걱정이 풀린듯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조헌이 마지못해 아들의 말을 따른것은 선전관 안세희가 먼저 앞서가면서 미리 말해두겠으니 지나는 길에 있는 관가의 도움을 받으며 가라던 말이 떠오른데도 있었다. 안세희의 그리도 지극한 우애심을 외면하고 간다면 그것도 안될것이다.

조헌이 가솔을 이끌고 관가에 당도하니 석담이 성벽같고 대문이 성문같은데 거기에 창을 세워잡고 서있던 파수군사가 한발 나섰다.

《혹시 충청도로 가시는 조헌이란분이 아니신지요?》

《그렇소.》

《사또께서는 나리님이 오시면 알리라고 분부하셨소이다. 잠간 기다리시오이다.》

잠시후에 맨 망건바람에 벌겋게 취한 얼굴을 하고 옷과 괴춤이 단정치 못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소인은 이 고을 리방올시다. 나리님, 어서 들어가십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사또님 작은댁의 생신날이여서 연회를 베풀고 흥취를 돋구고있는중이오이다.

자, 어서 들어가십시다. 사또께서 기다리고계시나이다.》

리방은 기분이 흥떠서 벙글거리였다.

조헌은 길가에 얼어죽은 사람들이 눈에 밟혀와서 무엇인가 가슴속에 불끈 솟는것을 가까스로 눌러 참으며 술취한 리방을 못마땅히 바라보았다.

만약 리방이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조헌의 두눈에 번쩍이는 증오를 보았을것이였다. 그러나 리방은 그것을 가려볼수 없었다. 술기운에 제 자랑을 하듯이 묻지 않은 말을 물방아 물쏟듯하였다.

《산해진미가 다 올라서 상다리가 휘여들 판이오이다. 객은 또 얼마나 많이 모여들었는지 방마다 넘쳐나오이다. 뉘집 생일날이라고 오지 않겠소이까. … 아이구, 내가 푼수없이 아무말이나 망탕… 자, 좌우간 어서 들어가십시다.》

조헌은 리방의 말을 들을수록 기분이 좋지 않았다. 허지만 내색치 않고 흔연히 말하였다.

《허, 객들이 방마다 넘쳐난다니 우리가 앉을자리가 없겠구만. 우리는 돌아가겠소. 우리가 이렇게 루추한 차림으로 들어가면 흥이 깨질거요. 사또께 말해주시오. 고맙다고.

그건 그렇고 길가에 얼어죽은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거두어주어야 할것이요.》

조헌은 표연히 가솔을 이끌고 그자리를 떴다.

산봉우리들에 걸렸던 저녁노을이 점차 엷어져갔다. 눈보라는 일지 않았지만 추위는 맵짰다.

조헌과 완기, 해동이네들은 개주역참에서 방울이 할머니와 방울이에게 솜중치막을 벗어준 까닭에 맨 바지저고리뿐이였다. 그래서 더 추웠다.

아버님, 우리가 떠나오기를 잘하였소이다.》

《잘했다. 백성들이 얼어죽는데 그들은 술놀이에 빠져있다. 우리가 그자리에 함께 앉으면 그들과 꼭같은 놈이 아니겠느냐.》

아버님 말씀이 옳구나. 가다가 빈집이 나지면 어제처럼 자고가도 된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불돌도 달구어 이불속에 넣어주니 좋더라.》 신씨가 발구에 누운채로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말은 썰매발구를 끌고 잘도 달렸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가고가도 빈집이 보이지 않고 사람사는 집도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얼어죽을것 같았다. 하지만 죽을수가 나면 살수가 난다더니 거무스레 보이는 산모퉁이에 반디불같은 불빛이 가물거리였다.

가보니 일이 될 때라 주막집이였다. 모두 《후유-》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주인 계시오이까?》

조헌이 말에서 내려 마당으로 들어섰다. 불빛이 불그스레 비치는 부엌문이 열리고 중년의 녀인이 머리를 내밀었다.

《예, 누구시오이까?》

《지나가던 길손인데 하루밤 묵어가자구 왔소이다.》

《예, 그렇게 하소이다.》

녀인이 밖으로 나와 조헌의 뒤에 서있는 해동이와 완기 또 썰매발구에 누워있는 사람과 삼녀를 보고는 난색을 지었다.

《아이구, 야단났구나. 이 많은 사람을 어떻게객방이 하나인데다가 벌써 한사람이 차지했으니 이를 어쩐다? 이 추운 밤에 아니 받지도 못하구 헌데 객은 어디로 가시는 길이오이까?》

《충청도로 가는 사람들이요.》

《아니 뭐, 충청도?! 이런 변봤나.》

녀인은 깜짝 놀라 객방앞으로 뛰여갔다.

《여보시우. 객방손님, 어서 나오시우, 여기에 왔소이다. 충청도로 가는 사람들을 못 보았는가구 걱정도 많더니… 오셨소이다.》

《뭐, 뭐요?!》

객방에서 반가이 웨치면서 억대우같은 군사 하나가 맨 버선발로 뛰여나왔다.

《여보시오. 주모, 초롱불을 좀 비쳐주시오이다.》

녀인이 어느사이에 내왔는지 초롱불을 얼른 비쳐주었다.

군사는 자기가 찾는 조헌을 알아보고는 별안간 두무릎을 꺾어 앉으며 큰절을 하였다.

《나리님, 소인 문안드리나이다. 먼길에 얼마나

군사는 목이 꽉 메인듯 말끝도 맺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 웬일이요, 어서 일어나오. 나는 군사를 모르겠는데

조헌이 당혹하여 군사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이제 알게 되옵니다. 몸이 얼어들었겠는데 먼저 방에 들어가 몸부터 녹이면서 말씀올리겠소이다.》

군사는 무작정 조헌의 일행을 이끌어 객방으로 모셔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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