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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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동지께서는 이른아침 큰 배낭을 오른쪽어깨에 메시고 왼손에는 트렁크를 들고 내각청사계단을 바삐 오르시였다.

며칠전 김정일동지께서는 당력사연구소 과장 김태호가 림춘추로부터 넘겨받은 력사기록집들을 가져다가 밤을 지새시며 한장한장 보시였다. 그리고 력사기록집들을 트렁크에 넣으신 후 오늘은 이렇게 김일을 찾아 내각으로 나오신것이다.

빨찌산시절 림춘추에게는 남다른 별명이 있었는데 그것은 《배낭총각》이였다. 항일빨찌산치고 너나없이 다 배낭을 지고 다녔지만 림춘추에게 그런 별명이 붙은것은 리유가 있었다.

수령님께서는 인민들을 반일항전에 불러일으키기 위한 선전물을 발간하는 과업을 림춘추에게 주시였다. 그래서 《3. 1월간》명예기자 임무까지 맡은 림춘추는 그때부터 수령님의 항일혁명력사기록을 쓰기 시작했다. 끈끈이서방이라 할 정도로 매사에 깐깐한 림춘추는 사령관동지께서 진행하신 주요회의들은 물론 전투들에서 있은 가지가지의 일화들까지 다 깨알처럼 기록하였다. 그 기록장들을 이 세상 천만금보다 더 귀한 보물로, 생명으로 여긴 림춘추는 전투때에도 배낭만은 몸에서 떼여놓은적이 없었다.

《나에게서 제일 귀한것은 세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사령관동지의 항일혁명력사를 적은 기록장이고 둘째는 총, 셋째는 연필이요!》

림춘추는 늘 이렇게 말하며 력사기록책이 눈비에 젖을가봐 봇나무껍질로 뚜껑을 만들어 보관했다. 이 사연을 그이께서는 어머님으로부터 들으시였다.

림춘추는 해방후 조국에 돌아오자 그 력사기록자료들을 가지고 항일혁명투쟁사를 집필하려고 하였다. 수령님께서 그 사실을 아시고 오금을 박아놓으신것이 있었다.

《글을 쓰되 나에 대한 글을 쓰지 말고 항일대전에서 희생된 동지들에 대해서 쓰시오.》

해방후 건당, 건국, 건군과 조국해방전쟁의 준엄한 나날은 빨찌산문필가인 투사에게 집필시간을 줄수가 없었다. 그러나 항일혁명투쟁사집필은 그의 뇌리속에서 떠나본적이 없었다. 그러다나니 이런 일화까지 남겼다.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교조주의자들은 아무런 타산도 없이 원산을 《조선의 쎄바쓰또뽈》로 만들라는 지시를 강원도당위원장 림춘추에게 떨구었다. 그 지시가 적아간의 력량상차이를 무시한 무모한 지시이며 더우기는 빨찌산시절에 터득한 수령님의 전략전술, 수령님식싸움법이 아니라고 판단한 그는 적들의 맹폭격과 포격으로 중앙과의 련계가 끊어지자 자료배낭을 안고 전략적후퇴의 길에 올랐다.

수령님께서 교조주의자들이 내려보낸 무모한 지시를 취소하시고 원산으로 상륙하는 적들을 최대한 저지시키고 시간을 쟁취하여 조직적인 후퇴를 보장하면서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인민유격대활동을 광범히 전개할데 대한 지시를 다시 하달하시였으나 이미 후퇴길에 오른 림춘추에게 가닿지 못하였다.

그것으로 하여 그는 당중앙위원회 제3차전원회의에서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그때 《쎄바쓰또뽈》 주창자들은 자기들의 지시를 집행하지 않은 림춘추를 《비겁분자》라고 공격했다.

가관은 그후 군단 군의부장으로 내려온 림춘추에게 정말 죽을가봐 겁이 났댔는가고 놀려주는 항일의 전우들앞에서 그가 했다는 말이였다.

《그래 항일빨찌산에서 글쓰는 사람이라고는 나 혼자 살아남았는데 나까지 그 쎄바쓰또뽈이라는데서 죽어버리면 항일혁명투쟁사는 누가 써서 후대들에게 물려준단 말이요?》

림춘추는 전후에도 항일혁명투쟁사집필을 완성하려고 무진애를 썼다. 알바니아, 벌가리아에 대사로 나가있으면서도 집필을 계속하였는데 《대사추방사건》으로 귀국할 때에는 몇트렁크나 되는 원고묶음을 안고 돌아왔다. 이렇게 되여 세상에 나온것이 《항일무장투쟁시기를 회상하여》라는 부피두터운 도서였다. 수령님께서는 그 회상기를 국보적인 책이라고 높이 평가하시며 당중앙위원회와 자신의 이름으로 감사를 주시였다.

이어 그는 빨찌산때부터 소원하던 수령님의 항일혁명투쟁령도사를 집필하려고 했는데 이 사실을 아신 수령님께서는 지금 혁명전통을 주제로 한 문학예술작품들이 별로 신통한것이 없는데 빨찌산청년들에 대한 소설을 써보라고 하시였다. 그리고 2부작 장편소설 《청년전위》가 나왔을 때에는 청년교양에 아주 좋다고 하시면서 그 련속부를 쓰라고 하시였다.

림춘추가 수령님의 항일혁명투쟁령도사를 쓰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만약 자신에 대한 글을 쓸 때에는 당책벌을 주겠다고까지 엄하게 말씀하시였다.

그렇게 되여 이루지 못하고있는 그의 소원을 두고 누구보다 마음쓰신분은 바로 김정일동지이시였다.

김일은 배낭을 메시고 트렁크까지 드신 그이를 뵈옵자 난색을 지으며 당황하여 어쩔줄 몰라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트렁크를 여시고 보풀이 인 책들을 꺼내여 책상우에 올려놓으시였다. 그러시고는 봇나무껍질로 뚜껑을 한 두툼한 수첩장을 번지시였다.

《정말 천금보다 귀한 력사자료여서 몇번이고 곱씹어봤습니다.》

《림춘추동문 눈이나 비물에 책이 젖을가봐 봇나무껍질로 그렇게 뚜껑을 해서 쓰군 했습니다. 헌데 수령님의 항일혁명투쟁령도사가 많이 기록된 책들인데 지금껏 묻혀있으니…》

김정일동지께서는 담배 한가치를 꺼내시여 김일에게 권하신 후 성냥불을 켜시였다.

《사실 빨찌산때의 생활들을 사진이나 영화로도 찍어두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사진도 적지 않았지요. 그런데 국제당에서 보내달라구 련락원을 보냈고 우리도 국제당에 보관하는것이 좋을것이다 해서 두배낭이나 보냈다는데 그 련락원두, 함께 보냈던 대원들두 왜놈들과 맞다들려 희생된것같습니다.

그에 대해선 림춘추동무가 잘 알지요. 해방후에 림춘추동무가 연길에 파견되여 활동할 때 적들의 경찰관계문건들을 더러 입수했는데 거기에 그때 국제당에 보냈던 자료들이 있었다는것같습니다.》

《그런 일도 있었습니까?》

이어 그이께서는 깊은 명상에 잠기시여 선홍빛저녁노을이 비껴드는 창문쪽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저는 어릴적에 인상깊이 박혔던 하나의 추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아마 해방된 그 다음해였던것같습니다. 나는 그때 네살이였는데 어느 하루 우리 집에 투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우리 어머니를 못살게 굴지 않겠습니까. 조정철동지던지, 딸을 낳았는데 우리 집에서 축하턱을 내라는것이지요.

그날 우리 어머니가 눈물이 글썽해서 말씀하시더군요.

해방동이가 태여났군요. 우리가 찾은 땅에서 빨찌산의 후손이 태여났단 말이예요.

그담 내 손을 잡으시며 말씀하시더군요.

너한테 동생이 생겼다, 해방동이 동생이…〉

그때 어머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는 해방동이라는 말씀이 얼마나 부럽고 신비하게 들리던지

김일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김정일동지의 추억담을 들으며 자기를 비롯한 로세대가 새세대들에게 무엇을 물려줘야 하는가 하는 심각한 생각이 갈마들었던것이다. 그는 자기 자식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씀드렸다.

《예, 이제는 그 해방동이들이 시집장가갈 나이가 돼오지요. 그런데 우리 집 자식들부터가 자기들에게 붙은 해방동이라는 그 행복한 이름의 의미를 모르거니와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도 않은것같습니다. 왜 그들이 알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항일혈전의 멀고 험한 길을 헤쳐온 투사들이 그들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나도 그래서 이 력사자료들을 밤을 새워가며 보고 또 보았습니다.》

《말씀을 듣구보니 자책되는바가 큽니다. 빨찌산력사를 새세대들에게 하루빨리, 하나라도 더 들려줘야 하는건데 요새 와서 생각해보니 내 집안에서부터 후회되는 일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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