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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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전투를 목격했던 로인이 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30년이 가까워오는 오늘도 그날의 감격을 잊지 못하고있습니다. 만약 보천보의 인민들이 이 모형사판을 본다면 뭐라고 할것같습니까? 또 그 로인들이 조각가라면 이런 형성안을 만들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날의 목격자들이니까.》
리석은 당황하여 쥐구멍이라도 찾을듯 안절부절했다.
《생각해보시오. 리준이 헤그에서 배를 갈라 피를 뿌렸지만 조선이 독립을 이룩했습니까? 안중근이 할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처단했지만 이 땅에 해방만세가 울렸습니까? 하지만 보천보전투는 조선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것을 세계앞에 선언한 력사적총성이였습니다.》
《김일동지는 이 모형사판을 보고 오가잡탕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것같습니까? 동무들보다 조각에 조예가 깊어서겠습니까? 김일동지는 바로
《리석동무, 이번에 대기념비형성안을 창작하면서 백두산에 올라가봤습니까?》
리석은 물론 주대성이며 창작가들모두가 머리를 떨구었다.
《시인 조기천은 장편서사시 〈백두산〉에서 보천보시가전을 기록영화화면을 펼치듯 방불하고 생동하게 형상했습니다. 그가 보천보시가전의 목격자여서 그런 명작을 세상에 내놓았는가? 아닙니다. 보천보를 답사하고 백두산에도 여러번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받아안은 충격과 열정이 력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탄생시켰습니다.》
《인민이 바라고 조국청사에 길이 남을 대기념비를 세우려면 백두산에 올라 항일선렬들의 신념을 넋에 새기고 천고밀림에 슴배인 성스러운 피의 력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백두의 혁명정신을 조형예술적으로 완벽하게 형상한 대기념비를 일떠세울수 있습니다.》
열정에 넘치신 우렁우렁한 음성, 예지의 빛발이 샘처럼 솟구치는 안광, 20대의 젊음이 넘쳐나는
《백두산과 혁명전적지들을 답사하고나면 이 기념비형성안의 치명적결함에 대하여 동무들
《당장 백두산으로 떠나겠습니다!》
주대성의 흥분된 웨침에 이어 조각가들과 설계가들이 격정에 넘쳐 호응했다.
김일은 열이 뜬 눈길로 흥분에 휩싸인 창작가들을 지릅떠보았다.
《백두산답사가 산책이나 유람이 아니야, 험한 산세나 타보는 등산은 더욱 아니고…》
복도로 나온 김일은 가을볕에 영근 조이삭처럼 고개를 수굿한채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아직두 성이 풀리지 않았습니까?》
《전번에 료양소에 왔다가신 후 끙끙거리며 속방아질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이제 백년을 살겠습니까, 이백년을 살겠습니까? 또 후대들에게 돈을 물려주겠습니까, 재물을 물려주겠습니까? 우리 혁명의 생명인 백두산정신을 이어주고 죽어야 맘 편할게 아닙니까. 그런데 내각일만 생각하면서 탑건설엔 무관심했으니 면목이 없습니다.》
《난 김일동지가 옆에 계셔만 줘도 힘이 됩니다.》
《힘은커녕 오히려 짐이 되는데 무슨 말씀을, 요새두 비료생산때문에
깊은 생각에 잠겼던 김일이
《거, 오늘 나왔던김에 우리 방에서 얘기나 좀 하다 가십시오. 요샌 앞이 흐리터분한게 통…》
《왜, 앞이 잘 안보입니까?》
《아니, 이 눈이 아니구 이 눈이라고 할가?》 김일은 투박한 손가락으로 자기의 두눈을 가리켰다가 머리를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좌우간 우리 방으로 갑시다.》
하지만 오늘은 시간이 허락칠 않았다.
《김일동지, 오늘은 꼭 가야 할 일이 있어서 시간을 내지 못하겠습니다. 세포에 보고할 문제가 있어서 그럽니다.》
《세포에? 아니, 보고는 무슨?》
《예술영화촬영소에서 하고있는 영화창작정형을 보고해야 합니다.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를 각색해서 영화로 제작할 계획도 알리구…》
《이거 몸이 견디겠습니까? 물 한모금 마실 짬도 없이 바쁘게 다니시니…》
김일이 안타까와 혀를 차는데
《난 일없는데 료양소에서 나왔을 때보다 몸이 축가는것같습니다. 식사도 제때에 하시고… 그리고 이젠 댁으로 가십시오.》
급히 자리를 뜨려고 몇걸음 옮기시던
《참, 림춘추동지가 빨찌산때 기록했다는 력사자료들을 보셨습니까?》
《허, 그 구두쇠가 제집 궤짝에 넣어두고 아직 누구한테도 보여주질 않았습니다.》
《당력사연구소에 전부 보내왔습니다. 그 자료들을 한번 보시는게 어떻습니까? 저도 시간을 내서 꼭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김일의 앞에서는 애써 웃어보이시였지만 당중앙위원회청사로 가는 승용차안에서는 가슴이 답답하여 차창유리를 반쯤 내리시였다. 황혼무렵의 저녁바람이 열린 차창으로 흘러들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철덩이를 안은듯 무거우시였다. 보천보전투의 기관총수 김일이 말했듯이 기념비형성안은 오가잡탕이였다. 보천보의 목천복로인은 엎어말이라고 했던가?
더우기 문제의 심각성은 그 형성안을 보고 좋다고 평가한 사람들의 립장과 태도였다. 이것은 결코 미학관에 관한 문제가 아니였다.
불현듯
《혁명을 하자면 사람을 잘 알아야 하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지. 그러나 아니다. 혁명하는 당은 열길 물속은 몰라도 한길 사람속은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