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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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짐을 지고 오락가락하던 김도만은 3. 1운동이나 의병투쟁과 같은 반일애국의 마음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지만 이 고장의 옛 《향토사》에는 마을의 력사를 알게 하는데서 청년들교양에 좋은 글감이라고 하였다. 이윽고 주머니에서 담배곽을 꺼내더니 리만길에게 한대 권하였다.

리만길은 황송하여 자기에게도 담배가 있다며 얼결에 엽초담배쌈지를 꺼냈다.

김도만은 리만길에게 담배 한가치를 꺼내여 권한 후 자기도 엽초맛을 보자며 쌈지를 쥐였다. 리만길이 엽초는 독해서 피우기 힘들다고 했지만 김도만은 농촌에 나와서 엽초맛을 봐야 아래실정을 알수 있다고 하면서 껄껄 웃었다.

이윽고 김도만은 저쪽 방축옆에 서있는 차성준을 보며 옥계천의 사연만 들어도 청년들이 무심히 건너다니던 강을 두고 자기 고향에 대한 애착심이 생길수 있다고, 이것이 애국심이라고 못박았다.

김도만은 담배대를 쥐고 엉거주춤해서 서있는 리만길에게 성냥을 그어 불까지 붙여주면서 이번에는 강건너 오른쪽의 밤나무가 무성한 골짜기를 가리켰다.

《저기 밤나무가 무성한 골짜기엔 이름이 없소?》

《옛날엔 여우골이라고 했습니다.》

《오, 여우가 많은가?》

《아닙니다. 저 골짜기에 가성을 가진 기생퇴물이 외동딸을 키우며 살았는데 그 딸이 인물이 절색이여서 서울에 사는 량반이 이 고장을 지나다 보구 첩으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우처럼 간사하고 교활하여 궁성에서 관료들의 환심을 사가지고는 충신관료들을 모해하여 목을 치게 했답니다. 그래서 그 기생딸의 간특함이 사람들의 입에 올라 여우골이 됐다고 합니다.》

김도만은 자기도 잎담배를 붙여물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여가성의 기생딸과 여우골! 김소월선생이 이 이야기를 들었으면 후세에 길이 남을 시 한수를 지었을것이요. 역시 우리 나라의 강이나 산엔 다 뜻이 깊은 사연이 담겨져있소. 헌데 요새 청년들은 이런 깊은 사연들을 모르고 사니 제고장의 강이나 산을 무심히 대하군 한단 말이요. 그래서 내가 지방마다 제고장의 래력을 담은 향토사를 쓰라고 한것이요. 향토사야말로 자기 고향에 대한 애착심과 민족전통을 계승하는 백과전서란 말이요.》

김도만은 《향토꾸리기지도소조》 성원들을 돌아보다가 덤덤히 먼산만 바라보고있는 리당위원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동무네도 방금 들었지만 이 자그마한 리에 얼마나 기이한 사연이 담긴 이야기가 많소. 이런 력사를 향토사에 담으면 청년들교양에 큰 영향을 줄수 있지 않소.

그런데 리당위원장은 옳지 않단 말이야. 내 오면서 군당위원장도 비판하고 왔지만 이런 중요한 교양사업에 낯을 돌리지 않는다는게 말이 되는가, 엉?

삼화정은 채 못지었다지? 다 청년들을 위한것인데 왜 만사를 제쳐놓구 총동원시켜서 와닥닥 끝내지 못하고있소?》

리만길이 얼른 나서며 리당위원장을 두둔하였다.

《다 제 잘못이올시다. 삼화정서껀 향토꾸리기는 제가 맡구 리당위원장동문 다락밭공사를 맡아서

김도만은 리만길의 뿌연 변호에는 아랑곳없이 리당위원장을 그냥 다그었다.

《다락밭공사가 뭐 그리 중해서 그래? 이게 강냉이 몇t 더 내는것 하구 같은가? 농사야 한뉘 지어먹는건데 그 공사는 래년에 해두 되지 않나.》

평소에 인상이 수더분하던 리당위원장은 침침한 낯빛으로 대답했다.

《다락밭에서 올해농사를 지을것으로 작정하고 알곡생산계획을 올렸습니다. 그리구 래년에는 2단계로 기본경지면적의 나머지 비탈밭들을 전부 다락밭으로…》

그러자 김도만은 리당위원장의 말을 중둥무이해치우며 리만길에게 물었다.

《올해 알곡생산계획을 얼마나 올렸소?》

《농장적으로 작년도보다 10% 더 올렸습니다. 명년도에는 2단계공사까지 끝내고 30% 더 올릴 작정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우리 농장은 갈데없이 도적으로…》

김도만은 또 손을 홱 내리그었다.

《됐소, 올해는 작년도만큼 하오.》

그리고는 《향토꾸리기지도소조》성원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군협동농장경영위원회에 내가 그렇게 지시했다고 말하오. 그리구 다 달라붙어서 삼화정두 짓구 오작교두 놓으란 말이요.

특히 청년들을 발동시켜야 돼. 청년들이 그걸 지으면서 향토애가 자라나게 해야 한단 말이요. 내 그때 다시 와보겠소.

작년 추석에 난 김소월선생의 묘소에 가서 벌초를 하고 한잔 부었댔소. 한가해서 그런 걸음을 한게 아니라 가정에서 선친들을 잊지 않고 추억하듯이 나라에서도 선배들을 잊지 않고 추억하는건 제일가는 국사이기때문에 그랬던거요.》

손목시계를 보며 떠나려던 김도만은 차성준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삼복리의 《향토사》를 잘 쓰라고, 그것이 완성되면 자기가 보고 출판하여 《목민심서》처럼 이번엔 청년들의 필독도서로 하겠다고 했다.

리만길은 김도만이 이렇듯 추어주니 차성준을 곱지 않게 대해준것이 은근히 후회되기까지 했다.

(역시 저 성준이가 인물은 인물이야.)

리만길은 이 기회에 어떻게든 그의 앞길을 틔워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김도만에게 차성준이가 외무성에서 과장을 하댔는데 외국에 나가서 《봉선화》노래를 입에 올린통에 날벼락 맞구 고향에 내려왔다고 사실을 이야기했다.

《외국말도 네댓개나 하는 인재지요.》

리만길의 하소연에 김도만은 차성준의 아래우를 눈여겨살피다가 《허허…》 하고 허거픈 웃음을 터뜨렸다.

《박용국부장이 너무했군. 외교석상에서 부른 노래로서는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만 그렇다고 철직까지야 뭘…

봉선화, 그 노랜 우리 민족의 애국심의 응결체라고 할수 있는 명곡이요. 바로봉선화와 같은 노래가 우리 문학예술이 계승해야 할 전통이요.》

김도만은 힘을 주듯 차성준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락향했다고 너무 상심마오. 이번에 향토사만 잘 쓰면 내 국제부에 얘길 해서 다시 외무성에 소환하도록 조처하겠소.》 그리고는 《향토꾸리기지도소조》성원들을 돌아보았다.

《국제부에서 싫다면 우리 선전부에 데려다가 쓰지 뭐.》

김도만의 말에 리만길은 앞에선 욕질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늘 측은히 여겨오던 성준의 일이 다행히도 풀려지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에 웃음을 머금고 김도만을 보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농장에서 썩이긴 아까운 재간둥인데 좀 도와주십시오.》

차성준은 노래 《봉선화》를 놓고 전통계승이요, 애국심이요 하는 김도만의 요란한 언사에 선잠에서 깬 사람처럼 머리가 벙벙해졌다. 박용국은 《봉선화》를 두고 되게 문제를 세웠는데 김도만은 잔등까지 두드려주며 힘을 주니 자다깨난 지금이 해뜰녘인지, 달뜰녘인지 분간할수 없어 뗑해진 사람처럼 떠나는 김도만을 멍하니 바라만 볼뿐이였다. 허나 리만길은 제켠에서 성수가 나서 《향토사》에 복직의 운이 달렸으니 본때를 보이라고 청을 뽑았다.

《내 임자가 소환장을 받고 삼복리를 떠나는 날엔 만시름놓구 발편잠을 자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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