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1 장
귀양지에서 돌아온 조헌
2
(7)
완기도 크게 놀랐다. 리천고을 무인지경 고개마루에서 길도적놈들의 자루속에 들번하였던 아가씨가 이 집 대호군의 귀한 딸이였단 말인가. 그때로부터 한해가 흐르는 나날에 까맣게 잊었던 그때 그 아씨가 이렇게 나타날줄 누가 짐작이나 하랴. 완기는 옛말속에 나오는 일만 같아 잘 믿어지지 않았다.
박표는 《아, 이처럼 기이한 인연은 하늘이 맺어주는것이지 인력으로는 안된다. 하늘의 뜻은 어길수 없는것이라 임자는 우리 집 사람이니라.》하고 크게 기뻐하였다.
박표는 완기가 장원급제를 하였을 때부터 사위감으로 눌러놓았었고 일년이 흐른 오늘에는 집에 데려와서 슬그머니 안해와 딸에게 보이려고 하였는데 정녕 하늘의 뜻과 자기의 뜻이 하나로 겹쳐져서 기쁨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호호, 어른의 말씀이 백번 옳니라. 임자가 우리 집에 들어오면 어른께서 립신양명하도록 도와줄거네.》
설향이의 어머니는 입이 귀밑까지 건너가도록 웃으며 완기의 손을 또 잡아흔들었다.
설향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정찬 눈길로 남몰래 완기를 바라보다가 뛰노는 가슴을 붙안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암, 그렇구말구. 래일이라도 좋은 날을 골라 너희들의 혼례를 치르어야 하겠노라. 임자의 생각은 어떠하냐?》
박표는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완기에게 물었다.
완기는 당황하였다. 혼례를 치르다니? 학문을 한창 닦는 몸이 녀자에게 빠져들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그는 어떻게 할지 몰랐다.
《어르신께서 이렇듯 미거한 학동을 사랑하시니 감격이 그지없소이다. 하오나 저는 한미한 선비의 자제이고 제손으로 밭을 갈아 농사짓는 가난한 집에서 사옵나이다. 두 집의 차이는 하늘땅과 같은것이옵니다. 어찌 앉을자리, 설자리를 가릴줄 모르고 또 부모님의 승인도 없이 인륜대사를 결정하오리까. 바라옵건대 따님을 저의 집에 시집보내여 농사를 짓게 하지 마시옵소서.》
완기는 진정으로 혼사를 치를 생각이 없었다. 남의 도움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싶지도 않았다.
《원참, 무슨 소린가? 우리 설향이가 농사를 짓다니. 임자가 앞으로 높은 벼슬에 오를텐데 그 부인이 흙을 주물러? 호호호, 그런 걱정은 말게.》
설향이 어머니는 완기의 어깨를 살뜰히 두드려주는데 박표는 기쁘게 웃었다.
《임자의 말이 내 마음에 꼭 드네. 나도 어린시절에 가난한 선비의 집에서 부모님의 일손을 도왔네. 사람은 제힘으로 일어서야 해. 임자의 생각이 더욱 장하구만. 생각하는 품이 벌써 다르거던. 그래서 나와 부인이 그리고 우리 설향이가 임자를 취함이니 그리 알게. 임자의 부모님들에겐 례법대로 내가 중매군을 중신하여 보내도록 하겠네. 자, 이 기쁜 날에 임자도 기쁘게 음식을 들게.》 하고 껄껄 웃었다. …
며칠후에 중매군이 조헌의 집으로 500여리를 오르락, 내리락 하였었다. 첫번째도 두번째도 조헌은 한결같이 서울량반집과 사돈을 맺기에는 너무나 짝이 기울어서 넘겨다볼수 없다고 돌려보냈었다. 중매군이 세번째로 박표의 편지까지 가지고와서 승낙하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조헌의 마음을 돌려세우지 못하였다.
조헌은 그럴만도 하였다. 박표가 벼슬초기에는 인망이 있었지만 벼슬맛을 보기 시작하자부터 사람이 달라졌다. 학문도 있고 재주도 있었지만 그는 뢰물, 아첨으로 벼슬을 올리였다. 자기 리욕을 먼저 생각하면서 재산을 늘이였다. 이같은 사람과 사돈을 어찌 맺겠는가.
그러던 어느 봄날이였다. 이 혼사가 꼭 성취되도록 도와달라는 박표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인 토정 리지함의 나이많은 로부인이 하늘소를 타고 한성에서 옥천까지 내려왔다.
로부인은 박표에게 먼 외삼촌어머니벌이 되였다. 조헌과는 지난날 뜻깊게 맺어진 연고관계로 잊지 못할 사이였다.
조헌은 늙은이가 그 먼길에 로독을 무릅쓰고 찾아온것이 무척 놀랍고 마냥 반가와 지성껏 맞아들이였다. 그는 당대에 학문이 뛰여나고 대바르며
청렴고결한 토정을
부인도 지난날 조헌을 마치 시동생처럼 극진히 대해주었다.
조헌은 리지함선생과 우의가 깊었던 아버지의 연줄로 그를 알게 되고
조헌이 통진현 고을원으로 부임된 첫해에 고을정사에서 생각이 짧고 서투를가봐 마포강가에 있는 자기의 집에서 쪽배를 타고 통진현 조강까지 바다길 100여리를 노저어가며 아직 경험이 어린 그를 여러모로 이끌어주었다.
어느해인가는 자기가 원노릇을 하는 아산고을에 데리고가서 백성들의 집들과 고을의 여기저기를 다 돌아보게 한 다음 자기 집에 데려다가 점심을 함께 먹었다. 상을 물린 뒤에 리지함은 웃으며 조헌에게 물었다.
《통진원은 여기 아산고을에 와서 무엇을 보았소?》
《마을마다, 집집마다 집안팎이 깨끗이 손질되여있고 쌀독이 비지 않은것을 보았습니다. 관가도 백성들에게 위엄을 보이게 하려고 으리으리하도록 꾸미지 않았고 고을사또님이신 선생님이 계시는 동헌방에도 번쩍번쩍하는 기물이 없고 그대신 수수하게 꾸며져있는것을 보았습니다. 방금 우리가 물린 진지상에는 고기붙이나 어물붙이는 없고 김치나 된장, 푸성귀나물채밖에 없었습니다. 관장어른이 사는 이집에는 낡은 장농 하나와 칠이 벗겨진 옷장 하나밖에 보이지 않고 일반백성들의 집과 다름이 없는것을 보았습니다.
고을은 백성을 위하는 선생님의 청렴고결함, 착한 마음을 정사에 옮겨서 하나의 큰 책으로 펼쳐놓은것처럼 안겨들었소이다.
선생님, 아까 어느 백성의 집마당가에서 병아리를 거느린 어미닭이 무엇인가 먹을것을 입에 물었다가 놓았다 하면서 <끅, 끅> 병아리들을 불러 먹이는데 난데없는 수리개 한놈이 병아리를 향해 내려꽂히는게 아닙니까. 그때 어미닭이 <꼬꼬댁>, <꼬꼬댁> 하고 다급히 소리지르며 수리개를 맞받아 날아오르는것이였소이다. 수리개는 병아리를 덮쳐가지 못하고 다른곳으로 날아갔소이다. 어미닭은 병아리를 급히 불러모아 자기의 날개죽지 아래에 감추었소이다. 선생님, 이 어미닭에게서 내가 무엇을 보았는가 하면 백성들을 품어안고 애지중지 돌봐주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았소이다.》
조헌은 밝게 웃는데 그의 두눈에는 맑은 눈물이 솟아났다.
《허, 이런 변 봤나. 아니야, 이 고을원이 병아리를 품은 어미닭처럼 백성들을 돌봐주려면 아직 멀었네. 내 이제부터라도 어미닭을 닮겠네. 통진원도 그렇게 하게.》
《네, 명심하겠소이다.》
조헌이 목메인 대답을 올리는데 밖에서 늙수그레한 농사군 하나가 《사또님, 대나무골 맹억만이 문안드리옵니다.》 하고 황송히 넙적 엎드리면서 절을 하였다.
《응, 맹서방이구만. 어서 일어나게. 우물을 판다더니 응? 어찌 되였나?》
리지함은 웃음을 띄우고 친절히 물었다.
《사또님께서 조력군들을 보내주어 물이 나올 때까지 깊이 팔수 있는데 단지 어느날에 팔지 몰라 무엄하게도 점을 좀 쳐주십사하고 왔사옵니다. 함부로 땅을 깊이 파면 동티(땅귀신이 대노하여 내린다는 재앙)가 생긴다고 조력군들이 사또님께 점을 쳐오라고 법석이는게 아니겠소이까.》
《그래?! 허허, 날더러 점을 쳐달라고? 그럼 좋은 날을 잡아봐야겠군.》
리지함은 이내 자세를 바로가진 다음 눈을 감고 손가락을 꼽았다 폈다 하면서 일진(날자)을 헤아려보듯 한동안 중얼거리더니 눈을 번쩍 떴다.
《우물을 팔 날은 오늘도 좋고 래일까지도 좋구만. 그러나 그 이후엔 좋은 날이 없네그려.》
《야, 고맙소이다. 그럼 오늘 당장 우물을 파겠사옵니다.》
맹서방은 벙글거리면서 밖에 나가 대문가에 놓아두었던 묵직한 삼노구럭을 가지고왔다.
《이거 변변치 못하지만 받아주시오이다. 빈손으로 오기가 뭣해서…》
맹서방은 거듭 고맙다고 인사를 올리면서 누가 어쩔사이도 없이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