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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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복리 관리위원장 리만길은 자전거바퀴에 불이 일도록 발디디개를 밟아대며 옥계천강뚝을 달렸다. 방금 《향토꾸리기지도소조》에서 전화가 왔는데 인츰 중앙에서 큰 간부가 삼복리의 《향토꾸리기》정형을 료해하러 내려오니 륭숭한 접대는 물론 삼복리에 깃든 력사를 자상하게 쓴 《향토사》를 꼭 들려주라는 지시를 받았던것이다.

리만길은 석달전에 차성준에게 《향토사》를 쓰라고 당부했던것만큼 둬권쯤은 써놓았을것이라고 타산되여 써놓았노라 얼렁뚱땅 넘겼다. 외무성에 있으면서 쏘련(당시)이나 중국은 제 집 드나들듯 했고 중근동인지 하는데까지 가본 성준이고보면 세상만사가 손금보듯 환할터인즉 제고향에서 벌어진 일을 적어넣는 《향토사》쯤은 일필휘지했으리라.

리만길의 눈앞에는 성준이가 옥계동의 팔십고개를 넘은 마령감이며 여우골의 쌍둥이할머니를 만난다고 온 삼복리를 발이 닳도록 다니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중앙에서 왕림한다는 큰 간부앞에 성준이를 척 내세우면 《향토사》라는 짐 하나를 덜어놓는것은 물론이요, 그것으로 아직 더디게만 나가는 《향토꾸리기》공사의 결함을 어느 정도 가리우게 될지 모른다.

성준을 찾아 자전거를 드세게 몰아가던 리만길은 옥계천강뚝에서 그만 자전거와 함께 나딩굴었다. 두다리를 어찌나 바람개비처럼 돌렸는지 자전거사슬이 토막났던것이다. 리만길은 알알해오는 정갱이를 어루만지며 너슬거리는 자전거사슬을 치떠보았다. 대목장에 행금통 깨진다는 속담이 떠올라 쓴입을 쩝쩝 다시였다. 엎어진김에 쉬여간다고 자전거를 동뚝의 버드나무아래에 세워놓은 후 담배쌈지를 꺼내던 리만길은 버릇처럼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어쩐지 요새는 도깨비장물에 취한듯싶었다. 평생 농사밖에 모르고 살아온 자기가 《향토사》요, 《오작교》요 하며 뛰여다니는게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그는 어제밤 리당위원장과 처음으로 어성을 높이기까지 했다. 일전에 군에 불리워올라가 《향토꾸리기지휘부》에서 된추궁을 받고 돌아온 다음에도 리당위원장은 여전히 정각공사를 쓴외보듯 하면서 다락밭건설장에만 붙박혀있다가 차성희한테서 받은 당력사연구소의 편지를 까맣게 잊고 주지 않은것으로 자기에게 화를 냈던것이다. 리당위원장이 당력사연구소에서 걸어온 전화를 받고 편지를 찾느라 떠들어서야 리만길이 부랴부랴 책상을 뒤졌다.

항일유격대 정치공작원 리철의 행처를 찾는 편지를 보름이 지나도록 묵여두었으니 리당위원장도 어지간히 속이 탄게 분명했다. 리만길은 그대로 《향토꾸리기》에 어디 정신차릴새 있느냐며 낯이 뻘개서 목에 피줄을 세웠다. 하지만 리당위원장방에서 나와 별빛이 내려앉은 랭상모판을 돌아보면서는 인차 자기를 후회했다. 평시에 못박는 소리 한번 없던 리당위원장이 오죽하면 어성을 높였겠는가. 백천번 후회되는 처사였다.

리당위원장이 자기가 거기 있으리라고 짐작했는지 한밤중에 모판자리로 나왔다.

《관리위원장동지의 할아버지가 해방전에 부상을 당한채 경찰놈들에게 추격받다가 숨진 사람을 안장해주었다는데 혹시 그 사람이 유격대공작원이 아니였을가요?》

리만길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우다. 마지막숨을 톺을 때 우리 할아버지가 어디서 사는 누구인지 이름자라도 알려달라니까 금산이라는지 금손이라는지 하고는 숨졌다우다.

이나저나간에 거 웃사람들과 너무 그러지 마우. 어디서나 모범인 우리 삼복리가 그까짓 정각서껀 다리 하나 못 놔서 말밥에 오르겠소?

리당위원장이 그런것때문에 해를 입을가봐 걱정이 돼서 그러우. 황차 리에 멋들어진 정각두 있구 오작교인지 하는 다리두 있으면 좋지 뭘 그러우?》

리당위원장은 쌈지를 꺼내여 부스럭부스럭 담배를 말았다.

《농사군이야 농사부터 잘 짓구봐야지요.》

리만길은 장알이 박힌 손바닥으로 땀이 질벅한 목덜미를 훔치며 담배불을 끄고는 자리에서 움쭉 일어섰다.

성준이네 집대문을 열고 뛰여드니 안방에서 책상을 마주하고앉아 뭔가 부지런히 쓰고있던 성준이 열려진 문을 넘으며 반색했다. 리만길은 차성준이가 대견하여 사람좋게 웃으며 그의 등을 철썩 쳤다.

《음, 역시 임자한텐 책상이 안성맞춤이구만. 그래 얼마나 썼나, 향토사를?》

리만길은 책상에 무둑히 쌓인 종이장들을 들고 보다가 그만에야 입을 딱 벌렸다. 종이장을 꽉 채운건 온통 꼬부랑글들이 아닌가.

《엉? 이 꼬부랑글들은 뭔가? 아, 향토사를 쓰라고 했는데 알겠수다 해놓고는 골방에서 이게 뭔가 말일세?》

리만길이 푸르락붉으락하며 눈알을 굴리는데 차성준도 멋적은지 안경을 추슬러올리고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셈평좋게 웃었다.

《관리위원장동지, 쓸게 있어야 펜을 들지요. 온통 옛날옛적에 하며 무슨 관리가 살다 죽었소, 어떤 기생이 죽다 살았소 하는 얘기뿐인데 그런걸 써서 애국주의교양이 됩니까?》

《아, 자네더러 그따윌 상관하라던가? 우에서 향토사를 쓰라면 쓸거지 뭘 시시콜콜 따지며 발뺌인가, 엉?》

《관리위원장동지, 관리위원장동지 할아버진 사냥한 곰을 일본놈들에게 고스란히 바치지 않았다고 하여 류치장에서 곤욕을 치르구 그 후환으로 앓다가 잘못되지 않았습니까. 향토사에 그런 이야길 쓰면 후대교양에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차성준의 이 말엔 리만길이도 목구멍이 꺽 막혔다. 얼핏 듣기에도 옳을상싶었다. 아니, 옳았다.

《향토꾸리기10개년계획》이라는 문턱에 처음 들어설 땐 얼마나 희한했던가. 청기와를 얹은 《삼화정》이며 구슬같은 맑은 물이 출렁이는 못에 무지개처럼 드리운 궁륭식오작교, 그런가하면 북소리, 꽹과리소리가 어깨춤을 불러내는 무도장 리만길은 흥그러운 마음에 코노래를 부르며 동화세계의 첫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 동화세계는 가면 갈수록 그 끝이 묘연한 미궁이나 같았다.

매일 저녁 무도장에 나와 《나비쌍쌍 날아든다》 노래하며 춤을 추라니 며칠 말을 듣는것같던 리사로청위원장은 리당위원장이 춤을 추겠거든 다락밭공사장에서 쉴참에 추라고 했다면서 무도장놀음을 걷어치우고말았다.

《명절도 휴식일도 아닌 때에 매일 밤 춤을 추라니 하루종일 일하던 청년들이 피곤에 몰려 졸면서 빙글빙글 돌아가는가 하면 낮엔 일하러나오지 않고 저녁에 무도장에만 나오기도 하고 또 무도회바람에 들떠서 도회지로 뛸 궁냥까지 합니다.》

《?

그 말에 리만길은 《향토꾸리기10개년계획》이라는것이 나라의 쌀독을 책임진 주인이 되여야 할 청년들을 외지밭으로 끌고가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례년보다 절기가 앞당겨진 바쁜 농사철에 여기저기에 《향토꾸리기》 건설을 벌려놓고보니 천하지대본인 농사가 강건너 불이 될가봐 속이 쟁개비끓듯 바질거렸다.

다행히도 잘하는건지 못하는건지는 몰라도 리당위원장이 고집을 부리며 청년들을 휘동해서 다락밭공사를 거의 마감지어가고있었다. 할수없이 정각공사는 리만길이 농장의 중로배들을 분조마다 한명씩 뽑아서 뚝딱거리는데 농사를 책임진 관리위원장이 농사와 상관없는 일에 바삐 돌아가고있는것이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였다. 하지만 우에서 요구하는 일이고보면 이제 와서 시비를 따질 형편도 못되였다.

리만길은 오금을 꺾고 풀썩 주저앉았다. 차성준에게 《향토사》를 쓰라고 한것이 후회막심하였다. 이제부턴 축산반에 나가 돼지우리청소를 하라고 으름장을 놓고싶었지만 우에서 간부가 내려온다니 오늘은 그새 료해한 자료들을 말로나마 듣기 좋게 섬기라고 얼리지 않을수 없었다.

삼복리에 내려온다고 소문낸 간부는 검은색닫긴깃양복에 작업복과 같은 회색평상복을 걸친 수수한 차림의 김도만이였다. 《향토꾸리기지도소조》를 대동하고 삼복리에 나타난 그는 사람좋게 웃으며 관리위원회 앞마당에 마중나온 리만길이며 농장관리일군들의 손을 친절히 잡아주었다. 그 자리에는 리만길의 위협절반, 애원절반에 마지못해 끌려온 차성준이도 있었다.

《듣던대로 경치가 좋구만, 음! 농장도 돌아볼겸 저기 시원한 곳으로 나가지 뭐.》

보매 기분이 몹시 좋은듯싶었다. 관리일군들을 다 데리고 옥계천가로 나온 그는 허리에 두손을 찌르고 조잘거리며 기슭을 감도는 실개천의 흐름을 한동안 응시했다.

《이 내천의 이름은 뭐요?》

《옥계천입니다.》

《음, 그러니 구슬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 해서 옥계천이겠구만.》

차성준이 마을로인들에게서 들은 옥계천과 옥촌의 래력을 설명하였다. 강건너 산밑의 마을을 옛날엔 《옥촌》이라고 불렀다. 그 연원은 《옥》가 성을 가진 량반벼슬아치가 정배를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그 자손들이 늘어나는통에 붙은 이름이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량반이 한때 당상관을 지낸 모양인데 왕을 밀어낼 모략을 꾸미는데 한몫 끼웠다가 들통이 나 이곳에 정배를 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옴굴이나 되는것처럼 꺼리면서 가지도 않고 곁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손들이 늘어나자 강건너 저쪽을 《옥가촌》 혹은 《옥촌》으로 부르게 되였고 강이름도 《옥가천》으로 되였다. 그 《옥가천》이 아무래도 부를멋이 없으니까 점차 《옥계천》으로 되였다. 옥씨들이 모여살던 《옥가촌》도 《옥가동》이 되였다가 강이름을 따라서 《옥계동》이 되였다.

그 말을 다 들은 김도만은 볼편을 쓸며 속생각을 톺다가 정배살이한 옥씨가문에서 명물이 나온것은 없는가고 물었다. 차성준은 정배살이하던 옥씨가문에서 외눈깔강도가 나와 강도질을 일삼다가 일본으로 도주했다고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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