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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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허담을 단장으로 하는 외무성대표단은 웽그리아(당시)의 국가기념일행사에 참가하고 로므니아, 체스꼬슬로벤스꼬(당시)를 방문한 다음 《장미의 나라》라고 불리우는 벌가리아의 쏘피아에 도착하였다. 일행은 강반에 자리잡은 국제호텔에 려장을 풀었다.
창가에 서서 검은 연기를 뿜으며 기관선들이 오가는 강이며 차행렬이 붐비는 거리를 굽어보는 허담의 마음은 개운치 못했다. 그는 몇년전
외무성에 배치받아 처음 대표단성원으로 여기에 왔었다. 그때의 거리, 그때의 건물들은 그대로인데 오늘은 생소한곳처럼 느껴지며 몰켜드는 어둠마저
전에는 볼수 없었던 서양상품광고들이 무질서하게 붙어있고 색정적인 미국영화소개판들까지 버젓이 세워져있는 이곳이 과연 지미뜨로브의 고국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의 하드쓴강하구의 번화가나 런던의 템즈강변과 뭐가 다른가.
래일 쏘피아종합대학을 참관하게 되여있어 오늘은 려독을 푸느라 다른 일정을 잡지 않은 허담은 머리쉼을 위해 호텔을 나섰다. 문법구성이 로씨야어와 어슷비슷하여 이 나라 말도 자유롭게 번질수 있는 허담이였지만 비행장에서부터 맞이한 대사관참사가 안내하겠다며 따라서는것을 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참사가 어디로 가겠는가 묻는 말에 허담은 《무명전사묘쪽으로 가봅시다.》 하고 제먼저 그리로 발길을 옮겼다. 그가 무명전사묘 참관을 택한것은
추모탑앞에서는 불길이 솟구치고있었다.
(예나지금이나 변함없는건 이 불길이로구나. …)
허담은 고동색의 별에서 솟구치는 불길을 보며 숭엄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 도시도 제2차세계대전때 히틀러파쑈도당들과 피의 항전을 벌린 영웅도시였다.
허담은 꽃다발을 들고 추모비앞으로 다가갔다.
추모비에 꽃다발을 놓고 깊은 명상에 잠겨 솟구치는 불길을 바라보던 허담은 인기척에 돌아섰다.
키가 크고 길쑴한 얼굴에 선이 곧은 코날이 인상적인 백발로인이 꽃송이를 들고와서 놓고 경건히 거수경례를 붙이였다. 허담은 그의 앞가슴에 달려있는 쏘련적기훈장을 보고서 묻지 않고도 그가 2차세계대전의 로병이며 오늘이 어느 전우가 희생된 날이거나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던 날이라고 짐작하였다. 오래도록 팔을 내리우지 않는 그의 잔주름이 가득한 눈가에 그윽하게 고이는것이 있었다.
이때 줄무늬가 얼럭진 샤쯔며 허벅다리가 희멀겋게 드러나게 짧은 치마를 입은 청년들과 처녀들이 쟈즈음악이 울리는 록음기며 술병을 들고 비청걸음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마치 카페에 온듯 서로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며 궁둥이춤을 추기 시작했다. 력사의 숭엄한 추억을 모독하는 그 광경에 로인의 피기없는 얼굴이 험상궂게 이지러지며 관자노리가 푸들거렸다.
《썩 사라지지 못할가, 예가 어디라고!》
로인의 벼락치듯 하는 소리에도 남녀청년들은 무슨 객적은 지청구냐는듯 여전히 울안에서 뛰쳐나온 짐승처럼 헤덤비며 혀까부라진 소리로 쑹얼댔다.
《저 령감이 뭐라고 했어, 취하지 않았어?》
《취한게 잘못은 아니야, 우리도 취했거늘…》
와- 하고 비명비슷한 폭소가 터졌다.
은발을 날리며 가쁜숨을 톺던 로인이 그들에게 다가섰다.
《여긴 신성한 곳이다. 춤출 곳이 아니야!》
로인의 목소리엔 저력이 있었다.
《기분잡치지 말고 가자, 별 로망한 늙은이때문에…》
패거리가 샤쯔를 어깨에 걸치며 떠나갔다.
《피가 물이 되다니! 야쉔까, 쑤웨또브… 날 용서하게.》
로인은 후들거리는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그의 양복앞섶에 달린 훈장들이 절렁거렸다. 허담은 그 훈장마다에 슴배인 붉은 피를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어 로인을 동정어린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향토꾸리기》가 혁명의 계승자들인 우리 청년들을 어디로 끌고가는가고 근엄하게
말씀하시던
로인은 생각깊은 눈길로 자기를 바라보는 허담을 이윽히 마주보다가 다가섰다.
《혹시 조선에서 오지 않았습니까?》
참사가 제꺽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부상동지입니다.》
순간 잔조롬하게 좁혀졌던 로인의 두눈에 희열의 빛이 언듯 스쳐지났다. 지금껏 격심한 분노로 피기없이 창백하던 로인의 얼굴이 밝아지며 뜻밖에도 조선말을 번졌다.
《조선! 음… 부상선생, 실례지만 한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허담이 놀란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때 우리 나라에서 대사사업을 한 림춘추라는분을 아시는지요?》
로인이 림춘추에 대하여 묻자 허담은 일순 이 로인도 정계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고있지 않았는가 하고 추측했다.
《림춘추동지를 왜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림춘추동지를 어떻게 아십니까?》
《나도 한때 외교부문에서 일했댔습니다. 그때 친교가 맺어졌다고 할지…》
《그렇습니까, 선생님의 성함을 어떻게 부르는지 제가 조국에 돌아가면 림춘추동지에게 인사를 전하겠습니다.》
로인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허담을 일별했다.
《부상선생, 고맙습니다. 림선생을 만나면 〈네거리의 쑤다에브〉가 몹시 그리워하더라고 전해주십시오.》
《…》
《아, 〈네거리〉란 내 별명이구 쑤다에브는 내 이름입니다.》
《그렇습니까. 전 허담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의 인사는 꼭 전하겠습니다. 또 전할 말씀은 없습니까?》
쑤다에브의 서느러운 눈빛이 말 못할 고뇌를 한가득 안고 허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요긴히 전할 말은 없습니다만… 부상선생, 방금 목격했던 이 나라의 불민한 현실을 강건너 불로 생각지는 마시오. 유럽의 이 불덩이가 림선생의 발등에도 떨어질수 있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럼 안녕히…》
《편히 다녀가십시오, 쑤다에브선생.》
허담은 허청걸음으로 사라지는 쑤다에브를 바래우며 그가 남긴 말의 의미를 재빨리 되새겨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