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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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동강기슭에서는 구름속을 헤염치는 상현달빛이 잔물결을 어슴푸레하게 비치고있었다.
대동강유보도로 나온 유상룡은 유명혁에게 애원하듯 간청했다.
《부탁입니다.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아는것이 있으면 다 얘기해주십시오.》
《허허, 이거 참… 동무 아버지에 대해선 본적두 없구 이름도 모르오.》
유명혁이 칼로 베듯 했지만 유상룡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아니, 부국장동진 뭔가 숨기고있습니다. 전 엿장사 얘길 듣자 놀라는 부국장동지의 얼굴에서 그걸 느꼈습니다. 우리 아버지와 무슨 인연이 있다는것을 말입니다.》
유상룡은 결코 빗보지 않았다. 유명혁은 실지로 엿장사 얘기가 나왔을 때 자기의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만큼 그 엿장사는 유명혁에게 하마트면 지하공작원으로서 그의 운명을 끝장내버릴번했던자였기때문이다. 그의 정체를 모르고 그대로 접선하였더라면 후날 항일빨찌산의 용감한 소대장이였고 조국해방전쟁의 영웅이며 오늘은 수도의 안전국 부국장인 유명혁은 그때 이미 왜놈들에게 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것이다. 아무리 인생의 쓰고단것을 다 맛보고 온갖 고난과 시련을 헤친 사람일지라도 지나온 길을 돌아볼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지게 아슬아슬했던 위험에 대한 추억이 있는 법이다.
유명혁은 상룡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으며 다독였다.
《편성원동무, 내가 알고있는 왕우구근방의 엿장사는 딱 한명뿐이였는데 사실대로 말하면 그는 좋은 사람이 못되였소. 그가 동무의 아버지는 아니였을거요. 그러나… 모르는게 아는것보다 낫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것이 아닐가?》
유명혁은 태연한 모습을 보이느라 실주름이 엉킨 입가녁에 애써 웃음까지 피워올렸다. 차라리 유상룡에게 오늘의 담화가 쉽게 잊혀졌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유상룡은 이미 터진 동뚝이였다.
《설사 그렇다 해도 전 꼭 알고야 가겠습니다.》
《허, 알아선 뭘하겠소?》
《왜 몰라야 합니까?》
《…》
《부국장동지, 전 지금껏 아버지를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그 생각을 잊은적이 없습니다. 오늘에야 비로소 부국장동지한테서 실낱같은 끄트머리를 쥐였습니다. 이제 이 끄트머리마저 잃어버린다면 저는 영영 아버지에 대해 모르고 넘어갈것입니다. 부국장동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엿장사에 대해서 아는껏 다 이야기해주십시오.》
《알구야 가겠다?》
입을 꼭 다물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유상룡의 눈에는 돌려세울수 없는 결연한 빛이 어려있었다. 그 눈을 마주보며 유명혁은 자기가 이 자리에서 대답을 피할수도 둘러칠수도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그 누가 봐도 첫눈에 연연해보이는 이 젊은이의 안속이 이렇듯 강단있었단 말인가?!…
《좋소, 내가 알고있는것을 말해주지.》
그리고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그었다.
《항일유격근거지였던 왕우구주변을 돌아다니던 엿장사는 처단됐소, 혁명의 변절자로.》
유상룡은 숨이 꺽 막혀 돌처럼 굳어졌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해쓱해졌다가 파랗게 질려버렸다.
엿장사가 혁명의 변절자?
유상룡의 초점잃은 공허한 눈길을 피하며 유명혁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곽을 꺼내였다.
《그 시기
내가 임무를 받고 파견될 때 제일먼저 그와 련계를 가지게 되여있었소. 그런데 내가 그가 산다는 곳으로 갔을 땐…》
…대한을 이틀 앞에 둔 날이였다. 눈보라가 살을 에이듯 맵짜기도 했다. 엿장사가 사는 곳은 산밑의 자그마한 초가집이였다. 새초지붕도 못하고 봇나무껍질로 이영을 듬성듬성 얹은 오막살이였다. 그런데 엿장사는 없고 텅빈 집 퇴마루에는 엿상자를 얹고 다니던 지게만이 놓여있었다. 마당앞의 우물에는 드레박이 놓여있었는데 해리서만한 쥐가 인기척에 놀라 드레박안에서 뛰쳐나오더니 굴뚝쪽으로 꼬리를 사렸다. 보아하니 빈집에서 쥐들이 주인노릇을 하는듯싶었다. 엿장사를 찾아온 장사군이라는 말에 그옆의 동기와집 로인이 경계하는듯한 눈길로 유명혁을 치떠보며 헛기침했다.
검버섯이 듬성듬성한 얼굴엔 밭고랑같은 주름발들이 패였으나 숱진 눈섭밑의 우묵한 눈과 터갈라진 두툼한 입술은 세월의 풍파를 꿋꿋이 이겨온 로인의 우직스러운 과단성과 강인한 의지를 느끼게 하였다.
로인은 뚝한 어조로 엄한 판결을 내리듯 말했다.
《그 사람은 저승엘 갔수다.》
《저승이라니요?》
아연해서 굳어지는 유명혁을 보며 로인은 《남잡이가 제잡이란 말이 있지 않소.》하며 손때로 반질반질한 담배쌈지를 꺼냈다.
《허! 겉보기엔 꽤나 무던한 량반인가부다 했는데 속엔 독사가 또아릴 틀구있었으니 음, 퉤!》
로인은 결김에 침까지 내뱉으며 종이에 잎담배를 말아붙였다.
《로인님, 무슨 연고인지 좀 자상히 말씀해주십시오.》
《자상히구 뭐구 저승에 간 엿장사와 이제 장사거래하겠수?》
《실은 거래두 거래지만 장사길에 이 엿장사의 친척된다는 사람에게서 부탁을 받은게 있어서 그럽니다. 사연이야 알려줘야지요.》
로인은 유명혁이 지궂게 달라붙으며 팔을 잡아서야 몇번 헛기침을 깇더니 미간에 주름발을 세우면서 겨우 말문을 열었다.
《사나흘전이우다. 날이 어슬어슬해졌는데 옆집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나길래 웬 변고노 하구 뛰여나왔지요. 나뿐아니라 여러 집에서 나와 웅성거립데다. 그런데 웬 사람들이 우물집의 엿장사 김서방에게 오라를 지워서 끌고나오질 않겠소.
〈이 더러운 변절자야!〉하고 발길질을 합디다. 다음날 듣자니 뒤산에서 처단했다고 합데다. 글쎄 그놈때문에 숱한 사람들이 희생됐다질 않겠소.》
로인은 생각하기도 역겨운지 또 침을 탁 뱉더니 마당 한쪽을 가리켰다.
《저게 그놈이 절컥거리던 가위웨다. 저 집에 남은건 저 지게하구 가위뿐이니 그렇게 알구 가서 친척인지 뭔지 하는 사람한테 알려주우다.》
유명혁은 눈속에 묻힌 큰 가위를 집어들었다. 그것을 쥐고 보는 명혁의 눈앞에는 아직 한번도 보지 못한 그 반역자가 엿상자를 지고 가위를 절컥거리며 가는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