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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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창작하는 기록영화 《평양》의 음악편성을 하느라 한주일동안 철야전투를 해온 유상룡은 오늘에야 비로소 유명혁부국장을 만나려고 퇴근길의 방향을 돌렸다.

《여보, 당력사연구소에랑 외무성에 의뢰해서 아버지를 찾아보자요. 참, 시안전국 부국장동지가 그때 연길지방에서 지하투쟁을 했다니까 혹시 아버지얘길하면 알수 있지 않을가요?》

유명혁부국장을 만난 그날 밤 안해 순애가 한 말이였다. 하여 그는 기록영화 《평양》의 음악편성이 끝나면 시간을 내여 시안전국에 찾아가리라 달력의 날자를 꼽아가며 속다짐했었다.

자주빛황혼이 해살처럼 비치는 옥류교를 건느는 유상룡의 마음은 명절날의 산책처럼 흥분으로 부풀어올랐다. 어쩐지 오늘은 아버지에 대한 소식을 들을것만 같아 오가는 사람들도 세상에 태여나 아직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같아보였다.

시안전국 정문에서 접수하고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직일관의 련락을 받은 유명혁이 방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마당으로 헤덤벼치며 달음질쳐 나왔다. 온 얼굴이 그대로 웃음덩이였다.

아들 상룡이한테 마음껏 쏟아부을 날을 기다려 수십년세월 꿈결에서도 채우고 덧채우던 아버지의 애정은 그 애가 이제는 이 세상에 없다는 찢어지는 아픔으로 가슴속에 그대로 시퍼런 피멍이 되여 응어리져있었다. 그런데 자기가 지어준 아들의 이름을 그대로 가진 유상룡이 이렇듯 불쑥 찾아오니 그 응어리가 끓는 물이 들부어진 얼음처럼 순간에 녹아 이렇듯 왈칵 넘쳐났던것이다.

아무 색갈도 없는 흰빛을 프리즘에 굴절시키면 그 본질을 이루는 갖가지 색이 나타나는 법이다. 이 시각 항일무장투쟁참가자 유명혁의 온 얼굴에서 반가움의 일색으로만 차넘치는 그 웃음에 이 나라의 만고항쟁사라는 프리즘을 가져다대고 보면 그 색갈은 분명 피와 눈물이 진하게 어우러진 색갈이리라! 그래서인지 유상룡을 와락 부둥켜안는 순간 유명혁의 두눈에 그렁하게 고여오른 눈물이 저녁노을에 불그레하게 일렁거리는데 거기에서 넘쳐나 줄줄이 흘러내리는 그 눈물은 분명 가슴속에서 세월을 두고 졸이고졸이던 진한 피물일것이다. …

유상룡의 손을 잡아끌며 방으로 들어온 유명혁은 그를 의자에 눌러앉히고는 눈굽을 훔치며 너무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

《보고싶었소! 정말 보고싶었어. …

몇번이고 다시 찾아가고싶었댔는데 이렇게 왔구만! 우리 얘기나 하다가 같이 퇴근하자. 날 보고싶어서 왔겠지?》

너무도 반가와하니 유상룡도 눈물이 불쑥 솟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동안 눈에 뜨이게 센 머리카락이 눈언저리가 찌르르하게 안겨오고 이렇듯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하는 그 심정이 가슴 알알하게 맺혀와 선듯 말을 꺼낼수가 없었다. 자기 아버지 소식을 알아보려고 찾아오면서 그가 혁명에 아들까지도 헌헌히 내던진 아버지이고 그 어린 아들을 잃은 뼈아픈 슬픔을 안고있다는것을 미처 생각 못했다.

그는 한참이나 주저하다가 겨우 자기가 찾아온 목적을 꺼냈다.

《부국장동지가 항일무장투쟁시기 유격구초창기에 연길지방에서 지하공작사업을 하셨다고 하길래…》

《허, 새삼스레 그 말은 왜 하오? 참, 일전에 당력사연구소 과장동무한테 얘기했댔는데 찾아가지 않았소?》

《항일아동단원 김금순… 렬사의 혈육을 찾는다고 왔었습니다.》

《내가 동무를 만나고 온 후 왕우구출신이라는 생각에 금순이 동생이 아닐가 해서 김태호과장에게 말했댔소, 꼭 만나보라고…》

유상룡은 어줍게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떨구었다.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사실 오늘 온것은 그 비슷한 일때문인데…》

《그 비슷한 일이라는건 뭐요?》

《사실은… 부국장동지가 저의 아버지에 대해서 혹시 알고계시지 않을가 해서입니다.》

《아버지?》

《저는 두살때 부모를 잃었다고 하지만 실은 아직 생사를 알지 못하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들었는데 아버지가 엿장사였다고 합니다. 쇠로 만든 큰 가위를 절컥거리며 지게우에 엿상자를 올려놓고 다니면서 한편으로는 왜놈들을 반대하여 싸웠다고 합니다.》

《엿장사?!》

유명혁은 예리한 칼끝에 찔린듯 흠칠했다. 갑자기 가슴이 써늘해져 다우쳐물었다.

《아버지가 엿장사였다는 얘긴 누구한테서 들었소?》

유상룡은 다섯살때 자기를 키워준 중국녀인에게서 그 말을 들었다. 그때 병으로 몹시 앓던 중국인어머니는 한 교즈장사군 녀인으로부터 양육에 보탬하라며 아버지가 보내준 돈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유상룡의 고사리같은 손을 매만지며 아버지가 살아있으니 꼭 너를 찾으러 오니까 그때면 아버지와 함께 살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중국인녀인이 사망할 때까지도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 말을 듣는 유명혁의 눈앞에 쇠로 만든 넙적한 가위가 불현듯 떠올랐다. 이어 귀전을 치며 절컥절컥하는 쇠소리…

스르르 맥이 풀리며 어딘가 안절부절 못하는 유명혁의 모습에서 유상룡의 예민한 눈길은 인간심리에서 일고있는 그 어떤 불협화음을 감수했다.

《부국장동지, 왜 그러십니까? 혹시 우리 아버질 아시는게 아닙니까?》

유명혁은 창가로 돌아서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모르오.》

그리고는 책상에 다가가 앉으며 서랍을 열고 담배를 꺼내여 붙여물면서 어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도 역시 알릴듯말듯 불안한 잔광이 서려있음을 유상룡은 간파했다.

잠시 말이 없던 유명혁은 갑자기 사업일지를 펼쳐들었다. 그러다가 한참만에 머리를 들었다.

《이거 참 안됐구만. 그 일때문에 우정 찾아왔겠는데 저녁에 내가 회의를 하나 조직한걸 잊었구만. 어쩐다? 이제 이 방으로 우리 동무들이 모이겠는데…》

그러나 왕년의 이 유능한 지하공작원은 유상룡이 어릴적부터 눈치에 치여난 고아인데다가 인간감정을 가장 섬세하게 다루는 음악전문가라는것은 미처 생각 못하고 서툰 연기를 하고있었다. …

어둠이 짙어가는 시안전국마당을 나서는 유상룡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유명혁이 분명 뭔가 알고있으면서 말하기 괴로와한다는것을 가슴싸늘하게 직감하였다. 아버지가 엿장사였다는 말을 듣자부터 유명혁부국장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명백했다. 그 엿장사에게는 좋지 않은 아니, 나쁜 사연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야 눈물까지 흘리며 그리도 반갑게 맞아주고 퇴근길도 같이하자던 그분이 왜 회의요 뭐요 서툰 구실을 대며 자기를 돌려보내겠는가. 음악가의 예민한 감성은 유명혁부국장이 지금 자기 방에서 사람들을 모여놓고 회의를 하는것이 아니라 줄담배를 붙여물고 마음속의 괴로운 회의를 홀로 하고있다는것을 짐작하고있었다.

유상룡은 시안전국앞의 버드나무밑에 서서 유명혁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눅눅한 밤공기가 시안전국청사앞 외등이 비치는 주위를 축축히 떠돌고있었다. 낫가락같은 상현달이 머리우에 솟아서야 유명혁이 고개를 수굿한채 정문으로 나왔다. 무거운 걸음걸이는 그 역시 마음속에 괴로움의 응어리를 안고있다는것을 보여주고있었다.

유상룡은 유명혁의 앞으로 조용히 다가섰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던 유명혁은 유상룡을 보자 눈에 뜨이게 꿈쩍 놀랐다. 그러면서 난감한 기색으로 눈길을 돌리는 부국장의 모습에서 유상룡은 또 한번 운명적인 선률을 감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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