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1 장

귀양지에서 돌아온 조헌

2

(2)

  

썰매는 근처에 사는 백성들이 신씨를 위해서 가져온것이였다. 그만큼 조헌이네 식구들이 귀양지에 사는 반년이란 기간에 동네사람들과 친근히 지내왔던것이다. 조헌은 량반이라고 재세하지 않았다. 시간이 있으면 동네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였고 고구려, 고려시기 애국명장들의 이야기를 옛말처럼 들려주었다. 《온달전》, 《을지문덕전》, 《강감찬전》과 같은것들을 실지 자기가 겪은것처럼 이야기하여 마을사람들의 눈물과 웃음, 애국의 더운피를 끓여주었다. 평범한 백성들이 무예를 닦아 왜놈들을 쳐부시면서 용맹을 떨친 이야기, 고려의 어느한 처녀무사는 갑옷을 떨쳐입고 말을 타고 전장을 달리면서 장검을 휘둘러 적들의 머리를 락엽처럼 흩날려버렸다는 이야기도 실감있게 하여 사람들을 격동시키군 하였었다.

조헌은 침도 잘 놓고 뜸도 잘 떴다. 마을사람들이 그 덕을 많이 보았다. 어느 집 로인은 체기를 받아 석삼년을 고생하고있었는데 조헌이 며칠간 그 집을 찾아다니며 로인의 배에 침과 뜸을 놓아 씻은듯이 고쳐주었다. 또 어느 가난한 집 갓난애가 경풍이 일어서 눈이 뒤집혀지고 마지막숨을 넘기고있던것을 침 몇대로 돌려세워주었다. 했더니 그 집 로파는 파뿌리처럼 하얗게 센 머리가 땅에 닿게 엎드려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겠느냐고 꼬박꼬박 절을 하였다.

조헌은 의술보다 인술이 좋아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는 돈이나 물건같은것을 받지 않았다.

《내가 병자를 위해서 병을 봐주는것이지 돈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오이다. 아프면 아무때나 찾아와도 되지만 돈을 가지고 오려면 오지 마시우다.》

조헌은 송구해 어쩔줄 몰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렇게 허물없이 풀어주면서 껄껄 웃군 하였다.

그의 사람됨이 이러하였다. 그래서 어디에서나 인심을 얻었다. 이 아침도 동네사람들이 썰매를 선뜻 내놓기도 하고 먹을것을 싸들고나와 썰매에 실어주면서 너도나도 성의껏 바래주는것은 이때문이였다.

충청도 옥천에서 여기로 떠나올 때 고향사람들이 그랬던것처럼 길주 령동의 백성들도 《나리님이 가시면 마을이 텅빈것처럼 외롭고 쓸쓸해지겠으니 섭섭하기 그지없소이다.》라고 하였다.

멀리 지평선우에 해가 솟아올랐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아침노을이 대지를 붉게 물들이고 하늘과 땅에 찬란히 비껴오겠지만 오늘은 눈보라가 다시 터져서 불그스레 떠오르는 둥근달과 같이 보였다.

《어서 떠나시오이다. 우리는 나리님네와 한평생을 함께 살고싶지만 나리님이 이런 궁벽한 시골에 묻혀있어야 되오리까, 이렇게 추운 날에 천리길을 가셔야 할 나리님과 마님이 걱정되오이다. 부디 몸성히 가시기를 바라나이다.》

한동안 떠나는 사람들과 바래주는 사람들이 서로 절을 주고받고 정을 나누었다.

조헌의 가족은 마을사람들이 멀리 까만 점으로 보일 때까지 손저어주면서 눈보라이는 산굽이를 돌아갔다. 이제는 그들이 보이지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함께 가는듯 하였다.

조헌과 안세희는 말을 타고 열댓보 앞서가고 그뒤로 신씨가 누워있는 썰매가 달리였다. 해동이는 마부자리에 앉고 완기와 삼녀는 어머니의 머리맡과 발치에 앉아갔다.

삼녀는 마님의 머리를 자기의 무릎우에 베우고 찬바람이 머리와 몸에 스며들지 않게 이불깃을 꼭꼭 눌러주고 자기 몸으로 찬바람을 막아주며 갔다.

《마님, 춥지 않소이까?》

삼녀는 념려가 가득 실린 눈으로 신씨를 내려다보며 속살거렸다.

《아니, 춥지 않구나. 네가 넣어준 불돌도 식지 않고 너의 무릎이 따스하고 포근해서 좋구나. 그런데 네 무릎은 저려오지 않으냐?》

신씨는 빙그레 웃으며 삼녀를 걱정하였다.

《아니오이다. 마님이 좋으시다니 쇤네도 좋사오이다. 호호…》

《네가 이번에 고생이 많았다. 네가 없었다면 온 집안식구들의 아침저녁도 그래, 빨래두 그래, 누가 하겠느냐. 내게 약은 누가 정성껏 달여주구… 귀양살이고초는 네가 다 맡아 겪었구나.》

신씨의 눈에 눈물이 그득히 고여올랐다.

《아이참, 마님두… 호호…》

삼녀는 명랑히 웃으면서 신씨의 이불깃을 더 꼭 여미여주었다.

해동이는 기분이 흥떠서 코노래를 흥얼흥얼 부르다가는 《이랴, 어서가자.》하고 가볍게 말엉덩이를 채찍질하였다.

신씨는 해동의 코노래가 마음에 드는지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하였다.

《해동아, 너 삼녀가 어떻니? 좋지?》

《삼녀만한 처녀는 이 세상에 없소이다. 인물도 곱구 마음도 곱구, 백가지면 백가지가 다 곱소이다.》

해동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기의 진심을 터놓았다.

《호호, 그럼 됐다. 옥천에 돌아가면 너희들의 잔치를 크게 차려주겠다.》

《어마-》

《에쿠-》

순간 해동이와 삼녀가 뜻밖에 놀라며 서로 마주보면서 하하 호호 웃었다.

《잘은 좋아들 하는구나. 해동이도 스무살이고 삼녀도 스무살 맞동갑이니 얼마나 알맞춤하냐. 잔치를 한 다음에는 집을 한채 마련해보자꾸나. 너희들이 사람으로 태여나서 한뉘 남의 집 종살이를 하겠느냐.》

신씨가 이렇게 말하자 삼녀의 얼굴은 금시 홍시처럼 빨갛게 물들여졌다.

《마님, 우리가 언제 종살이노릇을 해보았소이까. 나리님이랑 마님이랑 우리를 아들딸로 여겨주셨소이다.》

《삼녀말이 옳소이다. 우린 어릴 때부터 아버님, 어머님으로 알고 자랐소이다. 말은 바른대로. 하하하.》

해동이가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말하면서 웃으니 신씨도 기쁘게 웃었다.

《나도 너희들을 종으로 여긴적 없었다. 그건 그렇구 너희들 당사자들은 어떠냐. 응?》

완기는 이때라 벙글벙글 웃으며 해동이와 삼녀가 해야 할 대답을 대신해주었다.

어머님, 해동이에게는 다른 처녀가 있사오이다. 우리 옥천 이웃마을 오얏나무집 효숙이라구 올해 열여덟살인데 삼녀처럼 인물도 곱구 마음도 고운 처녀랍니다.》

《으응, 그래?! 효숙이라면 나도 안다. 아버지가 관가의 말구종노릇을 하다가 말을 잃어버린탓에 형장을 맞구 다 죽게 되였을 때 황부자의 집에 종살이를 들어가기로 하구 선돈을 받아서 아버지를 구해냈다는 그 처녀…

효숙이라는 그 이름과 같이 참말 효성이 지극한 처녀지. 효성이 지극하면 다른것은 안보고도 다 안다. 착한 마음씨라든가 례의범절이라든가 행동거지라든가.》

신씨는 하늘에 글이라도 적혀있는듯 찬바람이 부는 허공을 바라보며 띠염띠염 힘들게 말을 이어나갔다.

《효성이 지극해야 나라를 위해서도 제몸을 바치는 마음이 싹튼단다. 해동이가 그런 처녀를 골라잡았으니 눈이 바루 배겼고나, 얘 삼녀야, 해동이가 그 처녀한테 장가들도록 우리 힘껏 도와주자. 내 너에게 해동이보다 더 좋은 신랑감을 골라 시집을 보내주겠다.》

신씨는 가끔가끔 집을 나간 며느리대신 삼녀를 새 며느리로 삼고싶은 생각이 저절로 나군하였다. 착한 마음씨와 인물맵시, 바느질솜씨, 무명낳이, 부엌동자질솜씨, 례의범절이 바르고 생기발랄한 성격… 어느것이나 신씨의 마음에 흠썩 들었다.

그러나 어찌 가정을 무어주겠는가. 삼녀를 친딸처럼 어렸을 때부터 애지중지 여겨왔건만 신분상으로야 천한 어부의 딸이 아닌가 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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