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1 장
귀양지에서 돌아온 조헌
2
(1)
이날 저녁부터 눈바람도 잦아들고 날씨가 풀리더니 다음날에는 좀 더 푸근해졌다. 까무라쳤던 신씨도 병세가 어지간히 풀어져서 온 집안에 기쁨이 피여났다. 신씨가 길을 떠날만하게 몸이 허락되면 래일이든 모레이든 아무때나 짐을 싸자고 하였다.
이제 고향에 돌아가면 집을 지키고있을 나이많은 할멈내외가 얼마나 반갑게 달려나오랴. 어서 옥천으로 돌아가자. 완기도 해동이도 삼녀도 이 하나의 생각으로 가슴이 뛰였다.
신씨는 밥을 몇숟가락씩 더 뜨고 괴롭고 무겁던 마음이 가벼워져서 탕약그릇을 달게 기울이며 빙그레 웃었다.
선전관 안세희는 조헌이 고향으로 떠나는것을 보고야 간다며 고을 객사에 묵으면서 하루에 한번씩 찾아와 그동안의 회포를 나누고 이런저런 한담을 나누었는데 대개 조헌이 묻고 안세희가 대답하였다. 누구는 어느 벼슬에 올라앉고 누구는 벼슬이 껑충 뛰여올라 판서가 되고 또 누구는 어느 도의 감사로 내려갔다는 등 조헌을 놀래우는 이야기가 많았다.
《지금도 김공량에게 잘 보이려고 몸달아하는 조정신하들이 없지 않네그려.》
조헌이 시름겹게 긴숨을 내쉬며 하는 말이였다.
《없어지는게 아니라 더 많아지니 이게 꼴불견이 아닌가. 뢰물바리들이 김공량의 집으로 북바디 드나들듯 하는 꼴이 헛 참.》
안세희는 허구프게 웃으며 조헌을 이윽히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조정에 대바른 사람이 없네. 대바른 소리를 했다가 귀양살이를 한 중봉이 자네처럼 될가봐 모두 쉬쉬하는 판일세. 나도 그들과 한모양이니 이를 어쩌면 좋은가. 일인즉 공량이를 들어내고 그 패거리들을 쓸어버려야 하는것인데… 그래야 조정이 엄정해지고 나라의 기강이 대쪽같이 바로서지 않겠나.》
《아직도 리산해가 하늘소를 타고 김공량을 찾아다니나?》
《누가 보지 않는 어스름 달밤에 자주 찾아다니고 김공량도 리산해의 집을 찾아가군 한다네.》
김공량이란 임금(선조)의 두번째 왕비라고도 할수 있는 김빈의 오라비다. 김빈은 예쁜 미모로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정이 찰찰 넘치는 살틀한 애교로 임금의 눈과 귀를 멀게 하였다.
임금은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안들어주는것이 없었다.
김공량이 자기 누이동생 김빈에게 아무개가 쓸만하니 어느 벼슬자리에 앉히고 아무개는 지금 맡고있는 직분을 감당키 어려우니 어찌어찌 해달라고 하면 즉시 그대로 되였다. 김공량이 대궐주변에 널려져있는 백성들의 땅을 왕궁의 소유지라고 하면서 강제로 빼앗아 사취해도 누구 하나 송사할수 없었다.
조헌은 김공량이 김빈을 등대고 관리들의 벼슬자리를 롱락할뿐만아니라 온갖 불법비법으로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혀 나라를 병들게 하는 행위를 지난번에 올린 상소문에서 강경히 규탄하였었다. 물론 이 규탄은 상소문의 두번째 조항이였다.
첫째 조항은 왜놈들에 대한것이였다. 우리 나라에 때없이 뻔질나게 오는 왜국사신들은 기세등등하여 자기네 나라에서는 조선에 사신을 자주 보내는데 너희 나라에서는 어찌 사신을 보내지 않는가, 어찌하여 조선의 국왕이 직접 새로 등극한 일본왕을 찾아뵙지 않는가 하고 강박하다싶이 놀아댔다.
이에 격분한 조헌은 왜놈사신들의 목을 베고 왜오랑캐와는 선린관계를 끊을뿐만아니라 왜적을 방비할데 대하여 강하게 제기하였었다.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 섬오랑캐놈들에게 굽어들면서 왜놈사신들이 지나가는 고을마다 마중나가 음식대접을 해가며 귀빈접대를 하겠는가, 우리 백성들은 굶주리고있는데 왜놈들의 배만 채워주다가는 앞으로 우리 나라를 통채로 왜놈의 먹이감으로 내놓게 될것이다, 령의정 로수신과 좌우정승들, 6조판서들, 권력을 틀어쥐고있는 문무백관들은 이것을 모를리 없는데 임금께 바른말로 간하지 않고 자기 리욕만을 취하고있으니 이는 우리 나라를 먹어보려는 왜놈들을 도와주는 리적행위이며 역적무리들이다, 이런 간신들을 벼슬자리에서 내쫓아야 한다라고 하였었다.
조헌은 기울어져가는 나라일이 걱정되여 이와 같은 상소를 병술(1586)년, 정해(1587)년, 무자(1588)년에 거듭 임금께 올렸건만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조헌을 간사한 도깨비라고 그의 상소문을 불태워버렸다. 나중엔 귀양까지 보냈었다.
조헌이 귀양길을 오간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였다. 갑술(1574)년 통진현감시절에도 백성들을 위하다가 귀양갔었다. 그가 온갖 사기와 협잡, 롱간질로 백성들의 진혈을 짜내는 간악한 아전들을 형벌로 무섭게 다스렸으며 량반이라도 백성들을 개, 돼지처럼 여기면서 굶어죽고 맞아죽게 만드는 량반이라면 가만두지 않은데 있었다.
못된 량반들과 간악한 아전들은 앙심을 먹고 조헌의 《비법, 불법행위》들을 꾸며내여 모함하였다.
조헌은 그때 의분으로 가슴을 불태우면서 시 한수를 읊었다.
보은현감되여 주린 백성 먹이자니
사방에서 시비질이 발길처럼 분분해라
소나무 갉아먹는 송충과도 같은
나라의 기생충들 언제 가면 없앨고
그는 이렇게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서는 파직도 귀양도 그리고 그 무엇도 두렴없이 곧바로 나아가는 지조를 지니였다.
《근래에는 어떤가? 왜나라의 사신들이 오는가?》
조헌이 저으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그의 가슴에서는 불길이 타오르고있었다.
《지난 7월에도 왔댔지. 전하께서 왜의 사신을 접견까지 하셨네.》
안세희는 격분이 치솟는듯 저도 모르게 말소리가 커졌다.
《왜놈들이 무슨 소리를 하였소?》
《자기 나라 왜왕이 무엇무엇을 좋아하니 그런것을 례물로 받아서 많이 가져가겠다고, 또 조선임금이 왜왕에게 문안편지를 써야 돌아가겠다고 했다네. 망할놈들같으니!》
《무엇이라구? 감히 임금님께? 이거야말로 우리 나라를 제 마음대로 주물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래 자네들은 가만있었단 말인가, 응?》
《중봉, 자네 어지를 받았지? 언행을 조심하고 극히 삼가할지어다라는…》
조헌은 더이상 할 말이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나라일을 걱정하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사흘만에 드디여 조헌이 귀양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이 왔다. 신씨의 병세는 추위속에 멀고먼 천리길을 갈수 있는 형편이 못되지만 가다가 죽어도 기어이 가야겠다고 하였다.
조헌은 썰매우에 조짚을 두툼하게 펴고 그우에 이불을 깔고 안해를 눕히였다. 삼녀는 불돌을 달구어서 신씨의 이불밑에 여기저기 여러개를 넣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