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회)

제 1 장

8

 

김태호가 조선기록영화촬영소 당위원회에 전화하여 음악편성원 유상룡의 집주소를 안 후 그를 만나려고 중구역 오탄동 주택의 마당가로 들어선것은 진홍빛노을이 서켠하늘을 물들인 황혼무렵이였다. 그는 오늘 항일무장투쟁시기 연길지방에서 활동한 평양시안전국 유명혁부국장을 찾아갔다가 뜻밖의 희소식을 들었다. 금순이의 일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고 하던 유명혁이 왕우구출신의 고아가 기록영화촬영소에 있다고 하면서 그를 만나보라고 하였다.

유명혁은 자기가 기록영화촬영소에 가서 유상룡을 직접 만났던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 편성원동무가 두살때 부모를 잃은데다 진짜 이름도 모른다니 기대가 가누만요. 만약 그 동무가 금순이 동생이라면 이거야말로 바다에서 바늘을 건진 격입니다.》

푸른 잎새가 소슬바람에 춤추듯 설레이는 아빠트마당앞 은행나무주위를 돌며 김태호는 자기딴의 희망을 품고 추리에 골몰했다.

두살때 고아가 되였으니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형제에 대해서도 알수 없을수 있다. 하지만 왕우구출신이 틀림없다니 유상룡의 지나온 생활의 매듭들을 한고리, 한고리 풀어가느라면 좋은 결과를 얻을수 있다. 그 매듭을 푸는 열쇠는 그를 키워준 중국인녀인과의 생활에서 찾을수 있을것이다. 김태호가 흥분된 마음으로 초조히 손목시계를 보는데 당위원회에서 련락받은 유상룡도 바삐 왔는지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치며 나타났다.

첫눈에도 량순하게 생긴 30대의 유상룡은 사슴처럼 어진 눈을 슴벅이며 어줍게 인사했다. 혈기왕성한 대장부라기보다는 어딘가 녀성미가 더 다분한 사나이였다.

김태호는 유상룡과 인사를 나눈 후 연록빛으로 물든 풍치수려한 대동강반으로 걸음을 옮겼다.

《편성원동무가 왕우구출신이라기에 이렇게 찾아왔소. 혹시 어렸을 때 동무를 키워준 중국인녀인에게서 누나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은게 없소?》

유상룡은 유보도의 기슭에 피여난 붉은 보라색, 흰색, 분홍색의 코스모스잎새들을 어루쓸며 입가녁에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저를 키워준 중국인 어머니는 제가 살던 곳이 왕우구라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누이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지주집에 끌려간게 다섯살때라지요?》

《예, 중국인 어머니가 병으로 사망한 후였습니다.》

《혹시 그 중국녀인한테서 어머니가 왕우구촌장이였다는 얘기는 들은게 없소?》

김태호가 마른 입술을 감빨며 다우쳐묻는 소리에 유상룡은 또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김태호는 높뛰던 심장이 금시 뚝 멎는듯 숨쉬기조차 베찼다. 유상룡은 그의 얼굴에 짙어가는 그늘이 마치 제 불찰때문인듯 얄팍한 입술을 감빨며 난처해하다가 물었다.

《그런데 누구를 찾습니까? 그 누나라는 녀자를 찾습니까, 아니면 그 어머니를

김태호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누나가 있었던 남동생을 찾소. 그 누나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항일아동단원 김금순이요.》

《아동단원 금순이의 남동생 말입니까? 남동생이 있었습니까?》

《그렇소. 수령님께서는 30년이 지난 오늘도 아동단원 금순이의 혈육을 찾고계시오.》

수령님께서?!

《음. 그런데 그 남동생은 왕우구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고 하오.》

(그러니 이분은 나를 그 남동생으로?)

유상룡은 조용히 고개를 젓고나서 생각을 더듬다가 말했다.

《저는 아닙니다. 저에게 누나가 있었다면 다섯살때까지 저를 길러준 중국인 어머니가 말해주지 않았을수 없지 않습니까. 다섯살이면 말을 알아들을 때인데.》

유상룡의 말에 김태호는 지금껏 품었던 기대가 장마비에 물먹은 담벽처럼 허물어지며 맥이 탁 풀렸다.

유상룡은 저으기 미안해하며 손을 비볐다.

《이거 정말 안됐습니다.》

《안되다니? 오히려 내가 미안하오.》

유상룡은 무엇인가 생각을 더듬다가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건 없겠습니까? 중국에서 살 때 같이 방랑생활을 하던 내또래의 동무들이 몇명 있는데 지금도 그들이 자주 편지도 보내오고 련계를 끊지 않고있습니다. 그들이 혹시 알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고아들이란 늘 정에 주려 살다나니 얼굴과 이름은 몰라도 무엇으론가 서로 통하는게 있단 말입니다. 말하자면 고아세계의 륜리라 하겠는지

자기를 위로하는 그 말에 딱히 그래달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저 례의적으로 머리를 끄덕여주고 김태호는 그를 집으로 들여보냈다.

실버들이 강바람에 흐느적이는 유보도를 떠나 아빠트쪽으로 걸어가는 유상룡의 뒤모습을 보는 김태호의 심중에서는 그토록 바랐던 기대가 허물어지는듯한 아쉬움과 함께 동정심이 저도 모르게 세차게 고패쳤다.

두살때 부모를 잃은 고아, 지금의 이름 역시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아닌 유상룡, 더우기 친척도 아닌 중국인녀성이 키워준 왕우구태생이라니 쉽게 도리질할 대상은 아니다.

당시 유격구였던 왕우구에서 살았다는것까지 알고있을 정도로 유상룡의 래력을 알고있는 중국인 녀인이 혹시 웅심깊은 마음으로 숨겨둔 말이 있는지 어이 알랴. 왜놈들이 벌떼처럼 살판치는 땅에서 만약 철부지의 입을 통해 어머니가 유격구의 촌장이였다는것이 알려지는것이 두려워 촌장이였다는 말만은 마음속에 깊숙이 묻어두고 눈을 감았을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김태호는 유상룡과의 두번째 상봉이 다시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유보도를 떠나면서도 마음은 개운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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