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회)
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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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안전국(당시) 부국장 유명혁이 탄 승용차는 옥류교를 지나고있었다. 늘씬한 키에 우뚝 솟은 코마루가 유표한 대좌 유명혁은 지금 30여년동안 생사여부를 알지 못하고있던 아들을 만날수도 있다는 기대를 안고 흥분되여 차를 달리고있는중이였다.
평양시의 어느 기관에서 발생한 탐오사건을 해명하기 위하여 그 연줄을 쫓아 황해남도에 내려가있던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던것이다.
《부국장동지, 조선기록영화촬영소에 부국장동지가 중국에서 잃은 아들과 이름도 경력도 꼭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만경대혁명학원을 마치고 음악대학까지 나와 지금 거기서 일하고있다는겁니다.》
사회안전부(당시)에서 주민등록사업을 맡아보는 일군으로부터 들은 소리였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왕우구태생에 이름도 자기가 지어준 유상룡인데다 화룡현에서 머슴살일 했다니…
유명혁이 동북에서 지하조직에 망라되여 활동하던 당시 그의 집은 왕우구에서 십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랭병으로 고생하던 안해가 어린 상룡이를 남겨놓고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연길시내에 나가 지하공작을 하던 명혁은 제손으로 안해의 무덤에 흙 한줌 얹어주지 못하였다.
마을사람들이 장례를 치러준 한달후에야 집으로 돌아온 명혁은 눈앞이 캄캄하여 여섯살난 아들 상룡이를 품에 안고 퇴마루에 앉아 구름속을 헤염치는 하현달을 바라보며 넋잃은 사람처럼 한숨만 련발했다.
청청한 한낮에도 그림자를 남기지 말아야 하는 아슬아슬한 지하공작을 하면서 이 어린것을 어떻게 데리고 다닌단 말인가. 그렇다고 상룡이를 맡길 친척조차 없지 않는가.
이때 《어험…》하는 기침소리에 이어 개화장을 든 강마른 사나이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화룡현에 있는 지주 양가였다.
《내 임자네 집소식을 듣구 남의 일같지 않아 걸음했네. 누구나 한번은 가야 할 길이니 너무 상심말라구.》
유명혁은 고개를 외로 튼채 화석처럼 굳어져있었다.
양가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겁질린 눈길로 자기를 치떠보는 어린 유상룡을 야릇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 사람, 임자도 아직은 젊은 나이라 어차피 재취해야 할게구… 헌데 발목을 잡는건 이 어린것일테지?》
양가는 곰방대에 가치담배를 터쳐 슬슬 쓸어넣으며 짐짓 한숨까지 터쳤다.
《내 그래서 양자삼아 이 애를 데려다 돌봐줄테니 나한테 맡기는게 어떤가?》
양가는 강아지나 새끼돼지를 사듯 어린 상룡이를 이리저리 뜯어보고 얼굴살까지 꼬집어보며 입가녁에 미소를 피워올렸다.
(키워서 머슴으로 부리겠다는거지.)
유명혁은 양가의 검은 속심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상룡이를 돌봐줄 친척도 없기에 호미난방으로 속을 태우며 망설이다가 지하공작을 위하여 당분간만이라도 응하기로 강심먹었다.
(머슴으로 부리기 위해서라도 밥이야 먹여주겠지.)
유명혁은 상룡이를 양가에게 맡기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막상 상룡이를 품에서 떼여놓고 양가네 집마당을 나서자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는 속으로 피눈물을 떨구며 쇠덩이를 매단듯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겨우 옮겨 대문가로 향했다.
《찌꿍-》
모진 소리였다. 등뒤의 마당안에서 별안간 《아버지!-》하는 여물지 못한 웨침이 담장을 넘어 울려왔다. 그리고 덜거덕거리며 빗장을 채우는 소리에 이어 대문을 허비는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터졌다.
《아버지, 나 같이 갈래. 아버지야, 나랑 같이 가!》
어린 아들은 아버지를 부르고 또 불렀다. 그 애절한 울음소리는 비수처럼 명혁의 가슴을 갈가리 찢었다. 그러나 돌아설수 없는 유명혁이였다.
양자로 돌봐주겠다던 양가는 여섯살난 상룡이를 돼지몰이 꼴머슴으로 악착하게 부렸다.
지하공작으로 드바삐 뛰여다니던 그가 3년후 다시 그 집에 갔을 땐 지주의 동생이 살고있었다. 동생놈은 형이 상룡이를 데리고 어디론가 갔는데 그 행처는 자기도 모른다고 시치미를 뗐다. 동네사람들도 지주의 행처를 모르고있었다.
유명혁은 아들의 생사여부를 알지 못한채 유격대에 들어갔다.
해방후에도 아들을 찾느라 애간장을 태웠지만 허사였다.
조선기록영화촬영소로 찾아가는 차안에서 유명혁은 마음의 안정을 위해 진정제를 꺼내들었다. 그러다 시안전국을 나설 때 방에서 진정제 두알을 먹었다는 생각에 그만 허거픈 웃음을 지으며 약봉투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조선기록영화촬영소 정문에 이른 유명혁은 사전에 당위원회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료해할가 하다가 괜히 소문을 내고 만났다가 아니면 어쩌랴싶어 본인을 조용히 만날 결심을 했다. 진황색황혼이 창가에 비낀 정문에서는 마침 퇴근시간이여서 이제 편성원동무가 나오니 기다리라고 하였다. 바재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정문옆의 영예게시판앞으로 걸어온 유명혁의 시야에 《음악편성원 유상룡동무》란 이름석자가 확 안겨들었다. 목에 꽃목걸이를 걸고 어딘가 수집음이 서린 미소를 짓는 청년! 어렸을 때도 너무 어질고 순박하여 사내라기보다 계집애같았던 상룡이였다.
유명혁은 사진에서 어릴적의 아들모습을 찾아보느라 두눈이 그대로 현미경이 되여 훑어보았다.
(비슷해. 아니, 신통해. 어릴 때의 그 어진 눈빛이 여전한게…)
유상룡이가 아들이라고 생각하니 그의 모습이 금시 사진속에서 뛰쳐나오며 자기 품에 안기는것만 같았다.
여섯살때 지주집마당에서 헤여진 내 아들 상룡이가 이렇게 어엿한 장부가 됐단 말인가!
헌헌장부가 된 아들의 사진을 보던 유명혁에게 지금껏 자식을 위해 바친 사랑은 하나도 없다는 죄의식이 급기야 돌개바람처럼 온몸을 무섭게 휩쓸었다.
아버지인 자기는 어린 자식을 지주집으로 끌고갔는데 그 머슴이 오늘은 당의 품속에서 어엿한 음악전문가로 자랐으니 내 과연 《아들아, 내가 네 아버지다!》하고 소리쳐 끌어안을 자격이 있는가. 지금껏 상봉의 기쁨에 넘쳤던 유명혁의 얼굴에 괴로움의 검은구름이 몰켜들기 시작했다.
아버지구실은커녕 돌멩이처럼 버렸다는 원한의 상처만이 그 애에게 남았을수 있다. 아들이 지주집마당안에 자기를 떠밀어넣고 도망치듯 황황히 달아나던 아버지의 모습을 과연 잊을수 있었겠는가.
급습하는 죄의식으로 하여 사진을 보고 또 보며 며칠후에 다시 올가 하고 망설이는데 등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유명혁은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유상룡동뭅니까?》
《예, 그런데 무슨 일로?》
량순하게 생긴 젊은이가 큰 눈을 슴벅이며 친절하게 묻는데 유명혁의 입에서는 혈육의 잔정이 담긴 애틋한 말이 아니라 극히 실무적인 소리가 튀여나왔다.
《집은 어딥니까?》
《중구역 오탄동입니다.》
다행이였다. 유명혁의 집도 그 근방이였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연장할수 있는 공간이 조성되였던것이다.
《마침입니다. 나도 집이 그쪽이니 같이 차를 타고가면서 이야기합시다.》
사실 유명혁은 지기 집이 팔골이나 학당골이라 하여도 역시 같은 말을 했을것이였다.
우선
《자, 갑시다.》
그는 상룡의 손목을 잡았다. 수십년세월 한시도 잊지 않고 꿈속에서도 잡을듯 하다가 아들이 뒤걸음치기에 종시 잡아보지 못한 그 손목…
그런데 오늘은 꿈이 아닌 현실속에서 그 손목을 잡고보니 온몸은 전기에 감전된듯 찌르르 떨리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