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9 회)
제 5 장
사랑의 힘
11
(2)
정옥은 물기어린 눈으로 송영숙을 바라보았다.
《난, 난 너무도 몰랐어요. 기사장동지의 그 마음을 너무도 모르고… 날 욕많이 해주세요. 실컷 때려준대도 좋아요. …》
송영숙은 여느날과 다름없이 빙그레 웃음지었다.
《그만해요. 난 다 알아요. 그리구 정옥동무를 탓하지 않아요. 조금두 탓한적이 없어요.》
그는 정옥의 동그란 어깨를 살뜰히 쓰다듬어주었다.
《요즘도 정기사동문 여전하겠지요?》
송영숙의 다정한 물음에 정옥은 아이처럼 머리만 끄덕였다.
《어련하겠지만 남편을 잘 도우세요. 훌륭한 남편의 뒤에는 그보다 더 훌륭한 안해가 있는 법이예요.
그리구 우리 함께 남편을 잘 도와서 첨가제를 꼭 성공시키게 하자요.》
진정어린 그의 말에 정옥은 또다시 왈칵 울음을 터쳤다.
(이렇게도 깨끗하고 정직한 마음을 가진 기사장을 오해하다니…
내가 나쁜년이였어. 남편의 연구를 돕느라 그 곱던 얼굴이 축가고 탐스럽던 머리가 다 빠졌는데 난 오히려 그를 오해하고 노엽히기까지 했으니 …)
정옥은 자기의 잘못을 다 털어놓고 사죄하고싶었다. 그러나 목이 꽉 메여와 송영숙의 손을 꼭 잡기만 하였다.
더 말해 무엇하랴! 련민의 정 어린 따뜻한 그 손길이 천만마디 말을 다 대신하는데야…
그날 집으로 돌아온 정옥은 옷장속에서 까만색나이론천을 꺼내였다.
낮이나 밤이나 수건을 쓰고 불편해하는 기사장에게 모자를 만들어주리라 생각했던것이다. 원래 알뜰한데다가 눈썰미가 있어서 웬간한 아들애의 옷은 제손으로 만들어 입히군 하던 정옥이다. 그러나 모자를 만들어보기는 처음이였다. 그는 한동안 고심하였다.
어느덧 기사장의 머리모양을 그려보며 모자형태를 마름한 그는 재봉기앞에 다가앉았다.
이때 출입문소리가 들려왔다.
정옥은 남편이 들어오는가 하여 얼른 일어나서 전실로 나갔다. 남편이 아니라 방송화였다.
《부식물감이 좀 생겨서 가져왔어. 헌데 오늘이야 휴식날인데 좀 놀러 다니지 않구 뭘하나?》
그는 가볍게 나무람하였다.
《자! 이건 감자하구 풋고추인데 얼마 되지 않아.》
방송화는 들고온 구럭지를 내밀었다.
정옥은 그가 가져온 감자와 풋고추를 고맙게 받아들었다. 무엇이든 생기면 꼭꼭 잊지 않고 가져다주는 방송화여서 간혹 불쾌한 일이 있었다고 해도 쉽게 용서가 되군 하던 그였다.
정옥은 방안에 들어온 방송화앞에 사과그릇을 내놓았다. 향기롭고 먹음직스러운 사과를 본 방송화는 사양않고 한알을 집어들었다. 과일칼로 돌기돌기 사과껍질을 깎던 그는 문득 손을 멈추고 눈길을 들었다.
《누이! 들었어? 기사장이 병원에 입원했다는거 말이야.》
그의 물음에 정옥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잠시나마 잊고있던 기사장의 모습이 또다시 가슴아프게 되새겨졌다.
그러나 방송화는 입을 비죽거리며 또다시 험담바구니를 헤쳐놓았다.
《죄루 돌았지. 남의 일 잘되는걸 그렇게두 배아파하더니… 우리 승호 아버지한테구 일철이 아버지한테구 오죽 못되게 놀았나? 응?》
그는 잘코사니하는 얼굴로 다시 사과껍질을 깎았다.
다음순간 그는 흑- 하고 흐느끼는 소리에 눈길을 쳐들었다.
정옥이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앉아 어깨를 떨고있었다.
《갑자기 왜 그래, 응?》
시누이의 갑작스런 행동에 방송화는 작은 눈을 치떴다.
정옥은 인츰 손을 내리우고 방송화에게로 돌아앉았다.
《형님! 형님은 어쩌문 그리두 악하구 모질어요. 예? 형님은 그래 기사장이 왜서 병원에 입원했는지 정말 모르나요?》
《?!》
《모르면 내가 알려주지요.
기사장동진 바로 우리 일철이 아버지를 돕다가 그렇게 됐어요. 머리카락이 한오리 두오리 다 빠지도록 도왔단 말이예요. …
그래 오빠나 형님이 한번이나 우리 일철이 아버지를 도와준적 있나요? 오히려 찬물을 끼얹으면서 왼새끼만 꼬았지요?
그런데 죄루 돌았다구요? 그한테 무슨 죄가 있게요? 죄라면 기사장을 죽도록 모욕한 우리한테 있어요. 우리한테 있구말구요.
정말이지 형님이나 나는 기사장의 발뒤꿈치에두 못가는 버러지예요. 버러지구말구요. 그런데두 형님은 기사장을 혈뜯기만 했지요?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모아서 그냥그냥 헐뜯었지요? …》
정옥의 입에서는 울음섞인 말마디들이 총알처럼 튀여나왔다.
그 총알들은 높은 명중률로 방송화의 가슴에 사정없이 들이박혔다.
시누이한테서 난생처음 항변을 당해본 방송화는 당황하고 무안해서 쩔쩔매였다.
하지만 정옥은 꺽꺽 흐느끼며 그냥 내쏘았다.
《형님!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말아요. 나두 오빠네 집에 가지 않을테니까요. 절대루 안가요! 좋은 사람들이 많구많은데 뭣때문에 오빠네 집에 가겠나요? 안가요! 죽인대두 안갈테니 형님두 그런 못된 말을 하려거든 우리 집에 오지 말아요.》
이윽고 정옥은 자책과 설음에 겨워 또다시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어깨를 떨었다.
그 울음소리에 쫓기듯 방송화는 뒤걸음질로 나가버렸지만 서정옥은 그냥 흐느꼈다.
다음날 저녁 서정옥은 또다시 병원에 찾아갔다.
송영숙은 여느날과 다름없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정옥의 수고를 헤아리며 가볍게 책망했다.
《날이 저물어가는데 왜 또 왔어요? 집에도 할 일이 많겠는데…》
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당과류와 과일을 내놓았다.
정옥은 몹시 송구스러워했다.
그는 한동안 주춤거리다가 가방안에서 모자를 꺼내였다. 까만색나이론천에 까만 레스로 모양곱게 장식하여 만든 모자였다.
《이건 내가 만든건데… 수건대신 이걸 쓰면…》
그 모자를 받은 송영숙은 이리저리 돌려보며 활짝 웃었다.
《이게 정말 정옥동무가 만든거나요? 손재간이 보통 아니군요. 멋있어요. 정말 잘 만들었군요. 헌데 어떻게 이런 궁리를 다했을가? 하여튼 이걸 쓰면 수건은 벗어두 되겠군요.》
송영숙은 기뻐하며 수건매듭을 풀었다.
정옥은 일어나서 그에게 모자를 정히 씌워주었다.
송영숙은 얼른 거울을 가져다가 들여다보았다. 하더니 만족한듯 밝게 웃었다.
《좋군요. 이제는 공장에 나가도 될것같아요. 그렇지요?》
그는 모자를 쓴 머리를 매만지며 어떤가고 물었다.
정옥의 눈가에는 또다시 맑은것이 고여올랐다.
《언니!》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한마디 하였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기사장동지! 나한텐 언니가 없어요. 그러니 이제부터 기사장동지를 언니라고 부르겠어요. 그리구 친언니처럼 따르겠어요. 일없지요? …)
정옥의 마음속에서 울리는 그 말을 다 들은듯 송영숙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요, 정옥동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