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5 회)
제 5 장
사랑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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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옥은 들고있던 둥근채를 바닥에 툭- 떨구며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어깨를 떨기 시작하였다.
유상훈은 그들의 심정이 다 리해되는지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자기
《기사장동무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예?》
정의성은 한달음에 달려갈듯 물었다.
《기사장은 사흘전에 군인민병원에 입원했소.》
《병원에요?》
《저건 기사장의 실험일지요. 보급원동무가 기사장의 실험실을 정돈하다가 찾아냈다누만. 한번 보오. 나도 보았소. …》
박사는 뭔가 더 말할듯 하다가 그만두고 호동에서 나갔다.
정옥이도 관리공처녀와 함께 먹이준비를 위해 놀이장으로 나갔다.
조용한 휴계실로 자리를 옮긴 정의성은 베타인합성을 위한 기술공정표를 다시금 읽고 또 읽었다.
송영숙의 피와 땀으로 밝혀진 합성과정의 온도며 시간을 비롯한 과학적인 수자들모두가 불보다 더 뜨겁게 그의 가슴에 안겨졌다.
얼마후 그는 차수정이 실험실에서 찾아냈다는 실험일지를 보기 위해 보자기를 풀어헤쳤다. 색날고 보풀진 실험일지들을 한권두권 꺼내들고 읽어가던 그는 또다시 놀라서 굳어졌다.
심장은 또다시 박동소리를 높이였다.
송영숙의 실험일지들은 베타인합성을 위한 기술공정표에 비교할수 없는 더 크고 무서운 폭탄이였다.
정의성은 굉장한 폭음과 함께 사정없이 휘뿌려진듯 책상을 부둥켜안고 실험일지우에 머리를 숙인채 한동안 눈을 감고있었다.
이윽고 그는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이건 환각이다! 환각이다! …)
그러나 헛된 몸부림이였다.
송영숙을 부정할수 없듯이 실험일지며 거기에 씌여진 내용들모두가 조금도 부정할수 없는 진실이였다. 그 실험일지들은 송영숙이 자기보다 먼저 소금밭이끼에 의한 가금먹이첨가제를 연구해왔다는것을 직관적이며 과학적으로 증명해주었다. 항생물질을 비롯한 여러 성분들의 천연제는 송영숙이 연구초기에 찾아낸것이 아닌가.
정의성은 실험일지들을 보고서야 송영숙이 자기에게 그 모든것을 고스란히 넘겨주었다는것을 깨달았다. 다음순간 숨이 꺽 막히는듯 하였다.
(오늘은 또 먹성인자까지 찾아냈으니 공장첨가제는 결국 내것이 아니라 기사장의것이다. 난 절대 이걸 받을수 없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첨가제에서 손을 떼야 한다! …)
정의성은 자기의 패배를 뼈아프도록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저녁무렵 그는 송영숙의 실험일지며 기술공정표를 모두 걷어안고 시험호동을 나섰다. 유상훈박사를 만나려는것이였다.
반나절새에 그의 눈확은 움푹 꺼져들고 등허리마저 굽어든것같았다.
머리를 수굿하고 한동안 걸음을 옮기던 그는 누군가 자기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것을 느끼고 눈길을 들었다. 차수정이였다.
《어디 가는 길인가요?》
수정은 주의깊은 눈길로 조용히 물었다.
정의성은 유상훈박사를 찾아간다고 대답했다.
《영숙동무의 실험일지를 받았어요?》
수정은 이렇게 다시 물었다.
정의성은 머리를 끄덕이며 눈길을 떨구었다. 차수정의 앞에서 송영숙이와 관련된 문제를 말할 때마다 항상 따분하고 면구스러웠다.
그는 송영숙의 실험일지와 기술공정표를 내보이며 유상훈박사에게 터놓으려던 결심을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난 이걸 받을수 없소. 절대로! 그리구 이제부터는 첨가제연구에서 손을 떼겠소. 이걸 보니… 공장첨가제는 이미 내것이 아니였소.》
그의 말 한마디한마디에는 천근만근의 무게가 담겨져있었다.
《내것이 아니라구요?》
차수정은 전혀 뜻밖인듯 정의성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잠시후 그는 자기의 성격그대로 짭짤하게 내쏘았다.
《동문 아직두 네것과 내것을 놓구 타산하는가요? 예?》
수정은 숨가쁜 목소리로 따지듯이 물었다. 그는 결코 부드러운 녀자가 아니였다. 그의 눈가에서는 별찌같은것이 튀여났다.
《영숙인 병원으로 가면서도 이걸 동무에게 꼭 가져다주라구 나에게 당부하더군요. 어제도 날보구 우리 함께 첨가제연구를 힘껏 도와서 기어이 완성시키게 하자구 말했어요.
그래 영숙이가 무엇때문에 첨가제연구를 도왔겠나요? 예? …
그건 바로 사랑이였어요. 이 땅의 부강번영을 바라는 뜨거운 그 사랑이 자기의 모든것을 깡그리 다 바치게 했단 말이예요.
그런데 내것이 아니라구요? 내것이 아니기때문에 포기하겠다구요? …
동문 그 말이 영숙이와 그의 남편까지 모욕하는 말이라는걸 생각해봤어요?》
억울하고 분한듯 수정의 목소리는 떨리기까지 했다.
《언젠가 영숙이 남편은 조국의 발전속에 개인의 발전두 있다면서 서로 힘과 지혜를 합쳐서 공장첨가제를 기어이 완성해야 한다구 말했어요. 그런데 동문…》
《?!》
정의성은 놀라운 눈길로 차수정을 쳐다보았다. 눈앞에는 지난해 가을 렬차에서 만났던 백상익의 모습이 떠올랐다.
커다란 충격을 안고 서있는 그에게 차수정은 여전히 날이 선 어조로 내쏘았다.
《아마 영숙동무 남편이 지금 이 자리에서 동무의 말을 들었다면 침을 뱉았을거예요. 속속들이 타산적이구 리기적인 동무에게 말이예요.》
수정의 말에 정의성은 흠칫 몸을 떨었다.
정신적인 압박감으로 숨이 꺽꺽 막히는것같았다.
그러나 수정은 그냥그냥 가슴을 헤집으며 채찍질을 했다.
《난 사실 동무가 연구소를 떠나 우리 공장에 왔을 때부터 오늘까지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있었어요.
동무에게 영숙이가 결혼했다는 거짓말을 했기때문에 두사람이 결합되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해서 말이예요. 하지만 오늘 보니 동문 확실히 뼈속까지 타산적이구 리기적인 사람이였군요.》
수정은 수술칼처럼 예리하고 무자비한 말로 사정없이 상대방을 해부하고 적라라하게 파헤쳤다.
《동문 지금껏 사랑도 생활도 연구사업까지도 모두 자기의 명예와 발전을 기준으로 타산했지요? 그리구 또 거기에 모든걸 복종시켰지요? 그래 내 말이 틀리나요? 예? … 난 동무가 오늘까지 이럴줄은 몰랐어요. 정말 몰랐어요.》
이윽고 수정은 더 할 말이 없는지 찬바람을 일구며 홱- 돌아섰다.
멀어져가는 수정의 발자국소리, 발자국소리…
그 소리를 온몸으로 들으며 정의성은 눈을 꼭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