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서 장
승용차안의 시계는 9시 55분을 가리키고있었다.
액정현시판에 시간과 분만을 수자로 표시하고있는 시계이지만
그 어떤 사상도 편견도 없이 누구에게나 꼭같이 공평하게 차례지는 시간에 사상과 의지를 재워 정의로운 위업의 편에 세워놓기 위한 투쟁이였다.
그래서 례사롭게 흘려보내는 시간이 단 한초도 없으시였다.
하지만 지금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을 찾아가시는 이 걸음에 마음속의 초침소리를 세여가시는
머나먼 외국방문의 길에서 돌아오시는 길로 량강도안의 여러 부문 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하고계신지 며칠 되였다.
어제밤에만도 겹쌓인 로고를 걱정하며 수행일군들은 물론 도당위원회 책임일군도 단 하루만이라도 쉬셔야겠다고 간절히 청원드리였다.
2010년 5월 18일.
《아니요. 래일은…》 그러시다가 곁에 놓인 탁상시계를 보시며 빙긋 웃으시였다.
《아니, 벌써 오늘이구만. 0시 13분이니까. 오늘은 계획대로 혜산시내에서 일을 보겠소. 일정을 잘 맞물리면 대여섯개 단위는 돌아볼수 있을거요.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에 꼭 가봐야겠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그렇게 알고 다른 대상들의 일정을 맞물려주오.》
…달리는 승용차의 앞시창으로 관두봉의 푸른 산줄기가 서서히 확대되여 다가온다. 관두봉의 동쪽으로 어깨겯고 솟은 성유덕산이며 부채산에 목화솜뭉치같은 흰점들이 무덕무덕 박혀있다. 며칠전 재빛구름들이 낮추 드리우면서 꽃보라처럼 날린 함박눈이다. 백두산기슭에서는 흔히 볼수 있는 천지조화였다.
김정일동지께서 발전소건설장 전망대에 오르신것은 오전 9시 10분이였다.
박달나무도 쩡-쩡- 갈라터지는 혹한속에서 질통을 지고 얼어터진 입술을 깨물며 한치한치 기여서 언제로 오른 청년들, 폭설로 도로가 막혀
열흘나마 간난신고끝에 쌀과 부식물을 싣고 첫 자동차가 도착했을 때 적재함을 탕탕 두드리며 공사용 자재부터 실어와야지 무슨 일본새가 이런가고
눈물을 뿌리며 일군들을 지탄했다는 그 청년들, 연연한 살점을 물어뜯는 령하 30~40°의 혹한속에서 함마를 휘두르며 《비겁한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기를 지키리라》는 노래를 부른 그 청년들이
《그새 날 많이 욕했지? 이렇게 큰 공사를 맡겨주고 한번도 와보지 않는다고…》
공사를 책임지고있는 청년동맹 중앙위원회 일군의 얼굴로 불쑥 눈물이 좌르르 흘러내렸다. 시퍼렇게 언 자리가 이겨온 간고한 겨울의 흔적처럼 남아있는 그 얼굴에 봄시위물같이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이 왜 그렇게도 인상깊었던지.
《
그는 종시 어린애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마음속의 약속이라… 그래, 그래. 여기 와보고싶은 생각은 간절했는데 좀처럼 시간을 낼수 없어서 오늘에야 왔소. 마음속의 약속을 지키고싶은 내 심정인들 오죽했겠나.》
이어 시선을 돌리시니 저쪽 대형속보판에 씌여진 글발들중에서 《백두의 혈통》이라는 글발이 류달리 눈길을 끌었다.
백두의 혈통!
떨어질줄 모르는
《장군님, 이 건설장은 백두산혈통을 신념으로, 의리와 량심으로 지켜가는 우리 청년들의 혁명대학입니다. 이 혈통만을 간직하고
《그래. 우리 혁명의 혈통은 백두산혈통이야. 청년들이
불현듯
도당위원회 책임일군이 날씨도 좋고 경치도 좋은데 이 동무들과 사진을 찍어주시면 좋겠다고 청원드리였다.
《날씨도 좋고 경치도 좋아서 사진을 찍는다?》
잠시 동안을 두고 명상에 잠기시였던
《나는 오늘 발전소건설이 어느 정도 진척되였는가를 보러 온것이 아니요. 우리 청년들, 나의 아들딸들이 항일대전의 전구에서 어떤 영웅들로 자라났는가를 보고싶어서 왔소.
날씨가 좋고 경치가 좋아서가 아니라 당의 부름을 받들고 멀고 험한 백두의 혁명대학으로 달려와서 애국충정의 구슬땀을 흘리고있는 우리 혁명의 계승자들을 위해 사진을 찍자구.》
지금 달리는 승용차에서 조용히 눈을 감으신
(백두의 혈통, 백두산혈통이란 말이지…)
그래서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으로
눈길을 들어 바라보시니 앞시창으로 어느덧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이 우렷이 다가오고있었다.
순간 아득한 세월의 공간을 넘어
《전쟁도 많이 하고 오랜 투쟁력사를 가지고있는 나라들에도 이렇게 웅장한 탑은 없습니다.》
1972년 6월 4일
그때 깊은 감회속에 탑을 보고 또 보시던
《이 탑을 세울 때 마음고생이 많았지. 그러나 반드시 이렇게 일떠세워야 할 탑이였소. 조선혁명이 그걸 요구했거던.》
그렇다. 정녕 힘겨웠다. 어려웠다.
심신을 불태우며 이겨내야 했던 가혹한 진통, 간고하고 준엄했던 그 나날의 자욱자욱을 새겨안고있기에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은
잊을수 없는 그 나날의 만단사연들이
(그때 나는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이였다. 그러나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당중앙위원회 비서도 부부장도 아닌 내가 맡아나서야 했던가!
그것은 혁명의 요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