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5 회)

제 4 장

불타는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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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실험실앞에서야 그는 남편이 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있음을 알게 되였다. 분석결과에 대하여 보고하는중이라고 생각한 그는 남편의 목소리에서 일이 잘되고 못되였는가를 가늠하려고 문앞으로 바투 다가섰다.

《소장동지! 저도 나자신이 기사장동물 무례하구 불손하게 대한다는걸 모르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 집사람한테서도 그런 충고를 여러번 들었습니다. 하지만 난… 그렇게밖에 달리 행동할수 없는 사람입니다.》

《?!》

남편의 입에서 기사장과 함께 자기에 대한 말이 나오는 바람에 정옥은 우뚝 굳어졌다. 더더욱 놀라운것은 그 어떤 울분을 억제하는것과 같은 남편의 목소리였다.

(왜 그럴가?… 혹시 분석결과가 잘못되였을가?… 그런데 나와 기사장은 무엇때문에…)

정옥의 가슴은 후두두 떨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온몸으로 남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장동지도 기사장동무가 닭공장에서 소조생활을 했다는걸 알겠지요?… 그때 저도 그곳에서 연구를 하고있었습니다.

그 나날 전 남달리 총명하구 열정적인데다가 꿈도 많은 한 처녀대학생을 알게 되였구… 그 처녀가 바로 기사장입니다.》

남편의 목소리는 떨리기까지 하였다.

(아니, 아니. 내 마음이 떨려서 그렇게 들릴거야. 그래, 그래. …)

서정옥은 남편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문앞으로 더 다가섰다.

남편은 저으기 흥분된 목소리로 기사장 송영숙이와 헤여지게 된 사연에 대하여 대담하게 털어놓았다. 자기자신의 성공과 발전만을 생각했던 지나간 나날들에 대하여…

그의 말 한마디한마디에는 뼈저린 자책과 고뇌가 진하게 슴배여있었다.

어찌보면 그 어떤 반발심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구만.》

이윽고 유상훈박사가 침착한 어조로 남편의 말을 받았다.

《…젊은 시절에 헛짚은 그 한걸음때문에 평생 가슴을 치며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지. 한생을 후회없이 산다는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요. 하지만 갱신의 여유가 없을만큼 인생이 짧은건 아니지 않소? 그래서 〈뒤를 보며 울지 말구 앞을 보며 웃으라〉는 속담도 있는거구…》

잠시 방안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슴답답한 그 침묵을 소장이 먼저 깨뜨렸다.

《정기사 말을 듣고보니 어쩐지 기사장이 더 돋보이누만. 지난날의 모든걸 내색하지 않구 진심으로 첨가제연구를 돕고있으니 말이요. 그렇지 않소?》

《아닙니다!》

소장의 말에 남편은 단호히 반대의사를 표시하였다.

《그가 첨가제연구를 돕는건 결코 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건 공장을 위해서지요. 그리구 기사장의 의무이기때문입니다.》

순간 서정옥의 입에서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이 내불리였다.

(그래서였구나!… 그래서였구나!…)

그에게는 모든것이 순간에 리해되였다.

《그거야 인간생활이 아니나요?》

《인간생활인데 뭘…》하고 지금껏 즐겨하던 말도 그는 아예 잊어버린것같았다.

인간생활에 도통한 년장자처럼 너그럽고 아량있게 곧잘 말하던 그였지만 정작 자기가 복잡다단한 인간생활과 부딪치게 되니 당황해지기도 하고 이름못할 설음까지 느끼게 되였다.

잠시후에야 정옥은 남들의 눈에 띄울가 근심하며 조심히 문앞에서 물러섰다.

기술준비소를 나선 정옥은 쓸쓸해지는 마음으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였다.

전 공장지배인의 막내딸로 태여난 그는 지금껏 온 가정과 마을의 사랑을 받으며 고생이란 말을 모르고 자라났다.

그는 가금전문학교(당시)를 졸업한 다음부터 오리공장에서 일하였다.

부모형제들과 친척들이 모두 한마을, 한공장에서 일하기때문에 가금전문학교를 다닌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지방에서 생활해본적이 없는 그는 마음씨 곱고 성실하였지만 생각은 좀 단순하고 외곬이였다.

언젠가 그는 자기의 리력문건을 쓰다가 저 혼자 웃었다.

가금전문학교를 다닌것과 오리공장 로동자라는 단 두줄이 자기의 한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남들은 열줄도 넘던데 난 고작 두줄뿐이구나. …)

그러나 정옥에게는 부모형제들이 한생을 바쳐가는 오리공장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고 관리공보다 더 보람있는 일이 없었다.

정옥에게 있어서 남편은 하늘이였고 억센 기둥이였다.

결혼식날 자기의 몸단장을 해주던 방송화가 남편의 체격이 좀더 컸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에 정옥은 눈을 흘겼다.

《아이참! 저 사람은 표준이예요, 모든게 다…》

그에게는 남편보다 리상이 높고 재능있으며 박식하고 단정한 품성을 지닌 사람은 둘도 없었다.

남편은 성격도 취미도 습관도 품성도 모두 고상하였다. 사나이답게 대활하고 호호탕탕한 성격은 아니지만 리지적이고 사색적이며 남다른 탐구심과 열정을 지니고 규칙적이며 정돈된 생활을 이어가는 남편을 정옥은 끝없이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언젠가 수정에게서 남편의 별명이 《전자시계》였다는 말을 듣고 그는 호호 웃었다. 그리고 혼자서 불러보았다.

《전자시계!》

단정하고 절도있는 남편의 품성을 단마디로 표현한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처럼 훌륭한 남편의 마음속에 오직 자기 한사람의 녀성만이 존재한다는것으로 하여 그는 항상 기뻤고 즐거웠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기쁨과 즐거움은 여운도 없이 사라졌다.

남편에게 사랑을 약속하였던 녀성이 있다니…

그 녀성이 다름아닌 기사장이라는 사실앞에 그는 경악할만큼 놀랐다.

직위나 지성도는 물론이고 인물이나 성격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자기가 기사장보다 비할바없이 못하다는 생각으로 그의 마음은 더욱더 슬펐다.

(어쩌면… 어쩌면…)

그는 마가을의 찬바람도 느끼지 못한채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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