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4 회)
제 4 장
불타는 지향
8
(2)
어느새 아래방엔 밥상이 놓여있었다. 수저를 들고 밥상앞에 앉아있던 수정은 집안에 들어서는 리병우를 힐끔힐끔 가로보더니 제먼저 수저를 들었다.
리병우는 주눅이 든 얼굴로 겨우 밥상앞에 다가앉았다.
빨간 실고추와 동그란 파잎이 동동 뜨는 오이랭국을 보니 어쩐지 목이 꺽 메여왔다. 그러거나말거나 수정은 례사롭게 찬그릇을 밀어놓아주면서 부지런히 밥을 먹었다.
리병우는 오이랭국을 한술 떴다. 향기롭고 시원한 랭국이 식도를 거쳐 온몸에 퍼지면서 기운을 부쩍 돋구어주었다.
《내가 지금까지…》
그는 격전장에 나선것만치나 비장한 얼굴로 힘겹게 말꼭지를 떼였다.
《내가 당신을 잘 대해주지 못했소. 본래 못난 놈이니 리해해주오. 기사장의 당부도 그렇구… 어떻든 기사장 말대루 이제라도 다시 살림을 합치는것이 어떤지… 오늘이라도…》
끙끙 갑자르며 겨우겨우 말을 이어가던 그는 수정이 할끔 가로보는 바람에 자라목이 되고말았다.
《아이참! 기사장이 나와 무슨 상관이예요? 됐어요! 그런 말은 듣고싶지도 않으니 어서 식사나 하세요. 난 바빠서 빨리 나가야 해요.》
수정은 눈살을 찌프리며 말했다.
어깨가 오그러든 리병우는 하는수없이 밥술을 뜨기 시작하였다. 그는 입소리를 죽여가며 조심스럽게 수저를 놀리였다. 그러나 밥그릇을 절반쯤 내고는 밥상에서 물러앉았다.
《왜요? 왜 마저 들지 않구?》
수정이 밥사발과 리병우를 번갈아보며 마뜩지 않은 투로 물었다.
리병우는 그저 머리만 저었다. 그는 무슨 말이든 더 할가 하다가 이번에도 무자비하게 언권을 뺏기리라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내 혼자서는 안되겠어. 래일이라도 봄순이 큰에미와 다시 오든지…)
문득 기사장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머리를 저었다.
(바쁜 기사장한테 그런 수고까지 시키면 안되지. …)
그는 잘 먹었다는 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린 다음 움쭉 몸을 일으켰다.
리병우는 그때 차수정이 문가에 서서 마당을 나서는 자기의 뒤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고있는줄 모르고있었다.
흰 반소매샤쯔의 등뒤가 약간 들리운 그의 뒤모습을 지켜보던 수정은 얼른 뛰여나가 옷자락을 반듯이 당겨줄가 하다가 머리를 저었다.
(사람이 어쩌면 저리도 못났을가? …)
그는 리병우의 뒤모습을 흘겨보았다. 그의 모습이 대문밖으로 사라진 다음에야 수정은 점심상을 거두었다. 리병우가 절반쯤 남긴 밥그릇을 보는 순간 그의 마음은 아릿해졌다.
(식사를 다 하라고 왜 따뜻이 말하지 못했을가… 그냥 따벌처럼 쏘아주고 고양이처럼 허벼줄줄만 알구 인정스러운데라군 꼬물만큼도 없으니 누군들 나를 좋아하겠어. 분명 영숙이가 보내서 왔을텐데…
이번에도 수의사를 랭대해서 보낸걸 영숙이가 알면 또 섭섭해할테지? 힘들게 찾아온 사람인데… 난 못된년이야, 못된년이구 말구. …)
그는 자기
옷가지들을 크게 꿍져놓은 다음에는 이불이며 그릇가지들도 서둘러 꾸려놓았다. 삽시에 온 방안은 이사가는 집처럼 어수선했다.
한동안 오락가락하며 짐을 다 꾸려놓은 수정은 방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았다. 느닷없이 왈칵 설음이 북받쳐올랐다. 그는 이불보따리에 엎드려 어깨를 떨었다. 까닭없는 설음에 실컷 울고난 그는 흑흑 흐느끼며 중얼거렸다.
《수의사랑 집식구들 모두다 불쌍하게 해주지 않을테야. 그리구… 그리구 다시는 그 집에서 나오지 않겠어. 아무리 미워해두 죽을 때까지 그 집에서 살테야. 수의사가 하는 일도 힘껏 돕고…》
그날 저녁 리병우는 실험에 열중하다가 늦어서야 퇴근길에 올랐다.
별로 집에 가고싶지 않아 슬렁슬렁 직장을 나섰다. 낮에 방인화를 만나려고 가공직장 정문앞에까지 갔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돌아선 그였다.
수정을 만나보니 방인화와 함께 찾아간다고 해도 마음을 돌릴것같지 않았다. 더우기 방인화가 입에 보풀이 일도록 찾아가보라고 말할 때 나 죽었소 하고 제 생각만 하던 자기가 아닌가.
그러다가 지금처럼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움쭉 일어나 제켠에서 함께 가자고 부탁하기가 면구스러웠다.
하면서도 기사장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래일쯤엔 기사장이 또 찾아올텐데 뭐라구 할가. …)
집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는 본처를 원망하였다.
(먼저 가더라도 봄순이를 시집보내고나 갈것이지… 나에게 이런 길을 걷게 하다니… 봄순인 또 얼마나 불쌍하고…)
어느덧 집마당에 들어선 그는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부엌창문가에 불빛이 환하고 칼도마소리까지 들리는걸 보니 오늘은 봄순이가 먼저 들어와 저녁을 짓는 모양이였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출입문을 열었다.
다음순간 리병우는 깜짝 놀랐다. 그는 문가에서 우뚝 굳어졌다. 뜻밖에도 차수정이 부엌에 앉아있었던것이다. 집을 헛갈려 또다시 그의 집에 온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분명 자기 집이였다.
그는 문손잡이를 잡은채 들어가야 할지 나가야 할지 몰라 그냥 우두커니 서있기만 하였다.
수정이 되려 제편에서 눈을 흘겼다.
《왜 그러구 섰어요? 빨리 들어오지 않구? …》
수정의 재촉을 받고서야 리병우는 어정어정 방안에 들어섰다.
그는 한켠에 쌓인 짐보따리들을 보고 모든것을 짐작하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앉아야 할지 서있어야 할지 몰라 또다시 서성서성하였다.
이때 수정이 방안으로 들어오며 샤쯔를 벗으라고 말했다.
리병우가 머뭇거리자 어렵지 않게 다가서서 그의 웃단추까지 벗기기 시작했다. 하면서도 잔뜩 골살을 찌프리며 흘겨보는것이였다.
《아유! 이 냄새! 퀴퀴한게 어디… 언제봐야 이 모양이라니까.》
그는 꼭 장난꾸러기 아들애를 꾸짖듯 하였다.
사실 리병우의 옷에서는 늘쌍 오리털과 땀내가 섞인 불쾌한 냄새가 났고 목깃에는 기름때가 반질거렸다. 봄순이가 제아무리 알뜰하게 빨래하고 자주 옷을 갈아입혔어도 오리털냄새와 시약냄새가 몸에 배인데다가 덜퉁한 습관때문에 그는 항상 불결하였다.
리병우의 샤쯔를 벗겨든 수정은 씽 부엌으로 내려갔다. 수도가에 앉아 빨래를 하면서도 무슨 불만이 그리도 많은지 그냥 혀를 찼다.
《옷을 좀 깨끗이 입구 다니라요. 남들이 뭐라구 하겠어요? 음…》
그의 말과 행동에는 곰살스러운데가 조금도 없었다.
리병우는 방안에 서서 수정을 기웃이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저 녀자는 원래 자기의 사랑과 정을 저런 식으로 표현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시뭇이 웃고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