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3 회)
제 4 장
불타는 지향
8
(1)
리병우는 점심시간에 차수정의 집으로 떠났다.
기사장의 곡진한 당부대로 수정과 다시 가정을 합쳐야겠다고 굳게굳게 마음다진 리병우였다.
벌써 몇번이나 집에 찾아와 생활적인 애로를 풀어주고 털단백질먹이연구에서 성공하도록 힘을 주고 지혜를 합쳐준 송영숙기사장의 지극한 마음을 봐서라도 수정을 찾아가는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였다.
며칠전에도 집에 찾아와 김치도 담그어주고 방인화편에 부식물감도 보내주며 이모저모로 마음써준 기사장이다.
언젠가는 봄순이에게 새 구두도 안겨주면서 친언니의 정을 부어주고 그의 생활을 따뜻한 마음으로 보살펴주기도 했다.
리병우에게는 기사장의 말이 잊혀지지 않았다.
《수의사동지! 수의사동지도 남자지요? 동지가 먼저 수정이를 찾아가보세요. 아마 그애 마음도 달라질거예요. …
수정인 참 좋은 동무예요. 나와 친형제나 다름없답니다. 겉보기엔 매정하구 깔끔하지만 마음은 결곡하구 또 티없이 깨끗하지요. 이름처럼 수정같이 맑은 동무예요. 로동에도 성실하구요. 난 수정일 누구보다 잘 알아요. 아마 그만한 녀성도 쉽지 않을거예요.
래일이라도 꼭 찾아가보세요. 봄순이를 위해서라도 말이예요. 자존심때문에 그러나요? 아이참! 자존심이 무슨 필요예요?
내가 지금껏 살아보니 부부간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사이엔 자존심이 독약이더군요. 자존심과 리기주의는 사랑의 빛갈을 흐리게 한댔어요. …》
그는 매번 이렇게 따뜻이 권고했다.
몇번 지내보니 기사장은 인정이 남다른데다가 정열적이면서도 무한히 허심한 녀성이였다. 기사장의 진정을 느낄수록 그의 당부를 거역하는것이 죄되는 일처럼 생각되였다.
리병우는 드디여 수정을 만나리라 결심을 굳히게 되였다.
하지만 수정의 집이 가까와질수록 발걸음은 점점 떠지였다. 리병우는 기사장의 당부대로 딸자식의 행복을 위해 이보다 더 험한 길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고 자기
용기를 가다듬으며 걸음을 옮기는 그의 눈앞에는 봄순이와 진철이의 얼굴도 떠올랐다.
아버지를 홀로 두고 시집을 안가겠다는 봄순의 말이 결코 빈소리가 아님을 깨달은 진철은 요즈음 우울증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심드렁해지다못해 멍청해지기까지 했다. 볼이 훌쭉해지고 양기를 잃은채 땅만 내려다보고 다녔다. 묻는 말에도 왕청같은 대답만 했다.
총각의 정상이 이러하니 봄순이도 요즈음엔 종금직장으로 오는걸 꺼려했다. 그의 마음고생도 여간아닌지 그 밝던 얼굴도 점점 어두워졌다.
다른 처녀라면 남편될 사람과 함께 아들겸 사위겸 친정부모를 모시고 살수 있지만 진철이의 경우는 달랐다. 영예군인부부의 외아들인 진철에게는 량부모를 모셔야 할 의무가 있었다.
리병우는 딸자식과 진철의 가슴에 상처를 남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다시금 용기를 가다듬고 걸음을 다우쳤다.
어느덧 수정의 집앞에 이르렀다.
그는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안고 주저주저하며 마당에 들어섰다. 그런데 출입문에는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점심시간인데 어딜 갔을가? …)
리병우는 엉거주춤 문앞에 서있었다.
《보급원을 만나자구요?》
불쑥 말을 건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다보니 옆집녀인의 갱핏한 얼굴이 줄에 널려있는 빨래들짬으로 내다보였다.
자기 집 마당에 빨래를 널면서 수정이네 집 마당가로 들어서는 리병우를 빤히 지켜보고있던 그 녀인은 갤쭉한 턱을 쳐들며 호기심 많은 눈으로 말을 건늬였다.
리병우는 끄덕이는지 가로 젓는지 분명치 않게 머리를 주억거렸다.
《아침에 자전거타구 나가던데요? 이제 오겠지요 뭐.》
녀인은 눈을 반짝이며 그냥 쳐다보았다.
그 눈길앞에서 리병우의 마음은 더욱더 당황해지고 불안하기까지 하였다. 괜히 찾아왔다는 후회감까지 생겨났다.
집안에서 누군가 찾는 소리가 들려서야 옆집녀인의 얼굴은 빨래짬사이로 사라졌다. 그만에야 리병우는 후 한숨을 내그었다. 녀인들앞에 서면 몸도 마음도 다같이 과다지는 그였다.
리병우는 자물쇠가 걸린 출입문을 쳐다보며 어깨를 푹 떨구었다.
(일이 안될 징조구나. …)
더이상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스적스적 걸음을 옮겼다.
이때 째릉째릉하며 자전거종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눈길을 돌려보니 수정이 소로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오는것이 보였다. 또다시 가슴이 후두두 뛰였다.
(이제야 오는구나. 날보구 뭐라구 할가? …)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자전거는 마당에 들어섰다.
《어떻게 왔어요?》
수정은 자전거에서 내리며 깔끄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하더니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전거바구니에서 책을 꺼내였다.
《아유, 덥다!》
그는 책을 꺼내다말고 총총걸음으로 문앞에 다가가 자물쇠를 잘칵- 소리내며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탕탕탕 소리를 내며 아래웃방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그는 부엌으로 내려와 물 한바가지를 떠가지고 소리내여 마시였다.
리병우는 엉거주춤 마당가에 서서 수정을 쳐다보며 이 무더운 날 군출판물보급소에서 새 도서를 받아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였다. 탈탈탈 끌신을 끌고 다시 마당가로 나온 수정은 자전거바구니에서 책을 한권두권 꺼내들며 할끔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때문에 왔어요, 예?》
그의 물음에 리병우는 입안의 침이 바짝 말라드는것을 느끼였다.
《도서주문때문에 그러는가요?》
차수정은 다시 물었다. 그는 리병우가 결코 그 일때문에 온것이 아님을 잘 알면서도 그냥 아닌보살하였다.
《지난해 예약했던 신문과 잡지는 이번에도 그냥 보도록 하겠어요. 그럼 되겠지요? 예?》
태연하게 묻고 말하는 그앞에서 리병우는 너무도 면구스러워 빠질빠질 진땀만 흘렸다.
(제길… 뭣때문에 왔다는걸 잘 알면서두 저런다니까. …)
그는 바지주머니를 더듬어 담배곽을 찾아쥔 다음 토방에 걸터앉았다.
그러는새 수정은 책을 한아름 안고 또다시 집안으로 쑥 들어가버렸다. 그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리병우는 아래웃방문이 활짝 열려진것을 보고 들어갈가하며 엉뎅이를 들썩했다가 용기가 나지 않아 그만두었다.
부엌에서는 물소리와 그릇 부시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리병우는 수정이 지금 한창 점심을 먹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밉긴 미운게구나. 날 밖에 두고 혼자 밥을 먹는걸 보니… 할수 없지. 미운 사람과는 죽어두 못산다는데…)
그는 한숨을 내그으며 움쭉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될것같다고 생각한 그는 스적스적 대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때 수정의 목소리가 귀전을 때렸다.
《빨리 들어와 점심식사를 하세요.》
《?!》
리병우는 눈을 꺼벅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유! 빨리 들어오지 않구 뭘해요? 배고파 죽겠는데…》
차수정의 목소리는 신경질적이였다. 그러나 별로 랭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딴사람에게 하는 말인가 하여 주위를 두릿거리던 그는 머리를 끄덕이며 천천히 집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