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6 회)

제 4 장

붉은 단풍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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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정일동지께서는 군인다운 패기가 느껴지는 그들의 열정에 호응하시듯 군대식으로 한손을 들어 답례를 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신인하부부장에게 오늘중으로 인민군협주단에서 영화시사회를 조직하여 모든 창작가, 배우들이 예술영화 《한 간호원에 대한 이야기》를 다 보도록 해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신인하부부장이 즉시 대책을 세우겠다고 보고드리는데 출입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더니 김량남이 조용히 들어와 인사를 올리였다.

《아, 왔구만! 그래 〈도주병〉은 붙잡아왔습니까?》

김량남이 방금 평양철도국에서 수속을 끝내고 데리고 오는 길이라고, 지금 문밖에 서있다고 말씀올리였다.

《그럼 데리고 들어와야지, 어서 들어오라고 하시오.》

모두의 의아한 시선이 몰박힌 출입문으로 철도제복을 입은 아련한 처녀가 머리를 폭 수그리고 들어섰다. 어디라없이 허리숙여 인사를 드리고 고개를 들던 처녀의 입에서 《아!》하는 탄성이 울려나왔다. 인민군협주단 창작가들도 놀랐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놀란것은 바로 김정일동지이시였다.

《아니, 이게 누구요? 진포역에서 헤여졌던 차장동무가 아니요?》

일껀 굳어졌던 설아의 얼굴에 밝은 기운이 확 피여올랐다.

차장차의 침대모서리에 앉아 철길구간의 레루상태에 대하여 깐깐히 묻고 수첩에 적어넣으시던 그분께서 자기앞에 서계시였다. 진포역구내에 점도록 서시여 차장차의 꽁무니가 굽인돌이를 돌아설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시던 잊지 못할 그분께서 자기에게로 다가오시였다.

《량남동무가 어떤 재사를 데려오는가 하고 궁금해했더니 구면친구를 데려왔구만! 하하하… 세상에 이런 일두 다 있다니!》

김정일동지께서는 몸둘바를 몰라하는 설아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창문쪽에 놓인 쏘파로 이끌어가시였다.

쏘파모서리에 불안스럽게 앉은 설아를 편히 들여앉히고 차탁우에 놓인 하얀 사기고뿌에 보온병의 더운물을 따라주며 아직도 놀라움과 서먹함에 허둥거리는 처녀의 얼굴을 다정히 바라보시였다.

《여기엔 다 동무와 낯익은 사람들인데 긴장해하지 말고 어서 물을 드시오. 그래 설아동무는 그동안 무대가 그립지 않았습니까?》

무대… 하고 설아는 조용히 입속으로 외워보았다.

진성이의 얼굴을 잊어버리려고 애쓸 때에도 그것만은 정녕 순간도 잊어본적 없는 불밝은 무대…

홀로 차장차의 란간에 서서 끝없이 뻗어나간 레루들을 오선지로 그려보고 일매지게 가로놓인 침목들을 피아노의 무한한 건반처럼 마음속으로 눌러보며 입속으로 조용히 노래를 부를 때마다 눈물겹게 그립던 무대…

몸은 내렸으나 마음은 항상 서고 밟아보고 날아오르던 무대…

그이의 물음에 왜서인지 설음이 꼴깍 차넘치면서 화끈 달아오른 두볼에 눈물이 도르륵 굴러내렸다.

《어떤 사람들은 무대에 대한 예술인들의 애착을 비속화해서 마약이라고까지 말하는데 그것은 잘 몰라서 하는 말이고…》

김정일동지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시며 숙연하게 앉아있는 일군들과 창작가들을 빙 둘러보시였다.

《예술인들은 인간의 본성인 감정과 인간에 의하여 창조된 음악예술이 자신의 심장속에서 통일을 이루고 그것이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들에게 전달되여 하나의 공명을 일으키는 특유한 위치가 바로 무대이기때문에 그것을 신비스러울 정도로 사랑하게 되는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예술인들을 두고 말한다면 벅찬 현실속에서 자기가 느끼는 감흥과 혁명적인 문학예술작품들의 정서가 일치되여 진실한 형상을 낳고 그 형상이 사람들에게 전파되여 진심으로 기뻐하고 격동되는 모습을 직접 체험할수 있는 공간이 바로 무대이기때문에 애착을 가진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무대생활을 적지 않게 해온 설아동무도 다를바가 없을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제라도 다시 군복을 입고 무대에 서고싶은 생각이 없습니까?》

정설아는 떨리는 눈으로 그이를 우러렀다.

처녀의 해쓱해진 얼굴과 가쯘한 웃이발로 질끈 깨여문 입술은 그이께 차마 말씀드리기 괴로운 자기의 처지때문에 아프게 이지러졌으나 참아내기 어려웠던 갈망과 지향은 이 한순간을 놓쳐버린다면 다시는 영영 무대에 설수 없다는 비상한 두려움때문에 쇠조롱의 벌어진 살창틈으로 부리를 내밀고 애타게 파드득거리는 새의 날개마냥 단말마적으로 몸부림치고있었다. 그러나 온넋을 깡그리 태운 그 세찬 퍼덕임도 끝내 좁은 살창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정설아는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연약한 흐느낌이 터졌다. 울자고 생각한것은 아니였는데 자기가 아닌 딴사람이 우는것처럼 저절로 눈물이 줄럭줄럭 쏟아져내렸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너그럽게 웃으시며 그에게 손수건을 내밀어주시였다. 정설아는 흠칫 놀라며 얼른 자기 손수건을 꺼내여 두볼을 눌렀다.

《설아동무의 심정은 알만합니다. 하지만 동무는 다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동무에겐 아무런 문제도 없소. 왜냐하면 동무는 이러저러한 곡절을 거쳐서 살아왔지만 조국에 돌아온 후 수령님의 품에 안겨 음악공부도 하고 또 예술적재능을 마음껏 꽃피워왔기때문이요. 동무는 수령님과 우리 당에서 키운 예술인이요. 그밖에 다른것은 아무것도 없소.》

설아는 산더미처럼 쌓아올린 설음과 괴로움, 착잡하고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들이 그이의 그처럼 짧은 한마디 말씀에 여지없이 부서져 사라져버린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 시각에 설아는 자기앞에 앉아계시는분의 인간에 대한 정과 믿음이 얼마나 크고 강하며 그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기이하고 복잡한 인간문제들을 얼마나 명백하게, 얼마나 단호하게 풀어낼수 있는것인지, 그러나 그러한 믿음을 생의 좌우명으로, 신념으로 간직하기 위하여서는 얼마나 위대한 리념과 큰 심장이 필요한가에 대해 다 헤아릴수 없었다.

그러나 설아는 분명코 자기가 새로운 인생의 무대로 오르는 첫 계단에 발을 내짚었음을 또렷하게 의식했다. 광휘로운 조명등이 자기를 향해 렌즈를 돌리고있었다.

《저는 꿈에도 군복을… 입고싶었습니다. 무대에 다시 서고싶었습니다.》

설아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아니, 그의 끓어번지는 넋이 그이께 이렇게 아뢰이였다.

《그럴줄 알았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설아의 팔을 붙들어 일으켜세우시였다.

《설아동무, 여기 동무네 지휘관들도 와있지만 인민군협주단에서는 이제 곧 새로운 〈피바다〉식혁명가극을 창조하게 됩니다. 우리 인민군군인들을 당과 수령께 끝없이 충실한 전위투사들로 키우고 그들을 충성과 위훈에로 불러일으킬수 있는 거창한 창조사업이 진행된단 말이요. 나는 설아동무가 이 벅찬 투쟁속에 뛰여들어 꼭 훌륭한 성과를 거두기 바랍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집무탁의 아래쪽서랍에서 분홍빛진달래무늬가 자름자름하게 박힌 커다란 지함을 꺼내드시고 설아에게로 가까이 다가오시였다.

《설아동무, 동무는 어버이수령님의 배려에 의하여 오늘부터 인민군협주단 성악배우로 복무하게 되였습니다. 동무의 군복과 견장이요.》

설아는 그이께서 안겨주신 분홍빛지함우에 얼굴을 묻고 또다시 엉엉 소리내여 울었다. 부끄럽지도 않고 눈물을 멈춰세울 길도 없었다.

이 세상에 자기 혼자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설아였다.

어머니와는 헤여지고 아버지는 찾지 못하고 인생길에 불꽃처럼 튀여올랐던 사랑과는 멀어지려 애썼던 자기, 울어도 등을 두드려줄 손이 없고 웃어도 기뻐해줄 사람이 이 세상에는 없다고 그처럼 외로웠던 설아였다. 무엇이, 과연 그 무엇이 자기의 인생을 이렇게 뒤집어놓았는지 당장은 생각해낼수 없었지만 아버지도 어머니도 최진성이도 지금 이 순간에 자기와 함께 있는것만 같았고 풍랑속에 떠내려가며 하늘을 향해 맥없이 허우적거리던 손에 든든한 거목의 기둥이 와닿은것만 같았다.

그것은 죽어도 다시는 놓지 못할 생의 지탱점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흐느껴우는 설아의 등에 손을 얹으시며 따뜻하게 말씀하시였다.

《마침 협주단 피복수리소에 동무의 군복치수가 있어서 옷은 꼭 맞게 지었을거요.》

설아는 김정일동지의 다심하신 정에 거듭거듭 눈물을 흘리였다.

그이의 집무실을 나설 때 설아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려다가 곧 얼굴을 들고 군인의 거수경례를 드리였다.

김정일동지께서도 오른손을 힘껏 쳐들어 답례를 해주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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