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2 회)
제 4 장
불타는 지향
7
(2)
도서실로 돌아온 그는 오래동안 그린듯이 앉아있었다. 그는 자기가 어떻게 송영숙의 방을 나섰는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뭇매질을 당한 가슴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는듯 그냥 쓰리고 아팠다.
아픔이 클수록 송영숙에 대한 원망과 노여움은 점점 커갔다.
(흥! 남한테 말하기야 쉽지. 하지만 내 마음을 제가 알게 뭐야? … 달라졌어! 자기 행복에 도취돼서 남의 슬픔을 몰라. … 아무렴 남의 불행이 제 고뿔만 할가? 나한텐 동무가 없어. …)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앉아있던 그는 어슬어슬 땅거미가 질무렵에야 몸을 일으켰다. 분한 생각에 배고픈 생각도 없었다.
노상 묵은 밥에 한두끼 건느는것쯤은 보통이였다. 지금은 그저 모든 슬픔을 다 잊고 그냥 자고싶었다.
기다리는 사람도, 반겨맞는 사람도 없는 집에 들어가선 뭘하랴.
빈 집에 들어가 아침에 지었던 밥이나 한술 먹고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밖을 나서던 수정은 누군가 자기 앞으로 곧추 다가서는통에 깜짝 놀랐다.
《누구예요?》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몸매다부진 웬 청년이 꾸벅 인사를 하며 한발자국 다가섰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사실은… 퇴근한줄 알구 집에 찾아갔더니 문이 걸려있어서…》
청년은 몹시 쭈빗거렸다.
차수정은 마음속으로 어느 열성독자가 책때문에 찾아왔으리라고 생각했다. 요즈음엔 집에까지 찾아와 도서를 예약하거나 주문하는 독자들의 수가 더 늘어났다. 그때마다 자기 사업에 대한 긍지와 기쁨을 더 크게 느끼는 그였다.
(정보산업시대인 오늘 보급원은 과학자, 기술자들의 당당한 길동무가 돼야 해.)
하지만 송영숙에게서 아픈 말을 들은 지금은 모든것이 시답지 않았고 밤중에 찾아온 이 독자도 별로 반갑지 않았다.
《그래 무슨 책을 예약하려 그래요?》
흥심없는 그의 물음에 청년은 뒤더수기를 긁었다.
《전… 책때문에 온게 아닙니다.》
《?!》
《전 보급원동지한테 봄순동무에 대한 말을 하자구 왔습니다.》
청년의 입에서 봄순의 이름이 나오자 차수정의 신경은 날카로와졌다.
(오늘은 종일 수의사와 그 집일때문에 머리아픈 날이구나. …)
수정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그었다.
《동문 누구예요? 동문 자기 소개도 할줄 모르나요?》
차수정의 깔끄러운 어조에 몸매 다부지고 두눈이 억실한 그 청년은 종금직장 수리공 진철이라고 자기 소개를 하였다.
(수리공 진철이? …)
누군가에게서 들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여전히 랭랭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봄순이 말을 나한테 하겠다는거예요? 내가 봄순이와 무슨 상관이게요?》
부러 랭정하고 매몰차게 내뱉는 그의 말은 인화성이 강한 청년의 가슴에 불을 지펴주었다. 지금껏 머뭇거리던 그답지 않게 허리를 쭉 펴고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보급원동진 잘 모를수 있지만 저와 봄순동문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습니다.
전 그 동무의 아버지와 한직장에서 일하면서 봄순동무가 효성이 지극하구 또 성실한 동무라는걸 알구 결혼하려구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그 동문 요즘 결혼할수 없다면서 나를 피해다닙니다. 사연을 물어보니 혼자 사는 아버지를 두고는 시집가지 않겠다는겁니다.
그런데 나에게도 영예군인인 우리 부모님들을 모셔야 할 의무가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청년은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격한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보급원동지를 만나 이 사연을 털어놓구 도움을 받자고 생각했던겁니다.》
《…》
《보급원동지!》
청년의 눈빛에 애원이 비끼기 시작했다.
《저와 봄순동무의 앞날은 보급원동지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리구… 봄순동무의 아버진 참 좋은분입니다. 전 수의사동지를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분은 오직 연구사업과 일밖에 모르는 진실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한동안 갑자르며 서있던 청년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처음처럼 꾸벅 인사하고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수정은 서있던 자리에 뿌리가 내린듯 오래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어쩐지 자기
얼마만에야 그는 쓸쓸한 마음을 달래며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던 그는 류다른 온기를 느끼였다. 부엌에서는 구수한 냄새까지 풍겨왔다.
부엌에 들어선 그는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밥가마안에는 그가 좋아하는 만두국에 당콩밥이 따끈따끈하게 들어있었다. 부뚜막우엔 갓나물김치와 버섯볶음도 먹음직하게 놓여있었다. 가뭇없이 사라졌던 식욕이 부쩍 동해났다. 점심식사마저 건는데다가 이제는 늦은 저녁이였다.
(경아 할머니가 왔댔구나!)
문춘실이 이따금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찾아오군 하던 일이 떠올랐다.
문득 친어머니의 따스한 정이 사무치도록 안겨와 눈앞이 뿌잇해졌다. 눈을 슴뻑이며 수저를 찾던 수정은 보온병옆에 놓인 종이장을 띄여보았다.
송영숙의 아담한 글씨가 눈가에 확 안겨들었다.
《수정아! 아픈 네 마음에 매질을 한 나를 용서해라.
그러나 내 마음을 리해하리라 믿는다.
수정아! 아무리 바빠도 식사시간은 꼭 지켜라. 홀몸에 앓으면 어쩌겠니? 그리고 난 진정으로 너의 행복을 바란다.
너를 기다리다가 생산지휘가 바빠서 그냥 간다. 영숙》
수정의 눈앞은 뿌잇하게 흐려졌다. 이윽고 눈가에 고여올랐던 맑은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송영숙의 필체가 씌여진 하얀 종이장우에 꽃무늬가 점점이 새겨지기 시작하였다.
수정은 점점 더 세차게 북받치는 우정에 겨워 종이장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송영숙이 앞에 있기라도 하는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동무라면서 날 계속 울리기만 하누나. … 흥! 이게 다 고양이 쥐생각이지 뭐야? … 고양이 쥐생각이구 말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