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 회)
제 3 장
열매는 어떻게 무르익는가
12
(1)
《보급원동지! 그게 정말이예요?》
서정옥은 수정에게 이렇게 물었다.
보급원에게서 기사장이 해산했다는 말을 듣고 정옥은 깜짝 놀랐다.
시험호동에 자주 나오는 기사장이지만 어떻게나 몸건사를 잘하였는지 임신중이라는걸 전혀 몰랐던 그였다. 겨울솜옷을 두툼하게 입고 다녀서인지 조금도 그런 눈치를 느끼지 못했었다.
(그 몸으로 생산지휘를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가? …)
자기는 국가에서 배려하여준 산전산후휴가를 하루도 곯지 않게 계산하여 휴식을 하였는데 기사장은 해산하는 날까지 뛰여다녔다는 말을 들으니 얼마나 돋보이는지 몰랐다. 그는 같은 녀성의 심정으로 기사장의 수고를 헤아려보며 마음속으로나마 머리를 숙였다.
확실히 자기와는 비교가 안되는 녀성일군이다.
《저, 나도 기사장동지네 집에 병문안 갈수 있나요?》
서정옥은 이 기회에 남편을 많이 도와주고 시험호동사고때 자기들을 따뜻이 대해준 기사장에게 인사차림을 하고싶었다.
그의 말에 수정은 깔끔하게 흘겨보았다.
《병문안은 무슨 병문안? 축하방문이지. 안그래?》
서정옥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눈과 귀에 거슬리면 상대방의 체면이나 감정따위를 생각지 않고 꺼리낌없이 콕콕 쏘아주는 차수정의 앞에 서면 얼굴이 따끈따끈할 때가 종종 있었다.
수정은 정옥에게 그러면 기사장이 좋아할거라면서 이제는 일주일이 지났으니 위생적으로도 지장이 없을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은아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조막만한 아기의 얼굴을 그려보며 빙긋이 웃었다.
《보급원동진 언제 갔댔어요?》
정옥이 다시 물었다. 무얼 가지고 갔더랬는가고 물으려다가 그 말만은 그만두었다.
《어제 갔다왔어. 애기옷을 사가지고…》
《그래요? 그럼 나도…》
정옥은 마음속으로 속궁냥을 해보았다. 이틀전에 받은 시험용새끼오리가 보름쯤 지나면 오금이 뜨겠는데 그때쯤 찾아가면 될것같았다.
그의 말을 들은 수정도 그게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차수정이 돌아간 다음 정옥은 먹이처방표를 작성해가지고 들어온 남편에게 보급원이 주고간 《수의축산》잡지를 주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수정에게서 들은 소식을 남편에게 전했다.
잡지의 차례에 눈길을 보내던 정의성은 안해의 말을 듣고 머리를 쳐들었다. 정옥은 방그스름히 웃으며 기사장이 또 딸을 낳았다고 덧붙여 말했다. 제일처럼 기쁘게 말하는 안해를 보며 정의성은 씁쓸히 웃었다.
잡지를 펼쳐보던 그는 안해의 부름소리에 다시금 눈길을 들었다.
《여보! 지금 받은 오리를 판매에 넘긴 다음 난 기사장동지네 집에 갈가 해요. 애기옷이랑 사가지구요. 좋지요? …》
《…》
《기사장동지가 당신과 우릴 얼마나 도와주었나요? 난 기사장동지가 꼭 친언니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인사차림을 좀 하려구 해요.》
정옥은 복스러운 얼굴에 웃음을 담고 노래하듯 즐겁게 말했다.
《그리구… 당신의 첨가제연구가 끝나면 나두 아이를 낳겠어요. 고운 딸애를요. 형님도 나더러 오누이를 키우라지 않았나요? 그럼 우리 일철인 오빠가 될거예요. …》
제 기분에 들떠서 종달새처럼 지저귀는 안해를 지켜보던 정의성은 저도 모르게 허허 웃었다. 녀학생처럼 순진하고 다정다감한 안해의 말은 이따금 그에게 즐거운 마음을 가져다주군 하였다. 그는 봄순이와 함께 놀이장으로 나가는 안해의 뒤모습을 바라보았다.
정의성의 눈앞에는 느닷없이 안해와의 첫 인연이 맺어지던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소박하고 순진하면서도 일솜씨 알뜰한 처녀는 언제부터 그의 마음속에 깃들기 시작했던가.
…
《뭐라구? 오리공장으로 아예 내려가겠다구? … 장가는 안가구?》
연구소를 떠나 오리공장으로 아예 내려가겠다는 셋째아들의 말에 년로한 어머니는 펄쩍 놀라며 큰소리로 물었다.
이런 처녀, 저런 처녀 내세워도 머리를 저으며 닭공장 지배인이라는 처녀에 대한 말만 종종 꺼내군 하던 아들이였다. 하도 민망스러워서 《옛날부터 죽은 딸은 다 곱구 놓친 물고긴 다 크다더라. …》하고 가볍게 퉁을 주군 하던 어머니였다.
맏누이는 맏누이대로 《그렇게 잊혀지지 않으면 이제라도 다시 찾아가보렴.》하고 시까슬렀다.
그런데 온 집안식구가 장가들라고 응원북을 울려도 들은척 하지 않던 그 애군이 이제는 오리공장으로 아예 내려가겠단다.
《늙은 총각이 별나게 바람났는데? …》
그의 결심을 들은 맏형은 씨물씨물 웃으며 이죽거렸다.
정의성의 눈빛에서 남다른 야심과 열망을 느낀 연구소에서만은 굳이 막아서지 않았다.
《개구리가 주저앉는건 높이 뛰기 위해서라구 했지. 난 믿네, 자네가 가금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리라는걸. …》
성공에 대한 야심과 명예욕에 불타는 그의 속마음을 환히 꿰뚫어본듯 연구소의 한 친구는 의미있게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드디여 오리공장으로 내려온 그는 기술준비소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야심만만한 그에게는 시험호동이 필요하였고 시험호동 관리공이 요구되였다.
《시험호동 관리공이야 응당 일 잘하고 책임성이 높아야지.》
유상훈박사의 말이였다.
그는 청년직장장과 관리공문제를 의논하겠다면서 연구를 잘하라고 고무해주었다.
정의성의 결심과 잡도리가 여느 사람과 다르다는것을 느낀 박사는 공장에 쉽지 않은 청년이 찾아온것을 누구보다 기뻐하였다.
《괜찮은 젊은이가 왔습니다. 그는 꼭 공장의 기둥감이 될겁니다. 두구보십시오.》
유상훈박사는 지배인과 당비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어느날 아침, 단아한 체격에 얼굴이 복스러운 처녀가 시험호동출입문앞에 얌전히 서있었다.
방역대에서 소독기구를 가지고오던 정의성은 고개를 다소곳하고 인사하는 낯모를 처녀에게 왜 왔는가고 물었다.
처녀는 직장장이 오늘부터 시험호동에서 일하라고 했다고 대답하였다. 순진한 웃음을 머금은 처녀의 얼굴과 청아한 목소리는 상대방의 마음까지 맑게 정화시켜주는듯싶었다.
정의성은 처녀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이름이 뭐요?》
《정옥입니다. 서정옥…》
《서정옥? 이름이 참 좋구만요.》
정의성의 진정이 담긴 말에 처녀는 쌔룩이 웃었다.
그날부터 처녀는 시험호동에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청년직장장이 추천해보낸 그 처녀는 정말로 착실하고 책임성이 높은 관리공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