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9 회)
제 3 장
열매는 어떻게 무르익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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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온 공장이 시험호동의 사고소식으로 죽가마끓듯 하고 관리국과 수의방역소 일군들은 물론 법기관 일군들까지 내려왔을 때는 엉뚱한 생각이 가지를 뻗치기 시작하였다.
(사고의 책임이 나한테까지 미치지 않을가? … 가정적으로나 사업상관계로 보아 남들보다 가까운 처지이니 혹시…)
지금껏 극단적인것과 모난것을 피하며 살아온 그에게는 이런 처지에 자기를 몰아넣은 정의성이 저주스럽기 그지없었다.
기사장에 의하여 사고의 원인이 밝혀졌을 때에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하면서도 정의성에 대한 원망은 가셔지지 않았다.
(이제부터라도 제발 첨가제연구에서 손을 떼고 조용히 살았으면 저구 남이구 다 좋을텐데 괜히…)
그런데 오늘 죽지부러진 새처럼 어깨가 축 처진 정의성을 보니 잘코사니 하는 생각보다 측은한 생각이 더 앞서는것이였다.
《집에 올라가 저녁식사를 같이하기요.》
서정관은 자기 집 아빠트를 턱짓하며 말했다.
했으나 정의성의 얼굴색은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 집사람두 기다릴텐데 그냥 가겠소.》
긴말을 싫어하는 그는 자기 집을 향해 스적스적 걸음을 옮겼다.
서정관은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그의 뒤모습을 지켜보았다.
(기분이 나쁠테지. 이제라도 모든걸 깨닫고 첨가제에서 손을 뗐으면 좋을텐데… 나두 그만큼 말했으면 제할바를 한셈이지. …)
그날 출장길에서 돌아온 남편을 맞이한 서정옥은 여느때없이 살뜰하였다. 그러나 안해의 따뜻하고 다심한 마음도 정의성의 저락된 기분을 돌려세우지 못하였다.
며칠후 몇마리 남았던 오리마저 모두 판매에 넘긴 시험호동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이틀씩 교대로 감탕파기에 나갔던 서정옥이와 리봄순은 반나절 시간을 받고 들어와 놀이장에 있던 칸막이들도 들어내고 바닥에 깔았던 짚도 모두 거두었다. 호동안은 온통 생석회와 표백분냄새였다.
정옥이와 봄순은 소독과 호동안팎의 정돈으로 바쁘게 뛰여다니다가 오후에는 다시 호수가에 나가 감탕파기를 하였다.
정의성은 정의성대로 온종일 기술준비소의 분석실에 들어박혀 자기가 채취해온 소금밭이끼며 첨가제성분들을 분석해보았다.
당분간 시험호동의 운영을 중지하고 지금껏 연구해온 자료들을 정립하다가 5월경 생산이 본격화될 때 시험생산을 시작하려는 생각이였다.
《정기사생각이 그렇다면…》
유상훈박사도 그의 마음을 리해한듯 했다.
다음날 아침, 휴계실에 두었던 시험일지를 가져오려고 시험호동에 갔던 정의성은 뒤따라 들어온 기사장을 만났다.
《오래간만이군요. 그동안 앓지 않았어요?》
송영숙은 놀이장안쪽을 들여다보며 인사말을 하였다.
제염소에 나갔다가 들어온 후 처음 만나는 그였다.
《제염소에 나가보니 어때요? 같은 소금밭이라고 해도 계절별에 따라 일반조성에서 차이가 심하지요?》
송영숙은 무랍없는 태도로 제염소의 실태며 소금밭이끼의 채취방법과 계절별 화학조성에 대하여 물었다.
정의성은 그전에도 느꼈지만 그가 제염소며 소금밭이끼에 대하여 자기 이상으로 알고있는데 대하여 은근히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거기에 대해선 언제 그렇게 깊이 파악했습니까?》
정의성이 물었다.
송영숙은 씁쓸하게 웃었다.
《고려식물성성장촉진제를 연구할 때 여러가지 식물들과 함께 바다풀에 대해서도 좀 알게 됐지요. 소금밭이끼도 그때…》
그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정의성은 머리만 끄덕였다.
송영숙이 닭공장에서 소조생활을 할 때부터 고려식물성성장촉진제연구를 하였다는것을 너무도 잘 아는 정의성이였다.
그러나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즐겁게 추억할수 없는 지난날을, 멀리로 흘러간 지난날을 자꾸만 돌이켜봐선 무엇하랴.
송영숙도 불쾌한 추억을 털어버리듯 작업복을 가볍게 털며 놀이장으로 들어갔다.
《관리공들은 다들 어디 갔어요?》
표백분과 생석회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놀이장을 한바퀴 돌아보고난 그는 먹이조리실쪽을 기웃이 들여다보며 물었다.
정의성은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이미 알고있으면서도 묻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기사장은 여전히 놀이장을 휘둘러보는것이였다. 관리공들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것이 분명하였다.
《두사람 다 감탕파기에 나갔습니다.》
그는 송영숙을 외면하며 흥심없이 대답했다.
송영숙은 깜짝 놀래였다. 그는 홱 머리를 돌렸다.
《감탕파기라니요? 새끼오리 받을 준비는 안하구요?》
그는 어지간히 큰 목소리로 물었다.
자기의 얼굴에 날아온 그의 눈빛앞에서 정의성은 태연해지려고 애쓰며 앞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엎어진김에 쉬여간다구 두석달 중지했다가…》
그는 자기의 결심을 다 터놓지 못했다.
송영숙이 그의 말꼬리를 잽싸게 나꾸어챘던것이다.
《두석달 중지한다는건 무슨 말이예요? 그건 누구 지시예요? 예?》
그의 눈빛은 날카로와졌다.
《…》
정의성의 마음은 은근히 긴장해졌다.
송영숙은 작업복주머니에 두손을 깊숙이 찌르고 서서 지그시 쏘아보았다.
이윽고 그는 분풀이하듯 구석켠으로 바싹 밀어놓은 먹이운반삭도를 힘껏 끌어당겼다. 고정고리가 벗겨진 삭도가 성나듯 우르릉- 소리를 내며 두어m정도 밀려나왔다. 삭도가 내는 그 웅글은 소리는 송영숙이 터뜨리는 불만에 찬 목소리와도 같았다.
《그래서 아직 〈시험설계서〉도 내지 않았군요?》
송영숙은 격해진 눈길로 따지듯 물었다.
그의 물음에 정통을 찔리운 정의성은 또다시 아무 말도 못하였다.
사실 그는 시험용새끼오리의 마리수며 그에 따르는 배합먹이의 전량을 《시험설계서》에 써넣기가 서슴어졌었다.
시험과 연구에서 이렇다하게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누구의 잘못이든 사고까지 내고보니 저도 모르게 소심해졌던것이다.
그의 얼굴에서 속마음을 꿰뚫어본 송영숙의 눈가에서는 록록치 않은 그 무엇이 번쩍하였다.
《안돼요!》
그는 단호하게 머리를 저었다.
《두석달이 아니라 하루도 중단하면 안돼요! 오늘중으로 〈시험설계서〉도 들여오고 관리공들도 부르세요. 아니! 이제 당장!》
그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명령투로 말했다.
《요즘 시험오리들이 없어서 나와보지 않았더니 정말…》
그는 심한 배신감이라도 느낀듯 성난 목소리로 말하더니 씽- 나가버렸다.
정의성은 그의 뒤모습을 쳐다보며 우두커니 서있었다.
손탁이 세고 내밀성이 강한 송영숙이 드세게 다그어대던 모습을 상기해보느라니 잠시나마 마음의 탕개를 풀었던 자기
그는 밀려나온 삭도를 밀어서 제자리에 끌고갔다. 삭도는 또다시 웅글은 소리를 내였다. 그 소리는 정의성에게 새로운 용기와 신심을 주는것같았다.
(그렇다! 생활은 백번 쓰러졌다가 백번 다시 일어나기이다. 해보자! 용감하게 다시 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