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2 회)
제 3 장
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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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설아는 자기의 이 길이 어디서 시작되였던가 하고 아득히 좁아져 맞붙어보이는 레루의 한끝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아스라한 그끝에 김량남이라고 부르는 당중앙위원회 지도원의 얼굴이 보인다.
정설아는 어쩌면 이 길이 갓 임신한 어머니를 두고 아버지가 집을 떠나던 그 순간에 벌써 운명지어진것이 아닐가 하고 생각하였다.
흐릿해오는 망막속에 김량남이 처음 인민군협주단에 들어서던 그날의 일이 영화의 화면처럼 떠올랐다.
그날 설아는 무대직일을 서고있었다. 아침에 근무를 교대하고 금방 완장을 두르고 섰는데 무대로 들어서는 출입구가 열리더니 이제는 퍽 낯이 익은 로일수부국장과 까만 양복차림을 한 체소한 중년사나이가 함께 들어왔다. 설아는 옷매무시를 바로하며 차렷자세를 취하였다.
《중장동지! 배우 정설아 무대 직일근무를 수행하고있습니다.》
중장이 손을 들어 응대를 하며 지나치려는데 곁에서 함께 걸어가던 중년사나이가 걸음을 멈추고 설아의 얼굴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의혹이 짙은 눈빛이였다. 앞서가던 부국장이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김량남이 정설아쪽을 돌아보며 고개를 기웃거리는것을 본 부국장이 아는 동무인가고 물었다.
《아니, 처음보는 동무입니다. 그저 내가 아는 어떤 녀인과 비슷하게 생겼기에…》
두 일군의 목소리는 멀어져갔으나 그들이 나누는 말은 우뢰처럼 공명되여 설아의 가슴속으로 육박해왔다.
《저 동무가 동북에서 살다가 나왔다구요?》
《참, 량남지도원동무도 어릴 때 동북에서 머슴살이를 했다지요? 그러니 혹시 그때…》
《아니, 아닙니다. 내가 잘못 본것같습니다.》
그날 저녁 설아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삼촌의 집을 찾아갔다.
한창 저녁식사를 하고있던 삼촌내외가 반겨맞으며 설아앞에 숟가락과 새 밥그릇을 놓아주었다. 합숙밥이 아무리 꿀맛이로서니 삼촌네 집에 좀 자주 다니면 못쓰는가고 정어린 지청구도 하였다. 그러나 설아는 밥술을 뜨는둥마는둥 하며 눈치만 살피였다. 식사가 끝나고 삼촌어머니가 부엌에서 설겆이를 시작했을 때에야 설아는 삼촌의 방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저… 삼촌, 오늘 우리 협주단에 김량남이라는 당중앙위원회 지도원동지가 나왔댔어요.》
식후담배를 맛스럽게 피우고있던 정영묵은 재털이에 담배를 비벼끄면서 설아를 넌지시 건너다보았다.
《나두 들었다. 아마 그 지도원이 협주단에 나와 살 작정인 모양이더라. 이제는 협주단이 당의 지도를 받게 되였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 너두 한번 잘해봐라,》
설아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런데 그 지도원이 우리 어머니를 아는것같아요.》
《무슨 소릴? 어떻게 너의 어머니를 안단 말이냐?》
흥심없이 부정해버리는것같았지만 정영묵의 눈은 벌써 긴장으로 굳어지고 불안에 떨고있었다.
《말을 들으니 그 지도원동지가 어릴 때 동북에서 지주집 머슴살이를 했대요. 혹시 그게 라지주집이 아닐가요? 오늘 무대에서 나를 유심히
보더니 어딘가 낯이 익다고 하는데… 삼촌두 날 처음 만났을 때 꼭
《가만…》
정영묵은 꺼멓게 죽어버린 입술을 푸들푸들 떨며 설아의 말을 밀막았다. 담배갑을 더듬어찾는 그의 손도 떨렸다. 끝내 담배갑을 쥐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좁다란 방안을 불안하게 오락가락하였다
《낯이 익다… 동북에서 살았다… 널 보고 어머니소리를 묻던?》
《아-니요. 자기가 사람을 잘못 본것같다고 하더군요.》
《누구에게? 너에게?》
다급히 묻는 정영묵의 얼굴은 밀랍처럼 창백하였다.
《그 있잖아요, 우리 협주단에 자주 내려오군 하는 중장동지…》
《로일수부국장동지한테? 그러니 곁에 함께 있었니?》
《네. …》
설아의 대답을 들은 정영묵은 창문쪽벽에 놓인 의자에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힘주어 다문 입술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소리같은것이 새여나왔다. 설아는 금방 심장이 튀여나오는것같아서 두손을 가슴노리에 꼭 모두어붙이고 삼촌의 굳어진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네가… 자리를 떠야 하겠다. 협주단 대렬부에는 내가 말해주겠으니… 아니, 이럴 땐 내가 나서지 않는것이 낫겠다. 이렇게 하자꾸나. 건강상 리유로… 아니, 그보다 지방에 있는 어떤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였다고 하는게 어떻겠니? 네가 찾아가서…》
설아는 두서없이 말을 섬기는 삼촌의 얼굴에 눈길을 박은채 도리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싫어요. 난 협주단에서 안나가겠어요. 어째서 그래야 해요?》
정영묵이 의자를 뒤로 차던지며 벌컥 일어섰다.
《이 철없는것! 아직도 모르겠니? 지금은 시작이다. 그 사람은 널 보고 너의 어머니를 얼핏 한번 생각했을뿐이야. 하지만 이제 자주 협주단에 나오느라면… 널 자주 보느라면… 자기가 잘못 보지 않았다는걸 알게 될게다. 너의 경력에 대해서도 알아보게 될게구. 그렇게 되면…》
설아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삼촌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솔직히 터놓으면 되지 않아요? 언제까지 계속 이렇게 살겠어요?》
《안된다!》
정영묵은 자기의 목소리를 가까스로 내리누르면서 안해가 설겆이를 하고있는 부엌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설아의 두팔을 꽉 그러잡았다.
《그래 넌 이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는다는게 뭘 의미하는지 알기나 하니? 첫째로, 넌 리력을 기만한것으로 된다. 둘째로, 넌 절대로 자기가 라지주의 딸이 아니라는것을 증명 못해! 알겠니?》
《삼촌이 증명하면 되지 않아요? 삼촌두 내가 락동강에서 전사한 렬사의 혈육이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정영묵은 간절한 기대가 어린 설아의 눈을 피하며 꺼지는듯한 모두숨을 내쉬였다.
《그렇게도 모르겠니? 난 너의 삼촌이다. 이런 일에선 혈육이 증인으로 나서지 못해. 나설수 있다면 너의 친아버지뿐인데… 그는 이미 전사했다. 누가 증명하겠니? 네가 라한방의 딸이 아니라는걸 누가? 내가 보기에도 넌 너무나… 어머니만 닮았다.》
창밖에서 무서운 울부짖음같은 우뢰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