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 회)

제 2 장

파도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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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가 방을 나서자 김정일동지께서는 필통에서 파란 색연필을 뽑아 《김량남-래일 아침 인민군협주단》이라고 일력장여백에 적어넣으시였다.

아까 로일수에게 당중앙위원회 일군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신것은 김량남을 념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였다. 오늘 저녁 부서성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김량남의 처벌을 해제하고 새로운 임무를 주실 작정이였다.

일감을 받고 기뻐할 김량남의 순박한 얼굴을 그려보시느라니 한시바삐 저녁이 되여주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갈마드시였다. 어린시절에 한초가 한시간이 되여달라는 시를 지어보던 그날로부터 살같이 흐르는 시간을 늘 야속하게 원망해왔으나 오늘만은 시계바늘이 무척 더디게만 움직이는것처럼 느껴지시였다. 산같이 쌓인 문건을 바쁘게 허물면서도 그이의 오후시간은 열백시간맞잡이로 흘렀다. 20시가 거의 되여서야 신인하부부장으로부터 부서성원들이 모두 모여 대기하고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몇분후에 부서성원들을 모두 데리고 식당으로 오라고 이르시고나서 자신께서 먼저 아래로 내려가시였다.

보통살림방 서너칸맞잡이의 그리 크지 않은 방에 흰 명주보를 정갈하게 씌운 둥근탁 여섯개를 들여놓은 식사실은 무척 소박하였다. 련락을 받고 기다리고있던 취사원이 국수그릇을 탁우에 벌려놓기 시작했는데 저쪽에서 출입문이 열리며 신인하부부장을 선두로 일군들이 하나둘 들어섰다. 사람들이 다 들어서고 문이 닫기였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김량남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량남동무는 왜 안보입니까?》

그이께서 식당안에 들어선 일군들을 훑어보며 물으시자 신인하부부장은 방금 들어온 문쪽을 돌아다보고나서 난처한 기색을 지었다.

《지금 저 문뒤에 서있습니다. 자기만은 부르셨을리가 없다고 하면서… 분명 이름까지 찍어서 부르셨다고 몇번이나 말했는데도 이 부부장이 잘못들은것이라고 울상까지 되는게 아니겠습니까?》

김정일동지께서는 출입문쪽으로 급히 걸어나가시였다.

문을 열자 바로 뒤에 서있던 김량남이 화닥닥 놀라서 물러섰다.

《여기서 뭘하오? 사실 우리는 다 곁들이로 얻어먹을 사람들이고 오늘 주인공은 바로 동무란 말이요. 어서 들어가기요.》

김정일동지께서는 어쩔바를 몰라 허둥거리는 김량남의 손을 잡아 국수그릇들이 놓인 탁에까지 데려다 앉히시였다.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신인하부부장이 슬그머니 일어섰다.

《저방금전에 오늘 저녁식사의 주인공은 김량남동무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인지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기억에 의하면 김량남동무의 생일은 8월…》

김정일동지께서 손을 흔들어 신인하를 눌러앉히시였다.

《아마 문건에는 8월 15일로 되여있을겁니다. 량남동무는 어려서 부모를 잃다나니 자기 생일도 몰라서 조국이 해방된 날을 생일로 삼고 살았습니다. 내가 오늘 량남동무를 주인공이라고 한것은…》

이번에는 김정일동지께서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사무실에서 격식을 차리기보다 이 자리에서 선포합시다. 나는 오늘부터 김량남동무에게 주었던 처벌을 해제한다는것을 알립니다.》

뜻밖의 말씀이였다. 한 일군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아니, 김량남동무가 무슨 처벌을 받았댔습니까?》

식탁에 둘러앉은 일군들도 서로 마주보며 수군거리였다.

몇달동안 한방에서 이마를 맞대고 일하였으나 김량남이 처벌받은 사실을 누구도 모르고 지냈던것이다.

《동무들은 아마 몰랐을수 있습니다. 나도 세포비서동무외에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댔습니다.》

어쩐지 그이의 음성이 약간 갈려드는것같았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고개를 푹 꺾고앉은 김량남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으시였다.

《이자도 말했지만 량남동무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낯설은 이역땅에서 깡통을 차고다니며 문전걸식으로 소년시절을 보냈고 좀 자라서는 지주집에 들어가 머슴살이까지 했습니다.

설음설음 해도 고아설음이 제일 크다고 하는데 그 어지러운 세상에서 량남동무가 무슨 설음인들 겪지 못했겠습니까? 난 언제인가 이 동무가 들려주던 이야기를 지금도 잊을수 없습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부엌문앞에까지 갔다가 그만 지주집아이를 울려놓는바람에 주인놈에게 매를 맞았는데 피가 터지고 눈물이 흐르는데도 문짬으로 들여다보이는 음식들에서 눈을 뗄수가 없더라고 하던…》

김량남의 어깨가 와들와들 떨었다. 울음을 씹어삼키는 소리가 가슴깊이에서 울려왔다.

그러나 그가 머리를 들었더라면 자기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보다 몇배나 진한 눈물이 그이의 눈가에서 흘러내리는것을 보았을것이다.

그이께서는 손수건을 들어 눈물을 닦으시며 푹 젖은 음성으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여기 모인 동무들치고 어려서 고생을 해보지 않은 동무들이야 어디 있겠냐만 아마 우리 량남동무만큼 고생한 동무는 별로 없을것입니다. 나도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지만 그래도 량남동무보다는 좀 낫습니다.》

그이께서는 끝내 말씀을 잇지 못하고 한참동안이나 침묵하시였다. 일군들이 여기저기서 불깃해진 눈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이런 동무에게 처벌을 주자니… 속이 떨리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손을 잡고 혁명의 길을 가야 할 동지이길래 그 아픔을 참으면서 처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처벌받은 사실을 동무들에게만은 알려줄수가 없었습니다. 원칙에는 좀 어긋나는 일이지만 가뜩이나 마음속고생을 많이 겪은 동무가 부서에서 주눅이 들어 지낼 생각을 하니 차마 그렇게 할수가 없었습니다. 김량남동무!》

그이께서 김량남을 조용히 부르시였다.

가슴에서 끓어오른 격정을 미처 다 깨물어내지 못하고 소리를 내여 울고있던 김량남이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쥔채 겨우 일어섰다.

그이께서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를 두손으로 꽉 붙드시였다. 그리고 절절하게 말씀하시였다.

《이제는 제발 다른 과오를 범하지 마시오. 다시 잘못을 저지르면… 다시는 처벌을 줄것같지 못하오. 동무에게 또 처벌을 주느니 차라리 아주 헤여지겠소. 알겠소?》

김량남은 그이의 품에 눈물젖은 얼굴을 와락 파묻었다.

김정일동지께서도 놓치면 잃어버리기라도 할듯이 그의 어깨를 힘주어 그러안으시였다.

소박한 식사실에 격정에 넘친 박수소리가 터져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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