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 회)
제 3 장
열매는 어떻게 무르익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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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 있던 방송화가 잰걸음으로 전실로 나가더니 이어 문가에서 누군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후 기사장과 설비부기사장이 방안으로 쑥 들어왔다.
서정관은 급기야 환자다운 그럴듯한 표정을 지으며 엉거주춤 일어나 그들을 반기였다.
《누우십시오. 그러다 바람을 맞으면 어쩔려구요.》
송영숙이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는 정의성과 정옥이 차례로 눈인사를 한 다음 서정관에게 좀 어떤가고 물었다.
그가 조금 머뭇거리자 방송화가 대신 나서며 며칠째 고열에 시달리다가 지난밤부터 조금 나아졌다고 대답하였다.
송영숙은 동정어린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자네도 이젠 늙었구만, 감기로 며칠씩 이불헤염치는걸 보니… 어쨌든 안됐네, 인차 와보지 못해서…》
최금천이 들고온 과일꾸레미를 한켠에 놓으며 푸접좋게 말했다. 소꿉친구의 그 말에 서정관은 히죽이 웃었다.
그가 인사치레로 공장소식을 몇마디 묻는 사이에 방송화는 무슨 환송연이라도 차리려는듯 맥주니 탄산단물이니 그리고 빵이며 과일을 잔뜩 차려들고 방안에 들어왔다. 그는 사람들에게 맥주며 탄산단물을 부어준 다음 송영숙에게도 친절히 권하였다.
송영숙은 례의를 지켜 탄산수를 조금 마시였다. 그가 고뿌를 내려놓자 방송화는 빵이며 과일을 더 권했다.
《공장일도 바쁠텐데 이렇게 찾아와주시니 고마운 마음을 뭐라구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녀자의 몸으로 큰 일, 작은 일 다 걷어안구 뛰여다니자니 오죽 바쁘시겠나요? 하두 능력있구 실무가 높으니까 감당해나가지요.》
꿀같이 달디단 그의 말을 곁에서 귀동냥해 들은 정의성의 온몸은 삽시에 오싹해졌다.
그에게는 앞뒤가 다른 처남댁의 뻔뻔스러운 말과 신속한 감정변화가 신기하기도 하고 욱 치미는 구토감까지 자아냈다.
하지만 송영숙은 빙그레 웃으며 겸손하게 말했다.
《제가 뭐 특별히 잘하는건 아니예요. 누구에게든 그런 사업을 맡기면 다 해낼수 있답니다.》
잠시후 송영숙과 최금천은 바쁜 일이 있어서 그만 가보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친절한 안주인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다음 서정관에게 치료를 잘 받으라고 이른 다음 집에서 나왔다.
정의성도 그들의 뒤를 따라 집을 나섰다.
《이젠 저 집에 다니지 마오. 절대루!》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의성은 안해에게 한마디 내던졌다.
정옥은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걸었다.
그는 남편의 불쾌한 마음을 충분히 리해하였다.
이미전부터 오빠네를 전염병환자처럼 께름하게 생각하며 간격을 두고 경계하였던 남편이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방송화와 말장단치는것을 늘 못마땅해하였다.
처음에는 그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였던 정옥이지만 점차 남편의 눈으로 오빠네를 살펴보니 결코 틀린 견해가 아니였다.
정옥은 방송화의 폭포같은 인정과 꿀같은 말에 끌려서 오빠의 집에 자주 다녔지만 험담을 잘하고 앞뒤가 다른것을 보고는 매번 환멸을 느끼였다. 사람을 앞에 놓고 손바닥 뒤집듯 올려추고 내리깎을 때 보면 당장 뛰쳐나가고싶었다. 그러나 오빠를 생각해서 웃으며 지내였다.
형님때문에 남편과 오빠의 사이가 멀어지는것은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그런데 오늘 보니 량주가 꼭같았다.
지금도 정옥은 오빠에 대한 야속한 마음을 안고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안해의 마음을 헤아려본 정의성은 더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음날 정의성은 소금밭이끼수송조와 함께 제염소로 떠났다.
그들이 타고갈 차는 대형화물자동차였다.
《정기사두 가오? 그것 참 좋게 됐구만.》
운전사는 처켠친척인 정의성을 보고 벌쭉거리였다. 정의성과 소금밭이끼를 수송하는 한달동안 함께 생활하게 된것이 기쁜 모양이였다.
남편을 바래우려고 운수직장에까지 나온 서정옥은 길동무가 괜찮다고 상글상글 웃었다.
정의성은 안해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들어오겠으니 그동안 호동관리를 책임적으로 해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기사장동지나 소장동지를 찾아가서 의논하오.》
그는 벌써 두번째로 같은 말을 하였다.
《근심마세요. 당신이 하라는대로 하겠으니까요.》
정옥은 정옥이대로 추운 겨울날 제염소로 떠나는 남편이 감기라도 걸릴가봐 근심이였다.
어느덧 정의성은 제대군인청년 두명과 함께 운전칸에 올랐다. 뒤켠에 침대가 있는 자동차여서 모두 운전칸에 오를수 있었다.
《몸조심하세요.》
서정옥은 자동차가 움씰하자 운전칸을 올려다보며 당부하였다. 정의성은 약간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운수직장 정문을 벗어나 얼마쯤 달리던 자동차는 배합먹이직장앞에서 다시 멎었다.
큰길옆에 방옥화가 나와있었다.
《왜 그래?》
운전사가 창유리를 내리고 멋없이 큰소리로 물었다.
그러거나말거나 방옥화는 보리빵같이 둥실한 얼굴에 웃음을 담고 어서 내려오라고 손을 까딱까딱하였다. 겉으로는 시답지 않은척 해도 운전사는 발동을 끄고 고분고분 차에서 내렸다.
그는 안해의 뒤를 따라 배합먹이직장 접수실로 스적스적 따라들어갔다. 한동안이 지나서야 그는 자동차에 올랐다. 별로 불쾌한 기색은 아니였다.
《아주머니가 왜 그럽니까?》
자동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하자 곱슬머리카락이 털모자밑으로 삐여져나와 귀염성스러워보이는 한 청년이 호기심을 담고 물어보았다.
《내의 하나 더 입으라구 성화여서… 감기 걸리문 야단이라나?》
운전사는 왼손으로 솜옷앞자락을 슬슬 문대며 씨물 웃었다.
곱슬머리는 그제야 의문이 풀리는지 싱긋 웃었다.
《운전사동진 아주머니한테 꼼짝 못하는것같애요?》
목이 성큼한 옆의 청년이 또 물었다.
총각들에게는 남편과 안해들의 세계가 모두 신기하고 호기심이 동하는 모양이다.
먼 운행길을 심심치 않게 보내려는 생각인지도 몰랐다.
두쌍의 크고작은 눈동자는 운전사를 지켜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운전사는 픽 코웃음을 쳤다.
《우리 처가집 방가네 피줄엔 맘씨 무던한 녀자는 반쪽두 없다니까. 하나같이 왕드살이요. 살집이 많은것만큼 말두 많구 욕심두 많지. 안그렇소? 정기사?》
운전사는 방가네와 연줄이 있는 정의성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몸집이 크고 살집좋은 안해를 상스러운 말로 묘사했다.
절제가 강하고 매정스러울만치 단정한 정의성에게는 그런 거칠고 비문화적인 말이 몹시 불쾌하였다.
그는 눈이 쌓인 도로를 바라보며 못들은척 외면하였다.
자동차는 대한무렵의 차디찬 공기를 헤가르며 제염소를 향하여 기분좋게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