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 회)
제 2 장
인생의 봄시절은 흘러갔어도
10
(3)
호기심이 불꽃튕기는 그 눈길앞에서 송영숙은 빙긋이 웃었다.
《다 알아, 정동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두… 그리구 기사장으로서 그를 힘껏 도와주라고 하지 않겠니?
조국의 부강발전속에 개인의 발전도 있다면서 말이야.》
(조국의 부강발전속에 개인의 발전도 있다. …)
수정은 마음속으로 그 말을 곱씹었다.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였다. 수정에게는 바로 그 말속에 송영숙이라는 인간총체가 있고 그것으로 그의 삶이 추동되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송영숙과 그의 남편이 한없이 크고 아득히 높아보였다. 반면에 자기는 티끌처럼 보잘것 없고 부끄러울만큼 초췌하지 않은가.
《너 남편을 사랑하니?》
이윽고 수정은 조용히 물었다.
송영숙의 얼굴에 행복의 미소가 꽃처럼 곱게 피여났다.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난
이어 송영숙은 친근한 우정을 안고 그를 건너다보았다.
《수정아! 난 네 마음도 이 땅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길 바란다. 지금 우리 나라는 얼마나 강해졌니? 그러나 아직 생활은 어렵구 또 모든것이 부족해. 우리를 고립시키구 압살하려는 놈들의 책동은 더 심해지구… 이런 때 우리 지식인들이 과학기술의 힘으로 이 난관을 앞장에서 뚫고나가야 하지 않겠니? 그 길에서 값높은 사랑도 행복도 찾으면서 말이야.》
수정의 심장에 호소하는 송영숙의 목소리는 따뜻하면서도 절절했다.
그러나 수정의 이지러진 성격이 또다시 머리를 쳐들었다.
상대방을 주눅들게 하는 비웃음이 그의 입귀에서 흘러나왔다.
《기사장동지! 당신은 나에게 그 무슨 정치강연을 하시려나요?》
송영숙은 그만 아연실색해지고말았다. 오! 지독한 악습이여! …
하지만 자기의 태도를 흐트리지 않았다.
《아니! 난 기사장이 아니라 공민적인 량심으로 말하는거야!》
송영숙의 근엄한 태도앞에서 수정은 인츰 부끄러움을 느끼였다. 그리고 본심과는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군 하는 자기
(내가 왜 자꾸만 이럴가. … 내가 이제는 따뜻한 진정도 느끼지 못하고 순결한 마음들을 우롱할만큼 야비해졌는가? …)
눈길을 떨군 그의 얼굴은 자책으로 붉어졌다. 눈에서는 금시라도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질것같았다. 그는 소리내여 울고싶었다.
실컷 울기라도 하면 자기의 이름처럼 몸도 마음도 수정같이 맑아지고 또 꽃비단처럼 아름답고 부드러워질것같았다.
누구보다 아름다와지기를 바랐고 누구보다 따뜻한 인정을 바랐건만 독신녀성의 자존심으로 지금껏 남모르는 괴로움을 비웃음과 오연한 태도속에 가리우고 살아온 그가 아니였던가.
수정의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알고있는 송영숙은 정을 담아 그의 손을 따뜻이 감싸쥐였다.
《수정아! 우리 함께 개인적인 모든걸 나라의 부강발전을 위해 다 바치자. 응? 그 길에서 녀성의 사랑도 행복도 찾으면서 말이야. 난 네가 내 마음을 다 리해하리라고 믿어.》
그의 눈빛과 목소리는 변함없이 뜨겁고 절절하였다. 그리고 거역할수 없는 사랑의 힘이 넘치도록 흐르고있었다.
수정은 말이 없었다. 대답대신 송영숙의 손만 꼭 쥐였다.
얼마후 수정은 눈길을 들었다.
《영숙아! 내 언제부터 너에게 사죄하고싶었는데… 난 사실 너와 의성동무에게 죄를 지었어.》
《죄를? 그게 뭔데?》
깊은 자책과 속죄가 담겨진 수정의 목소리와 눈빛앞에서 송영숙은 의아해졌다.
《물론 넌 가정생활에서 더 바랄것없이 행복할거야.
하지만 난 이따금 너와 의성동무를 볼 때마다 죄의식을 느끼군 한단다. 두사람이 결합되지 못한것이 나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때문에… 왜냐면 내가 그때 의성동무에게 거짓말을 했기때문이야.》
《?!》
송영숙의 눈가에서 의혹과 호기심이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수정은 그의 눈길을 외면하면서 자초지종을 말했다.
《네가 닭공장 지배인으로 금방 임명되였을 때였어. 그때 난 출판물관리국에 출장갔다가 길가에서 우연히 의성동물 만났단다.
그 동문 오래간만이라면서 무척 반가워하더구나.
하지만 난 그 동무가 너를 배반했다는걸 알구 너대신 복수하려구 생각했단다.
그래서 네가 처녀로 있다는걸 뻔히 알면서두 멋쟁이미남자와 결혼을 했다구 거짓말을 했구나. 결혼을 한 다음엔 남편이 어느 중앙기관으로 소환될거라구 하늘만큼 과장해서 말이야. 그때 내가 거짓말을 안했더라면 …》
수정은 깊은 리해와 용서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그를 보며 송영숙은 빙그레 웃었다.
《수정아! 그런 생각 말아. 네가 그러지 않았어도 그 동문 나와 운명을 같이할 사람이 아니였어. …
사실 그때엔 나두 괴로움에 잠 못들면서 그를 무섭게 저주했단다.
이 공장에 와서 의성동물 다시 만났을 때에도 증오심이 되살아나더구나.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어. 물론 우리 경아 아버지의 충고도 있었지만 그날의 괴로움이 나를 더욱더 분발하게 했구…》
한동안 그들은 자기 생각에 잠겨 그린듯이 앉아있었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가고있었다.
어느덧 그들은 대학시절처럼 한이불속에 나란히 누워 조용조용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추억은 그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즐거운 봄날인가 비오는 가을인가
기쁨과 슬픔이 엇갈려있어도
추억은 아름다운 내 생의 메아리
그들의 눈앞에는 불밝은 배움의 창가에서 지식의 탑을 쌓아가던 학창시절과 생산실습의 나날들이 어제런듯 흘러갔다.
인생의 봄언덕에서 끝없는 희망을 읊조리던 못 잊을 그 나날들이 떠올라 송영숙의 눈앞은 뿌옇게 흐려왔다.
차수정은 흰눈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왔던 그 시절과 때묻어 얼룩지고 이지러진 오늘의 못난 자기의 모습을 통분하고 아픈 마음으로 그려보았다.
그의 노래는 이따금 끊어지기도 하였지만 흐느끼면서도 그냥그냥 노래를 불렀다.
…
노래는 또다시 지을수 있어도
추억은 다시 못 짓는 내 심장의 메아리
오늘은 어제를 즐겁게 추억하고
래일은 오늘을 기쁘게 추억하리
흘러간 나날은 다시 오지 않거니
오늘의 한걸음을 값있게 새겨가리
꿈많고 웃음많던 그 시절과 흘러가고흘러갈 래일을 그려보며 그들은 오래도록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