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 회)
제 2 장
인생의 봄시절은 흘러갔어도
10
(1)
휴식날 저녁 송영숙은 차수정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수정은 반가와서 어쩔줄 몰라하더니 곧 빈정거렸다.
《기사장동지가 오늘은 웬일이시나요? 무슨 일루 전화까지…》
송영숙은 이죽거리는 수정의 얼굴이 떠올라 빙긋 웃었다.
《오늘이 휴식날인걸 잊었니? 그래 너의 집에 놀러 가려구 해, 우리 경아를 데리구.》
그는 감질이 나서 머루눈을 반짝이며 엉뎅이를 달싹거리는 딸애의 머리를 한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 오겠니? 정말?》
수정은 곱씹어묻더니 그만에야 빨리 오라고 숨가쁘게 독촉했다. 항상 인정이 그리워 몸살을 앓는 수정이였다.
송수화기를 통해 차수정의 목소리를 들은 백상익은 빙긋빙긋 웃었다.
그러나 문춘실은 혀를 찼다.
《에그! 가엾어라! 얼매 적적하구 외로울가, 젊은 나이에…》
수정이네 집에 가져갈 남새빵을 해놓은 그는 무엇인가 더 보낼것이 없나 해서 부엌을 오락가락했다.
혼자 있으면 입맛이 더 없다면서 풋마늘을 넣고 담근 멸치식혜와 깨잎 절인것을 그릇에 담으며 문춘실은 또다시 혀를 찼다.
송영숙은 어머니가 꾸려주는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남편에게 수정이네 집에서 하루밤 자겠다고 말한 다음 딸애와 함께 집을 나섰다.
큰길에 나서자 경아는 머리에 꽂은 딸기방울을 흔들며 깡충깡충 뛰였다. 이따금 탁아소에 찾아와 안아주기도 하고 간식이랑 놀이감이랑 사다주는 수정을 큰엄마라고 부르며 따르는 그 애는 너무 좋아 춤이라도 출듯 했다.
송영숙은 딸애의 걸음에 보조를 맞추며 천천히 걸었다.
문득 수정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임신했다지? 부럽구나. … 참! 이번에 아이를 낳으면 경아는 내가 데려다 키우겠어, 내 자식처럼… 반대없지?》
(오죽이나 자식이 그리웠으면…)
생각할수록 차수정이 측은하기 그지없었다.
송영숙은 동창생으로서가 아니라 녀성으로서 오늘의 수정이를 누구보다 깊이 리해하였다. 그
그때 송영숙에게는 웃음도 노래도 없었다. 그는 녀성이기 전에 말하는 기계처럼 사업과 연구에만 몰두했었다.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룬 다음에야 키워주고 내세워준 어머니조국에 대한 보답의 마음과 우리의 모든것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되찾고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연구를 하였었다.
송영숙은 차수정의 이지러진 마음도 이 땅에 대한 불타는 사랑과 정으로 가득채워 그가 사회와 가정을 위해 녀성으로서, 공민으로서 자기의 의무를 다하도록 이끌어주리라 마음다졌다.
그들이 마당에 들어서자 수정은 춤추듯이 달려나와 경아를 얼싸안았다.
《아유! 우리 경아 왔구나! 요걸 그저…》
수정은 경아를 껴안고 그냥 볼을 부볐다.
송영숙은 그에게 들고온 꾸레미를 안겨주었다.
《오늘은 대학시절을 추억하면서 너와 함께 자려구 왔어. 자! 이건 네가 좋아하는 남새빵! 이거면 아마 우리 셋은 배가 터질지두 몰라.》
송영숙의 말에 수정은 까르르- 웃었다.
아직도 따끈따끈한 남새빵과 반찬감들을 보고서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들은 한순간에 꿈많고 웃음많고 노래도 많았던 녀학생시절로 되돌아갔다.
잠시후 그들은 밥상에 마주앉았다.
문득 수정이 깔끔해진 눈길을 쳐들었다.
《솔직히 말해봐! 너두 당비서동지와 방인화부인님께서 파견한 가정문제해결의 특사는 아닐테지? 응?!》
그는 비웃으며 빈정거렸다. 그의 입귀는 보기싫게 실그러졌다.
송영숙은 그만 기가 차서 흘겨보았다.
《이 독설쟁이! 만약 그렇다면 어쩔셈이야?》
그는 눈살이 꼿꼿해서 대들었다.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물었다.
(너 어쩌면 이다지도 이지러졌니? 어제날의 그 모습은 어디 가고… 입가의 고운 꽃잎은 또 어떡하구…)
표정이 풍부한 그의 크고 그윽한 눈가에 씌여진 마음속 글줄을 읽은 차수정은 그제야 빙긋 웃었다. 예전대로 입가에 꽃잎이 곱게 피여났다.
그들은 다시 처녀시절로 돌아갔다.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구름우에 오른듯 기분이 들뜬 그들은 즐거웠던 대학시절과 소조생활의 나날들을 추억하였다.
눈앞에는 지식의 바다를 종횡무진하면서 향학열로 가슴불태우던 그시절이 어제런듯 떠올랐다. 마음은 하냥 즐거워졌다.
대학도서실의 쌍둥이열성독자로 나란히 사진찍던 일, 시험공부를 위해 깊은 밤 기숙사복도에 나와 공식과 단어들을 암송하던 일, 즐거웠던 답사와 견학의 나날들…
어느해인가 묘향산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남새빵을 사려고 몰래 어느 식당에 들어갔다가 뻐스를 놓칠번 했던 일을 끄집어낸 수정이가 먼저 웃음보따리를 터쳤다.
둘이 함께 어디 갔다가 늦었는가고 묻는 제대군인소대장의 물음에 차마 식당이라고 말할수 없어서 상점에 들렸다온다고 혀아래소리를 했던 그들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상점에서 남새빵을 팔던가고 묻는 바람에 그들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항상 꺼리낌없이 신랄하게 대꾸하던 수정이조차 꿀먹은 벙어리가 되였던 그때 일을 돌이켜보며 두 녀인은 배를 그러안고 대굴대굴 굴었다.
《그때가 어제같은데 우리도 이젠 중년나이가 되였구나. …》
수정이 문득 쓸쓸한 어조로 말하면서 시무룩이 웃었다.
송영숙은 말없이 잠자는 딸애의 베개를 고쳐 베여주었다. 자기에게 관심을 돌리지 않고 저희들끼리만 얘기한다고 킁킁거리던 아이는 한켠에 누워 꿈나라로 간지 오래였다.
차수정은 창가림을 드리운 창문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넌 후회 없겠지? 나에 비하면야 넌 얼마나 높이 발전했니?》
《발전?》 송영숙이 조용히 되물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에도 수정은 지금처럼 발전에 대하여 말했었다.
송영숙은 따뜻한 우정이 담겨진 목소리로 말했다.
《수정아! 넌 처음 나를 만났을 때도 발전했다구 말했지? … 난 발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 그건 직위의 높이에 있는것이 아니라 나라의 부강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가에 달려있다구 말이야. 이게 바로 우리 시대 인간들의 진정한 발전이 아닐가?》
《?…》
수정은 얼핏 눈길을 들었다. 그러나 인츰 다시 떨구었다.
그는 송영숙의 말을 곱씹어 새겨보았다.
(직위의 높이에 있는것이 아니라 나라의 부강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가에 달려있다. …)
되새겨볼수록 큰 의미가 담겨진 말이였다. 그리고 무엇인가 큰 사명감을 안겨주는 말이기도 하였다.
수정의 마음은 점차 돌덩이를 안은듯 무거워졌다. 자기가 지금껏 해놓은 일이 너무도 없다는 자책감이 들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