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 회)
제 2 장
인생의 봄시절은 흘러갔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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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녀인은 호기심이 가득찬 눈길로 그 청년이 어떤가고 다시 물었다.
송영숙의 얼굴은 저도 모르게 달아올랐다.
(이 녀인이 혹시 의성동무의 형수가 아닐가? …)
녀인의 눈길이 자기를 지켜보고있다는것을 느낀 송영숙은 차창밖을 내다보며 재능도 있고 열정도 있는 좋은 청년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녀인의 얼굴에 함박꽃이 피여났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진 않았다니까.》
이윽고 녀인은 흥그러워진 기분으로 속마음을 터놓았다.
《사실은 그 총각을 우리 사위루 삼자구 해요. 나한테 무역회사 경리원을 하는 외동딸이 있는데 아들삼아 사위삼아 데리구 살자는거요.》
《?!》
《총각네 부모들과는 오래전부터 가깝게 지내던 사인데 총각두 우리 딸을 무척 마음들어하는것같아요.》
순간 송영숙은 눈앞이 아뜩해옴을 느끼였다. 눈앞마저 캄캄해졌다.
《그… 래요?》
그는 가까스로 이렇게 물었다.
제 기분에 들뜬 녀인은 활짝 웃으며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우리 집은 연구소에서 그닥 멀지 않아요. 올가을엔 잔치를 하려구 하는데 그땐 처녀두 놀러오라요. 아무렴 잘 아는 사인데 뭐라나요?》
녀인의 말에 송영숙은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윽고 그는 피곤이 몰린듯 의자등받이에 기대여 눈을 감았다. 왈칵 울음이 솟구치는것을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결혼… 결혼식… 아!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지금껏 소식 한장 보내지 않았구나. 난 그런줄도 모르고…)
송영숙은 뼈가 부서지는듯한 아픔을 참으려고 모지름을 썼다. 그러나 인츰 머리를 저었다.
(아니야! 의성동문 그렇게 쉽게 약속을 저버릴 사람이 아니야! …)
그때로부터 몇달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온종일 현장에서 일하다가 합숙에 돌아오니 뜻밖에도 언니가 와있었다.
《언니!》
송영숙은 너무 기뻐 언니의 손을 꼭 잡고 놓지 못했다. 마음이 괴롭고 쓸쓸할 때 언니가 찾아온것이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다.
구역인민병원 의사로 일하면서 얼마전에 경공업대학을 졸업하고 편직공장 기사로 일하는 한 청년과 결혼한 송은숙은 동생의 마음을 살뜰히 위로해주었다. 그날 밤 그는 가방에서 사진 한장을 꺼내여 동생에게 내보였다. 양복차림의 젊은 청년이 사진속에서 올려다보고있었다.
《언니! 이 사람은 누군데? …》
송영숙은 얼른 사진을 내려놓으며 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언니는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참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수산관리국에서 부원으로 일하는 총각이야. 너의 아저씨가 잘 아는 사람의 동생인데 집안도 괜찮구 또 앞으로 크게 발전할 청년이더구나. 그래서 너와 맞세우자고 하는데… 어때?》
그제야 언니가 기별없이 찾아온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되였다.
그는 사진을 언니앞에 쑥 밀어놓았다.
송은숙의 얼굴엔 일순 서운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이윽고 유순한 눈매로 동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영숙아! 너 아직 정의성이를 기다리는건 아닐테지? 응?》
언니의 물음에 송영숙은 대답대신 눈길을 떨구었다.
송은숙은 사진을 가방에 넣으며 차근히 말을 이었다.
《내 이 말은 하지 말자고 했는데… 사실 난 너를 위해 정의성이네 연구소에 몇번이나 찾아갔더랬어. 헌데 문제는 네가 기다릴만 한 사람이 못된다는거야. … 그 사람은 인츰 잔치를 한다더구나.》
잠시후 정의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수산관리국 청년과 혼사를 맺는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우리야 중학교를 졸업하구선 늘쌍 헤여져살았는데 이제부터라도 모여살자꾸나,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말이야. 여기가 아니면 연구를 못하겠니? 이번 걸음에 나와 함께 떠나자꾸나.》
언니의 권고는 살뜰하고도 절절했다.
그러나 송영숙은 고집스럽게 머리를 저었다. 그는 천연바위에 자기의 말마디를 정으로 새겨넣듯 또박또박 말했다.
《언니! 난 그 누구와의 사랑때문에 여기 남은게 아니야. 그건 나의 리상이였구… 또… 내 인생의 목표였기때문이야.》
그의 말은 길지 않았다.
다음날 그는 서운한 마음을 안고 떠나는 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니! 날 리해해줘. 난 앞으로두 절대 후회하지 않을거야. …》
언니를 바래우고 들어온 다음에야 그는 합숙방 침대우에 몸을 던지고 오래동안 흐느꼈다. 배반당한 괴로움으로 가슴은 찢기고 터진듯 아팠다.
꺼질줄 모르는 증오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것은 그 다음날부터였다.
그날부터 처녀의 얼굴에서 웃음은 영영 사라져버렸다. 명랑하고 발랄하던 처녀는 하루밤새 생각많은 녀인으로 변하였고 그의 크고 정기도는 눈에서는 록록치 않는 빛발이 번뜩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오로지 사업과 연구밖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정의성에게서 소식이 날아온것은 그가 공장을 떠난지 반년이 가까와오던 어느날이였다.
공장접수원녀인에게서 그의 편지를 받아드는 순간부터 송영숙의 가슴은 무섭게 높뛰기 시작하였다. 그 편지가 채칵채칵 예리한 초침소리를 울리는 시한탄처럼 느껴졌던것이다.
합숙방에 들어온 송영숙은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었다.
《영숙동무! 그동안 잘있었소? 동무는 오늘도 잊을수 없는 그 닭공장에서 현장기사로 일하겠지요?
동무가 애타게 기다리고있는줄 너무도 잘 알면서도 좋은 소식을 보낼수 없어서 하루 또 하루 미루다가 오늘에야 펜을 들었습니다.
그때 동무와 헤여져 연구소에 올라오니 나에게는 이미 다른 연구과제가 정해져있더군요.
사실 난 동무와의 약속을 지켜 닭공장으로 다시 내려가겠다고 일군들을 찾아다니며 몇번이나 졸랐습니다. 하지만 모든것이 뜻대로 되지 않더구만요. 괴로운 일은 그것뿐이 아니였습니다. …
더 큰 난관은 우리 집에서도 기다리고있었소. 다름아니라 부모님들이 한 처녀를 며느리감으로 정해놓고 나를 기다리고있었던겁니다.
나는 무섭게 항의하였소. 며칠동안 동창생들의 집과 또 맏형네 집을 오가면서 집에는 아예 들어가지도 않았지요. …
얼마후에야 나는 영숙동무와 나
영숙동무! 〈큐리부부〉는 한갖 리상입니다. … 나는 가금학계의 거목이 되려는 우리 두사람에겐 반드시 헌신적인 부사수, 다시말해서 헌신적인 방조자가 필요하다는것을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
송영숙은 잠시 편지에서 눈길을 떼였다. 또다시 가슴이 와짝 저려들며 비틀리운듯 아파났다. 한동안이 지나서야 그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금 편지의 글줄을 더듬어나갔다.
《나는 확신합니다. 동무의 총명한 두뇌와 열렬한 탐구심은 한생토록 나라의 가금업발전에 바쳐지게 되리라는것을, 세상을 놀래울 연구성과로 학계의 찬연한 별이 되리라는것을. …
가금학에 한생을 바치려는 나의 결심 또한 변함이 없습니다. …
영숙동무, 우리 비록 한가정을 이루지 못해도 벌써 그 시절에 약속한대로 나라의 가금업발전을 위한 길을 끝까지 걸어갑시다. 동무의 사업과 생활에서…》
편지는 떨어져 발치에서 딩굴었다.
(배반자! … 배반자…)
송영숙은 편지를 내려다보며 쓰거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두볼로는 뜨거운것이 줄줄 흘러내리고있었다. …
(그러니 그때… 부모들이 내세운 처녀가 바로 정옥이란 말인가. …)
송영숙은 곧 머리를 저었다. 그런것같지는 않았다. 지금에 와서 그렇다한들 또 어떻단 말인가. 다만 정의성이 바라던대로 훌륭한 방조자를 만난것만은 사실이였다. 성실하고 알뜰한 서정옥이야말로 헌신적인 방조자가 아니겠는가. …
송영숙은 새끼오리를 싣고온 자동차의 경적소리를 듣고 생각에서 깨여났다. 그는 자동차가 멎어선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이렇게 마음다졌다.
(이제는 더이상 지나간 일을 생각지 말자! 저 멀리 흘러간 어제가 아니라 래일을 위해 더 열심히, 더 즐겁게 살자! …)
그의 생각을 긍정하듯 새끼오리의 울음소리가 즐겁게 울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