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 회)
제 2 장
인생의 봄시절은 흘러갔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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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작 정의성이 찾아왔을 때는 언제 그랬던가싶었다. 그는 제법 막내딸의 나들이를 바래주는 친정어머니처럼 바다에서 지켜야 할 주의사항에 대하여 차근차근 강조하면서 그들을 바래주었다.
《영숙아! 정동무 허릴 꼭 안아라. 절대 놓으면 안돼!》
그들이 탄 오토바이는 바다를 향하여 질풍같이 내달렸다.
바다가의 하루는 참으로 즐거웠다.
그들은 아이들처럼 동심에 잠겨 흰 파도를 따라 뛰여다니기도 하고 해당화 곱게 피여난 백사장에 나란히 앉아 푸른 물결 춤추는 바다를 바라보며 노래도 불렀다.
바다가에 노을이 피여날무렵 그들은 조개를 넣은 어죽도 끓였다. 솔나무그늘아래서 모락모락 피여오르던 하얀 연기…
《난 앞으로도 영숙동무가 해주는 식사를 하고싶구만.》
송영숙이 떠주는 따끈따끈한 어죽을 받으며 정의성이 의미있는 눈길로 말했다. 그 말에 처녀는 쑥스러운 웃음만 머금었다.
《영숙동문 앞으로 소조생활을 마치면 어떻게 할 결심이요?》
식사를 마치고 모래불에 나란히 앉았을 때 정의성이 물었다.
《나야 가금학을 배웠으니 그저 그 부문에서 일해야지요.》
《그래 동문 연구소에 가려는거요?》
그는 진지한 눈길로 물었다.
그의 물음을 들으며 송영숙은 그가 바다가로 온것이 바로 이런 문제를 토의하고싶어서였다는것을 깨달았다.
《연구소엔 가지 않겠어요. 연구를 해두 현실에서 하자는거예요. 요즈음엔 닭공장에 아예 남을 생각도 해본답니다.》
《닭공장에?》
정의성은 어지간히 놀란듯 처녀를 한동안 건너다보았다. 그는 잠시 자기 생각에 잠겨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해서야 감심한 어조로 말했다.
《동문 확실히 현실적이면서 현명한 생각을 하였소. 그리구… 동무가 닭공장에 남겠다니 나도 아예 여기에 남고싶은 생각이 나는구만. 그땐 날 받아주겠소?》
그의 물음에 송영숙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참! 받구 안받구야 기업소에서 하는 일 아니나요?》
처녀의 령리하고 기지있는 대답에 정의성은 머리를 젖히고 하하 큰소리로 웃었다. 잠시후 그는 다시 정색해졌다.
《영숙동무! 우리 약속합시다. 나라의 가금업발전을 위한 길에 영원한 길동무가 되자는걸 말이요. 어떻소?》
송영숙의 눈은 다감한 빛이 어려 유난히 반짝이였다.
처녀는 크게 머리를 끄덕이였다.
《좋아요! 난 찬성이예요!》
《그럼 약속하기요, 자!》
정의성은 오른손을 쑥 내밀었다.
처녀는 주저없이 손을 내밀고 그와 손을 맞잡았다.
그의 크고 그윽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정의성은 은근히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오래동안 놓지 않았다. 청년의 손은 억세고 뜨거웠다.
송영숙은 어쩐지 그의 눈을 마주보기가 두려웠다. 그는 자기의 손을 비틀어뽑았다. 그리고는 실컷 다투고난것처럼 시무룩한 얼굴로 약간 돌아앉았다. …
《그래 사랑을 약속했니? … 안했니? … 그럼 어떻게 했니? 응?》
그날 저녁 차수정은 꺼리낌없이 꼬치꼬치 캐여물었다.
송영숙은 곱게 흘겨보았다.
《너두 참! … 그 동문 그저 가금학을 위한 길에 영원한 길동무가 되자고만 했어. 그다음엔 정말이야, 아무것두 없었어.》
그의 대답에 수정은 우스워죽겠노라면서 배를 그러안고 돌아갔다.
《호호… 그런 약속이 아니면 뭐가 또 필요해? 응? 결국 너두 맞도장을 찍었다는거지?》
그는 또다시 까륵까륵 웃음보를 터뜨렸다. 이윽고 그는 두손벽을 짝소리나게 마주쳤다.
《난 찬성이야! 너흰 앞으로 큐리부부가 될거야.》
(큐리부부!)
송영숙은 마음속으로 불러보았다. 그의 가슴은 세차게 울렁거렸다. 처녀는 큰 날개를 퍼덕이며 가금학의 푸른 하늘을 향해 더 높이, 더 빨리, 더 힘차게 날으고싶었다. 노래를 불러도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목이 쉬도록 부르고싶었다. 일을 해도 온몸을 불태우며 값있고 보람찬 일을 더 많이 하고싶었다.
진정 사랑은 무궁무진한 힘과 무쇠도 단숨에 녹여버릴 열을 그리고 하늘을 날으는 지혜가 샘솟게 하는 원동력이였다.
바다가에서 돌아온 다음날부터 송영숙은 당분간 덮어버렸던 실험일지를 다시 펼치였다. 그는 동물성성장촉진제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고 대담하게 고려식물성성장촉진제를 만들어내리라 마음다졌다.
(무독성과 효과성이 높고 원료원천이 풍부한 약재들로 가금의 성장을 촉진시킬수 있는 고려식물성성장촉진제를 기어이 만들어내리라! …)
며칠후 송영숙은 정의성에게 자기의 결심을 터놓았다.
《난 래일부터 한달가량 약초채취에 나가려구 해요. 우리 나라에 흔한 고려약재들로 새로운 고려식물성성장촉진제를 만들 결심이거던요. 제 생각이 어때요?》
처녀는 눈동자를 빛내며 총각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자기 결심의 가치를 알고싶었던것이다.
《고려식물성성장촉진제라… 좋구만! 괜찮아!》
정의성은 탄복에 겨운 얼굴로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열렬한 지지를 받은 송영숙은 그만 너무 기뻐 아이처럼 손벽치며 깡충깡충 뛰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윽고 그는 언제부터 품고있던 생각을 터놓았다.
《의성동무! 우리 함께 공동연구를 하는게 어때요?》
송영숙은 열정적인 눈빛으로 물었다.
청맑은 그 목소리에서 《우리》는 자못 친근하게 울렸다.
《공동연구?!》
뜻밖의 물음에 정의성의 눈은 커졌다.
그를 바라보며 송영숙은 들놀이라도 약속하듯 즐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리 두사람의 지혜를 합친다면 하나의 크고 훌륭한 열매를 딸게 아니나요?》
처녀의 눈빛에서는 마를줄 모르는 열정과 창조의 샘이 마냥 솟구쳐오르고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더없이 열렬하고 정답게 울렸다.
강렬한 호소와 절절한 기대가 담겨진 그 눈빛앞에서 정의성은 잠시 머뭇거리였다.
《나야 이미 하고있는 연구가 있어서…》
그는 말끝을 여물구지 못했다. 잠시후 그는 이렇게 물었다.
《영숙동무! 먼길 가는 사람에겐 조급성이 금물이 아닐가? 난 동무가 지나친 정열로 온몸을 순간에 불태워버릴가봐 근심이요.》
그의 말은 따뜻하면서도 충고적이였다.
송영숙의 마음은 어쩐지 서운했다. 하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근심마세요. 쉬염쉬염 걸어갈테니까요.》
그는 방그스름히 웃으며 즐겁게 말했다. 그리고 못다한 말을 그 누군가의 시조로 대신했다.
나비야 청산가자
벌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날 저물면
꽃에서 자고 가자
꽃이 푸대접하면
잎에서 자고 가자
다음날 송영숙은 혼자서 약초채취를 떠났다.
그리고 계획대로 한달만에 많은 약초를 이고지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