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 회)
제 2 장
파도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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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류는 오래동안 힘과 정의를 다같이 갈망해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정의에는 힘이 없었고 힘에는 정의가 없었다. 하여 백성을 위한다는 선각자들과 애국자들은 항상 단두대에서 단명을 마치였고 힘을 가진자들은 누구라할것없이 인민을 유린하고 억압하여왔다.
우리 인민은
인간을 위한 사상, 인간을 위한 정치, 인간을 위한 온갖 사랑과 정이 바로 이 힘속에서 태여나고 지켜졌으며 꽃피여났다. 그때부터 조선의
혁명가들과 인민들은
어제 오후에 제강소로 떠나실 때 금봉휴양소에도 꼭 들려야 하겠다고 이미 작정을 하신
누구도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마당에는 뜻밖에도 누군가가 우뚝 서서 아침운동을 하고있었다. 훤칠하게 벗어진 이마에 한손을 올려놓고 다른
한손으로 허리를 받친채 온몸을 활등처럼 죽신죽신 제끼고있던 중년사나이가
30대중엽에 《시대의 탄생》이라는 력작을 써내여 문단을 놀래운 작가 석윤기였다.
창작의 고행때문인지 이제 갓 마흔에 들어섰는데도 이마가 헐끔하게 벗어지고 흰 머리카락이 성글게 섞여돈다.
차에서 내리신
《눈을 보니 몹시 피로했군요. 또 밤을 새웠습니까?》
《글쎄… 어떤 작가들은 새벽에 글줄이 쏟아진다는데 저는 밤사냥군이 되여놔서 해가 뜨는걸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새벽마다 졸음을 쫓는 운동을 하고있습니다.》
《밤을 샜으면 해가 중천에 뜨더라두 눈을 좀 붙여야지요. 석선생은 몸도 약한편인데 수면이 부족하면 심장이 나빠질수 있습니다.》
석윤기는 당에서 이렇게 좋은 창작조건을 보장해주어 밤을 새면서 일해도 힘든줄을 모르겠다고 진정을 담아 말씀올렸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갑자기 오셨습니까?》
《어제까지 〈1932년〉의 초고를 다 보았습니다. 이쪽으로 나왔던김에 필자인 권선생을 만나 의견을 좀 나누어볼가 해서 왔습니다.》
석윤기는 난처한 기색을 지었다.
《권선생은 작품을 올려보낸 다음부터 불면증이 와서 밤새 뒤치락거리다가 새벽에야 풋잠에 들군 하는데 아마 금방 곯아떨어졌을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오신걸 알면 아마…》
꿈속같은 물안개가 포실포실 피여오르는 정갈한 못에서는 새벽잠을 깬 잔고기들이 촐딱거리며 뛰여올랐다.
《제 방금 제강소에 나가 로동자동무들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다른것은 다 필요없고 영화 한편만 보내달라던 로동자들…
《이런 사람들에게
석윤기는 당황하여 어쩔줄을 몰랐다.
《언감 그럴리야 있습니까? 다만 이 세상의 수많은 명화가들이
《나는 오늘 우리 로동계급의 그 목소리에서 1930년대에
석윤기는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여 몇번 등뒤에 대고 털더니 수첩우에 불이 일게
《혁명전통이라고 할 때 그것은 시원과 계승이라는 두 요소를 가지고있습니다. 나는 제강소로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옳습니다!》
격하여 부르짖던 작가가 입을 감싸쥐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도 장편소설 〈시대의 탄생〉에서 항일빨찌산들을
그대로 닮아가는 전사들의 성격발전과정을 그리느라고 하였지만 세철이나 보패가 그런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작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해 만년필을 끼워쥔 손으로 번듯한 이마를 자꾸만 쓸어올리였다.
《석선생까지 그렇게 흥분하니 작품의 절반은 성공한셈입니다. 나는 여기로 오면서 그러한 인물의 원형도 생각해보았고 이야기줄거리도 좀 세워보았습니다. 이제 평양에 가면 영화문학작가들과 론의해보자고 합니다.》
수첩우에 일사불란으로 달리던 작가의 펜이 뚝 멈춰섰다. 석윤기의 길쑴한 얼굴이 해쓱하게 질리였다.
《왜 그럽니까? 어디 편치 않습니까?》
《아닙니다. 사실 저는 방금 하신 말씀이 저에게 주시는 과제인줄 알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소설가더러 영화문학까지 쓰라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선생이야 지금 아름찬 창작과제를 수행하고있지 않습니까.》
석윤기는 무엇인가 잠시 생각하는듯싶더니 옷매무시를 바로잡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우리 작가들속에 좋은 글감은 먼저 들은 사람이 임자라는 륜리도 있습니다만 저는 단지 그래서만이 아니라 방금전까지 저에게 틔워주신 그 창작적흥분을 고스란히 작품에 옮겨놓지 않고서는 견딜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원형도 있고 이야기줄거리도 벌써 세우셨다니 만약 저의 미숙한 점을 허물하시지 않는다면… 그 영화문학을 우리에게 맡겨주셨으면 합니다.》
창작적흥분, 이것은 누구도 막을수 없는 작가의 권리인것이다.
《좋습니다. 그럼 그 작품은 석선생에게 전적으로 맡기겠습니다. 참, 내가 아직 원형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안했지요? 이야기인즉 안영애라고… 전쟁때 최현동지네 군단에서 싸운 한 간호원에 대한것인데…》
고요가 깃든 새벽대기속에
쩜벙거리며 물면우로 뛰여오르던 잔물고기들도 이 귀중한 고요를 깨치기 저어하듯 물속으로 잦아들었다. 물안개가 말짱 걷힌 물면우에 빨간 노을빛이 퍼져나갔다. 상쾌한 아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