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 회)
제 2 장
파도소리
7
(3)
리오송정치위원과 정치지도원은 다음날 1시가 되여서야 섬으로 돌아왔다. 가설부두에 나와있던 군인들을 쫓다싶이 하여 병실천막안에 재우고 사관장과 둘이 우등불을 피우며 가설부두옆에서 기다리고있던 최진성은 우들우들 떨리는 손으로 정치위원이 던지는 삭줄을 붙들었다. 군복이 물에 흠뻑 젖어 몸이 푹 줄어들어보이는 정치위원이 먼저 내리고 뒤따라 정치지도원이 내렸다. 얼마나 자맥질을 했는지 우등불에 비친 창백한 얼굴이 온통 부르르 떨고있는것같았다.
《중대장동무… 전마선이 있는델 찾아서… 부표를 띄웠습니다. 다행히 물이 얼마… 깊지 않더군요. 난… 아무래도 헤염을 좀 더 배워야 할것…》
사관장의 팔에 겨우 의지하여 떨리는 입을 가까스로 우무적거리던 정치지도원이 의식을 잃고 맥없이 늘어졌다. 리오송정치위원이 급히 정치지도원의 관자노리며 인증을 눌러보더니 최진성에게 소리쳤다.
《오한이 나서 기절한것같소. 어서 우등불옆에 눕히오. 그리구 사관장동문 얼른 가서 더운물에 사탕가루를 좀 풀어오라구.》
사관장이 식당천막쪽으로 달려가자 진성은 우등불가까이에 반듯이 눕혀놓은 정치지도원을 붙들고 손바닥과 두팔을 힘껏 주물렀다. 사관장이 가져온 사탕물을 먹이고 한참이나 더 몸을 주물러서야 정치지도원의 숨결이 고르로와지고 창백하던 얼굴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퍼져갔다. 그러나 몹시 피곤했던지 두어번 눈을 떴다가 따스한 불가에 누운채로 잠들어버렸다. 곁에서 그 모양을 바라보고있던 리오송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진성에게로 돌아앉았다.
《동무네가 정치지도원복이 있소. 사람이 진국이거던.》
진성은 정치위원을 마주볼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아 고개만 푹 내리꺾었다. 아직 물이 채 마르지 않은 군복을 어깨우에 대충 걸친 리오송은 진성의 맞은켠에 무릎을 꺾고앉으면서 우등불너머로 이쪽을 건너다보았다.
《듣자니 인민군협주단에 멋있는 애인이 있대?》
심장이 후두둑 뛰여올랐다. 이런 마당에서 갑자기 설아의 이야기가 나오다니… 애인? 내가 그를 애인이라고 부를수 있다면…
나는 도대체 그의 무엇인가?
《처녀가 편지를 했는데두 회답을 아직 안했다면서? 아버지문제때문에 떳떳치 못하다는건가?》
정치지도원의 팔을 주무르던 진성의 두손이 무춤 굳어졌다.
불이 탁탁 튀는 우등불에 담배불을 붙여문 리오송은 맛스럽게 연기를 내뿜으며 어딘가 먼곳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오래간만에 불을 마주하고 앉으니 갑자기 소년중대시절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는군. 그게 아마 1937년 여름이던가. … 장백현 7도구근방에서 숙영할 때 있은 일인데… 두익동무랑 조명선이랑 우리또래 대원들이 하루종일 비를 맞으며 행군을 하고나서 우등불주위에 따바리를 틀고 누웠더랬지. 비에 젖은 신발은 이렇게 신은채로 우등불쪽에 내놓고 말이야. 그땐 숙영하는 법이 그랬어. 한참 누워있노라니 신발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면서 김이 문문 피여오르는데 꼭 찜가마안에 발을 들여넣은 기분이야. 이리뒤척 저리뒤척하면서 잠을 청해보자고 꿈적거려봐야 발이 자꾸 조여들어와서 견딜수가 있나? 끝내 참지 못하구 우리 소년중대 사무장하던 전희동무에게 들이댔지, 딱 한번만 신발을 벗고 자게 해달라구. 전희동무가 성격이 맵짜긴 해두 인정은 퍽 물렀어. 하긴 빨찌산녀대원들이야 누구나 인정이 많았지만… 허허허… 끝내 신발을 벗구 누웠는데… 난 세상에 신발을 벗고 자는것이 그렇게 편하고 하늘을 날아가는것같은 기분인줄은 처음 알았구만. 나서부터 신발을 신고 자다가 그날 처음 벗은 기분이였지. 그렇게 붕 뜬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가 깨여보니 전희동무가 우등불곁에 서서 혼자 울고있더군. 이상한건 우리모두의 발에 신발이 신겨져있더란 말이야.》
최진성은 언젠가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에서 그런 대목을 본 기억이 났다. 책으로 볼 때는 그저 그런가부다했는데 투사의 이야기를 직접 듣노라니 생동한 화폭으로 안겨오는것같았다.
…
신발을 벗고 자던 소년중대원들의 발에 신발을 몸소 신겨주신분은 숙영지들을 돌아보시던
이 소년들이 어떤 소년들인가, 우리는 장차 조국의 운명을 두어깨에 걸머지고 나아갈 일군들을 키우고있다, 나라고 왜 어린 대원들에게 단 하루만이라도 신발을 벗고 자라는 명령을 내리고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이 애들을 어떤 고난과 시련도 두려움없이 뚫고나아갈수 있는 백절불굴의 혁명가로 키워야 한다, 오늘은 비록 가슴이 아프지만 강하게 요구도 하고 잘못되는 일이 있으면 책망도 하고 때로는 처벌까지 적용해야 한다,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것은 그저 그들이 하자는대로 하는것이 아니라 그들이 훌륭한 혁명가로 자라도록 가르치며 이끌어주는것이다. …
《그날 우린 전희동무주위에 모여서서 함께 울었소. 비판받은게 서러워서가 아니였소. 신발을 벗지 말고 자라고 하신
리오송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멀리 푸름한 동이 터오는 수평선을 향하여 뒤짐을 지고 섰다. 진성이도 정치위원의 눈길을 따라 수평선을 향해 고개를 돌리였다. 문득 여기 바다기슭에 앉아있으면 해가 솟는것을 제일먼저 볼수 있다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갈마들었다.
이른아침 여기서 해가 솟을 때에도 저 멀리 서쪽의 깊은 산골에서는 캄캄한 새벽일것이다.
리오송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이야기하였다.
《동무 아버지도
이 순간에 최진성은 평양에서
나는 진정 그 말씀의 심원한 뜻을 너무도 모르고 산것이 아닌가.
《맥을 놓지 말라》고 하시던 그 말씀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하신 부탁이 아니였을가.
신념…
최진성은 정치위원이 남긴 이 말의 의미를 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처벌받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지 않는것으로 아들의 도리를 다한다고 생각했고 설아를 잊어버리는것으로 나의 진정한 사랑을 그에게 바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것이 인간으로서 내가 할수 있는 최대의 희생이라고 생각했다. 이 희생의 근저에는 혁명앞에 죄를 지은 아버지에 대한 련민과 동정이 자리잡고있었다.
혁명가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믿음, 우리
아버지때문에 고민하고 방황하지도 않았을것이다.
처벌받은것이 괴로와서가 아니라
바로 그런 사람들속에 우리 아버지도 있는것이다.
나는 지금껏 아버지앞에 떳떳하려는 자각뿐이였지 아버지와 같은 투사들의 그 정신세계를 물려받을 생각을 못했다. 군사적자질이나 성격같은것은 애써 닮으려고 하면서도 그 모든 훌륭한것의 원천으로 되는 가장 귀중한것이 무엇인가를 미처 모르고 살아온것같다. 그러고보면 저 정치지도원은 이 최진성이보다 얼마나 멀리 앞서가고있는가.
고깔모양으로 쌓아놓은 장작개비들을 통채로 덮은 불길은 려명전야의 진한 어둠을 찢어발기며 펄럭펄럭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