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 회)

제 2 장

파도소리

6

(3)

 

얼마쯤 시간이 흘렀는지 컴컴한 하늘에서 마른 우뢰가 몇번 울더니 갑작비가 쏟아져내렸다. 가을비여서인지 발은 굵지 않아도 퍼그나 차거웠다. 그래도 훈련은 계속되였다. 처녀선생도 선자리에서 꼬박 비를 맞았다. 석철룡의 머리속에는 훈련을 빨리 끝내야 저 선생이 비를 맞지 않겠는데 하는 생각이 갈마들었지만 왜서인지 심장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구령, 구령…

비방울… 비방울…

이 지독한 심리전에서 먼저 손을 든것은 석철룡이였다. 처녀를 보지 않으려고 등을 돌려대느라 애썼지만 그 처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병사들의 눈길까지 피할수는 없었다. 석철룡은 끝내 중대를 헤치게 하고 처녀선생을 만났다.

비에 홈빡 젖은 녀선생은 저녁이 으슥해서야 학생들을 데리고 중대를 떠났다. 성이 났는지 대기병이 준비해놓은 밤배낭만은 한사코 떨구어두고 갔다. 다음날 철룡은 영범이와 함께 그 밤배낭을 지고 학교에 찾아갔다. 그것은 석철룡이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처녀에게 제발로 찾아간 걸음이였다. 구실도 그럴듯했거니와 다시한번 보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처녀때문이였다. 녀선생은 예상외로 석철룡을 반갑게 맞이하더니 자기네 교실로 석철룡과 진영범을 이끌었다. 체구가 우람한 편인 석철룡은 야들야들한 처녀의 손에 끌려가다싶이하면서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어제는 정말 안됐습니다. 제가 좀 너무한것같습니다.》

석철룡이 먼저 사죄를 하자 처녀는 얼굴을 붉혔다.

《아닙니다. 제가 애들 교양을… 사실 애들은 군대동무들이 훈련하는걸 훔쳐보는 재미에 산에 올라갔댔다더군요.》

철룡은 별스레 얼굴이 뻣뻣해오는감을 느끼였다.

《그거 엄중한데요? 군사비밀을 내탐하러 온줄 알았으면 영창에 넣는건데… 난 또 허줄한 밤도적인가 했더니…》

처녀가 자기의 롱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면 어쩌나 하고 억지로 웃음을 쥐여붙이느라 했는데도 왜서인지 얼굴은 자꾸만 흉하게 이그러졌다.

《그럼 저도 영창에 들어가야 하겠군요. 전 어제 비를 맞으면서 한시간동안이나 군사비밀을 내탐했는데요.…》

둘은 순식간에 허물없는 사이가 된듯 한참동안 마주보며 웃었다.

《난 정말 군대동무들이 군복을 비에 다 적시면서 그렇게 훈련하는줄은… 부끄럽지만 난 어제 그 비를 맞고와서 밤새 신음소릴 냈답니다.》

처녀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리자 귀염성스러운 볼우물이 패였다. 이때 보면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원이 아니라 그자신이 철부지녀학생인듯싶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명절이 되면 그 처녀의 학급학생전원이 중대에 위문편지를 보내왔다. 석철룡은 이따금 장작이며 첫물산과일들을 학생들에게 보내주군 하였다. 물론 위문편지는 꼭꼭 처녀교원이 가지고왔고 《장작운반대》는 항상 석철룡이 인솔하였다. 시간과 함께 그들의 정은 석박골처럼 깊어갔다.

그러던 둘사이가 물싸움때문에 튀여버렸다. 석철룡은 금시 넘쳐서 흘러내릴것만 같던 자기들의 사랑을 자기 손으로 쌓아올린 보뚝이 가로막게 될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

오빠에게 손찌검을 한것은 참을수 있지만 농장마을로 내려오는 수로를 막아 뚝을 쌓은것은 용서할수 없다고 서리차게 꾸짖던 처녀…

마을사람들앞에 진심으로 사죄하기 전에는 자기에게 더는 찾아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돌아갔지만 석철룡은 처녀의 말을 좇지 않았다.

자존심이 허락치 않아서만도 아니고 자기의 잘못을 몰라서도 아니였다. 별을 떼우고 비판을 받으면서 자기가 얼마나 어망처망한 망나니짓을 저질렀는가를 뼈저리게 느낀 석철룡이다. 그러나 처녀와의 사랑때문에 머리를 숙였다는 말이 날것같아 마을사람들에게 사죄하는것만은 왼고개를 틀어버렸다. 어찌 보면 순수한 사나이의 자존심때문인것같기도 했지만 한켠으로는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하는 울뚝밸도 없지 않았다.

나는 명령을 집행했다. 과오를 범한것도 사실이고 처벌을 받은것도 응당하지만 그것은 명령이 잘못되였기때문이지 명령을 집행한것 그자체는 반성할것이 없다. 군대가 명령을 흐지부지한다면 장차 싸움을 어떻게 해먹겠는가. 옳고 그른것, 쉽고 어려운것, 유리한것과 불리한것을 갈라서 명령을 집행한다면 목숨은 어떻게 내댄단 말인가. 명령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은 군인의 첫째가는 본분이고 사명이다. 그런데 그 안경쟁이정치지도원은 중대의 이런 지휘체계에 계속 갈구리를 건다. 이번에 ㄷ형강을 싣고 들어가서 단단히 한번 배지기를 떠야 하겠다, 지휘관의 명령은 이러쿵저러쿵 시비할것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집행해놓고보아야 한다고.

석철룡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가까이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진영범이 어둠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왔구만. 노가 그 자리에 있던가?》

《예, 그물사리밑에 깔아놓은걸 꺼내오긴 했는데… 일없겠습니까? 차라리 이제라도 다시 가서…》

《군대가 무슨 겁이 그렇게 많아? 일이 생기면 군대를 도와나서지 않은 그 사공령감에게 생기지 우리에게 생기겠어? 전쟁때같으면 그런 태도는 반역이야, 반역! 총포성이 없다뿐이지 지금이 전시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기는 하지만…》

영범이는 종시 미타해하는 눈치다.

《됐소. 훔쳐가는것두 아니구 두어탕 뛰구 와서 노를 도로 가져다놓으면 아무일 없겠는데 뭘. 자, 어서 싣기나 하자구.》

영범이는 어깨에 메고온 노를 모래불우에 털썩 내려놓더니 허리춤에서 무엇인가 풀어내린다. 날이 어두워 미처 보지 못했었는데 가만히 보니 뒤꼬리에 허연 박통같은것들을 데룽데룽 매달아가지고 끌고온것이였다.

《그건 또 뭐요?》

《바다가양식에 쓰는 떼통입니다.》

《떼통은 뭣에 쓰자구?》

《사공아바이말마따나 이 ㄷ형강을 배에 다 실을수야 있습니까? 절반은 배우에 싣구 절반은 끄트머리에 이 떼통을 매달아서 뒤로 끌고가자는겁니다. 이를테면 아르키메데스의 법칙을 리용해서…》

영범이는 마음이 조급해나는지 잠간사이에 ㄷ형강 몇개를 묶어서 떼통을 매달고는 전마선뒤끝에 단단히 묶어놓았다.

석철룡은 은근히 혀를 찼다. 영범이가 재간둥이는 재간둥이다.

그러지 않아도 이 전마선으로 ㄷ형강을 다 나르자면 서너탕은 해야 하겠구나 하고 속구구를 하면서 아무래도 이 밤중에 다 나르기는 틀렸다고 걱정을 했는데 언제 벌써 이런 기막힌 생각까지 해낸것이다.

한시간쯤 지나서 전마선은 한자동차분의 ㄷ형강을 더러는 배에 싣고 더러는 뒤로 끌면서 달빛이 얼른거리는 밤파도우를 미끄러져나갔다.

한껏 기분이 들뜬 석철룡의 얼굴에 선뜻한 바람이 끼얹히더니 달빛이 구름에 가리우면서 차가운 비방울이 풋풋 떨어져내렸다.

갈매기들이 불안스럽게 끽끽거리며 전마선우를 맴돌았다.

잔잔해보이던 파도가 위태롭게 늠실거리기 시작하자 노를 젓던 진영범의 얼굴이 차츰 굳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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