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 회)

제 2 장

인생의 봄시절은 흘러갔어도

3

(1)

 

새로 만든 설비들을 들여놓은 기술준비소는 명절처럼 흥성거렸다.

아침부터 지배인과 당비서가 새 설비를 보려고 찾아왔고 설비부원과 동력부원도 싱글벙글 웃으며 들락날락하였다.

오후에는 낡은 설비들을 들어내고 새 설비를 설치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기술준비소의 젊은이들은 주인들답게 새 설비를 설치하는 일에 발벗고나섰다.

《분쇄기는 저쪽으로! 천천히, 천천히… 그건 여기에 놓소.》

서정관은 오후내껏 웃옷을 벗어던지고 큰소리로 그들의 작업을 지휘하였다. 조명이 밝고 뭇시선이 집중되는 곳에서는 항상 적극적으로 뛰여다니고 목소리도 높이군 하는 그였다.

고요와 정적만 깃들던 기술준비소가 하루밤새 벌컥 뒤집혀졌다. 조심스럽게 울리던 전화종소리도 여느때없이 소리를 높이며 쉴새없이 따르릉거렸고 조심히 여닫기던 출입문들도 객주집문처럼 닫기 바쁘게 또 열리였다.

누구보다 정숙을 바라던 유상훈박사의 얼굴에도 싱긋싱긋 웃음이 떠실려 가셔질줄 몰랐다.

새 설비를 보고 누구보다 기뻐한것은 다름아닌 시험호동관리공들이였다. 정옥이와 봄순은 호동을 통채로 비워둘수 없어서 차례로 달려나왔다. 나와서는 쇠밥이 묻은 폭쇄기와 혼합기를 감개무량하여 만져보고 쓸어보고 하였다.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도록 절구질을 하던 일이 이제는 지나간 일로 된것이 목이 메도록 감격스러웠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기사장에 대한 고마움이 샘처럼 솟아올랐다.

《언니!》

리봄순은 새끼오리먹이를 주려고 소독수에 손을 씻으며 서정옥을 불렀다.

《좀전에 설비부기사장동지가 사람들앞에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기사장동진 기계에두 박사요. 간단치 않소.〉이러지 않겠나요, 호호호… 그리구 지배인동지에게 시험호동을 잘 도와줘야 첨가제연구가 빨리 성공할수 있다구 당부했대요.》

처녀의 얼굴은 그 어떤 긍지감으로 발가우리 상기되였다.

일솜씨 알뜰하고 책임성이 높아서 시험호동관리공으로 왔지만 다른 관리공들처럼 고기생산계획을 넘쳐 수행해서 평가받는 일도 없이 첨가제가 성공할 때까지 그저 묵묵히 일해야만 한다고 은근히 섭섭한 마음을 품고있던 처녀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기사장이 며칠에 한번씩 찾아오고 또 새 설비들까지 마련해주는것이 마치도 자기자신에 대한 높은 평가처럼 여겨졌다.

그럴수록 처녀는 일을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정옥의 마음도 봄순이 못지 않았다. 오히려 감격스럽고 고마운 마음은 그보다 몇배나 더했다.

《정말 우리 기사장동진 쉽지 않은 일군이야.》

정옥은 복스러운 얼굴에 진정을 담고 말하였다. 그는 래일이라도 기사장을 만나면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먹이운반삭도에 새끼오리먹이를 푹푹 퍼담았다.

삭도를 밀고 호동안쪽놀이장에 들어서는 정옥을 본 새끼오리들이 삐용 삐삐용 정답게 노래를 부르며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정옥은 길게 놓인 구유에 먹이를 듬뿍듬뿍 담아주면서 타이르듯 조용조용 노래를 불렀다.

 

우리모두 손씻고 곱게곱게 앉자요

맛있게 밥먹고 어서어서 크자요

 

그 노래는 탁아소보육원들이 아이들의 밥시간에 부르는 노래였다. 아들애를 키울 때 탁아소에 다니면서 배워둔 그 노래를 정옥은 오리에게 먹이를 줄 때마다 부르군 하였다.

천진하다 할만큼 명랑발랄한 그는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을 즐겨 노래로 표현하군 하였다.

정의성은 새 설비가 마련된것을 보고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는 안해와 봄순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도 방금전에 새 설비를 설치하는 일을 돕다가 먹이시간이 되여 들어온것이다.

그는 지금 안해와 봄순이를 바라보면서 송영숙이를 생각하였다.

그도 설비부기사장을 통하여 송영숙이 새 설비를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마음쓰고 시간과 품을 들였는가를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송영숙의 수고에 대하여 안해나 봄순이처럼 그렇게까지 감사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기사장으로서 자기 사업을 하였을뿐이다. 그리고 모든것이 그의 사업성과로 되는 동시에 아래사람들의 환심까지 사게 된것이다. 결코 정의성, 나를 돕기 위한것은 아니다. …)

이것이 정의성의 생각이였다.

그는 이미 송영숙의 눈빛에서 그것을 똑똑히 읽었던것이다.

사실 송영숙은 시험호동에 자주 찾아와 그들의 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업조건도 보장해주고있다. 더우기 제켠에서 첨가제연구와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고 즐겨 론쟁도 하군 하였다.

송영숙은 첨가제를 이루는 비타민이나 미량원소들을 수입제나 화학제가 아니라 원료원천이 풍부하고 국산화된 천연물이나 화합물로 되게 해야 한다면서 스스럼없이 말도 하였다.

수입첨가제에 없는 섬유소분해균을 발효시켜 항생물질을 대신하게 하면 좋을것이라는 의견도 주었다.

그때 정의성은 아이들처럼 환성을 지르고싶은 심정이기도 하였다.

그는 송영숙에 대하여 종종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기사장은 확실히 가금학에 대한 뛰여난 실력을 가지고있구나. …)

그러나 자기를 대하는 그의 눈길이며 태도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그 어떤 생각과 아퀴를 짓지 못한 복잡한 심리가 담겨진 눈빛이며 태도였다. 이 모든것을 느낄 때마다 정의성은 송영숙이 자기를 변함없이 증오하고있음을 온몸으로 깨닫군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리하지 못하는 자기가 도리여 가소로운 존재처럼 생각되였다. 하지만 송영숙에게 머리를 숙이고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기사장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를 저주하고 증오할것이다. 하면서도 첨가제연구를 돕는것은 첨가제에 공장의 운명이 달려있기때문이며 기사장의 의무이기때문이다. …)

《난 그 시절을 추억하려고 찾아온게 아니예요. 다만 정기사동무가 새로운 첨가제를 만든다는걸 알구 찾아왔어요.

저의 사업상… 공장에서 진행되고있는 기술적문제에 대하여 알고싶어서 말이예요. …》

시험호동에 처음으로 찾아온 날 그는 이렇게 자기의 목적에 대하여 명백하게 언명했었다. 그리고 그 말처럼 자기의 의무에 충실하고있었다.

문득 그의 눈앞에는 3대혁명소조원시절의 송영숙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용배우처럼 키가 크고 날씬하면서도 탄력있는 걸음걸이에 크고 맑은 눈매가 인상적이던 처녀대학생의 모습이였다.

그 모습은 정의성에게 송영숙과의 첫 인연을 맺게 해준 그 시절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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