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 회)

제 2 장

파도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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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평양에서의 대순환은 몇개의 고리흐름으로 나누어 볼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것은 북동무역풍에 의하여 북위 10~20°범위의 열대태평양 동부로부터 위도대를 따라 서쪽으로 흐르는 북적도해류이다. 이 거대한 해류의 한 끄트머리가 조선남해에서 급격히 북동쪽으로 허리를 꺾어 부산과 후꾸오까사이의 해협을 조급히 빠져나와서는 조선동부의 밋밋한 등어리를 어루쓸며 북상하다가 동조선만이라는 넓고 깊숙한 함정에 빠져 한동안 허우적거리고나서야 라뻬루즈해협을 통해 오호쯔크해로 밀려나간다. 일명 북서태평양해류라고 부르는 태평양에서 가장 강한 이 난류가 동조선만에서 몸부림칠 때 함흥만을 비롯한 우리 나라 근해의 크고 작은 섬들은 강한 해풍과 파도에 휩싸인다.

《해산》이라는 운명의 낭떠러지에 올라섰던 최진성의 중대가 뜻밖에도 몇달전에 중요한 진지공사임무를 받고 배낭을 풀어놓은 석도도 이러한 섬들중의 하나였다. 최진성이 정영묵의 손에서 설아의 손수건을 빼앗아쥐던 그날 독신군관침실에서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소리를 듣고 달려온 석철룡이 그 일군을 떠밀어버린것으로 하여 모두들 일이 더 험하게 번져질것으로 예견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진지공사임무를 하달하기 위하여 석박골에 내려왔던 군단장도, 광차와 레루를 비롯한 공사용 기자재들을 싣고 섬에 들어왔던 리오송정치위원도 그때의 일을 두고는 일언반구가 없었다.

단지 석도진지공사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사업인것만큼 최대의 마력을 내여 완성해야 한다고 강조했을뿐이였다. 이 진지공사의 중요성은 군관학교 최우등졸업생인 최진성이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동해안에서 수심이 가장 깊고 지리적으로 해안선의 교통이 발달한 이 지역은 적들이 상륙하기에 대단히 유리한 곳이다.

우선 동조선만의 모양이 깔때기형으로 되여있어 공격해오는 적측에서 보면 많은 화력을 좁은 지역에 밀집할수 있고 방어하는 아군측에서 보면 좁은 지역에서 넓은 사계를 가지게 된다. 만약 이러한 조건에서 적아간에 화력전을 벌린다면 깔때기의 바깥쪽에 널린 적들이 안쪽에 몰린 아군보다 우세할것은 자명한 리치였다. 석도는 이 깔때기의 중심에 박힌 불침의 함선과도 같다고 말할수 있었다. 그 어떤 강력한 화력에도 견딜수 있는 견고한 진지와 사거리가 길고 격파력이 강한 포화력을 갖춘다면 이 섬은 동조선반으로 들어오는 일체의 적함들을 격퇴할수 있었다.

반대로 이 섬이 떨어져나가면 적들의 상륙집단이 전선동부의 배후로 거침없이 들어오고 전연방어임무를 맡은 21군단은 전면포위에 들게 되는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사업이 어떻게 자기들에게 맡겨졌는지는 누구도 몰랐지만 섬에 들어온 첫날부터 군인들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군인들은 배낭을 풀어놓은 첫날부터 난생처음으로 맞아보는 바다바람과 싸우며 병영도 짓고 소금기배인 암반에 정대도 박기 시작하였다.

며칠전에는 압축기와 착암기가 도착하고 레루와 광차도 건너왔다.

광차가 섬에 올라오던 날 그것을 싣고 온 군단정치부장이 새파랗게 젊어보이는 군관도 한명 데리고왔는데 알고보니 그는 새로 배치되여오는 중대정치지도원이였다. 인민군당전원회의 확대회의가 있은 후 정치부중대장편제는 중대정치지도원편제로 바뀌였다.

녀자들처럼 해말간 살결에 이마우로 쑥 빗어넘긴 하들하들한 머리카락…

정치지도원은 군인이라기보다 금방 책상에서 일어선 대학생같았다.

군사일군도 아닌 정치일군의 몸에서 학자냄새가 좀 난다고 하여 이상할것은 없었지만 왜서인지 석철룡이 불쾌하게 생각한것은 그의 안경이였다. 늘 끼고다니는 안경은 아니고 신문이나 책을 볼 때만 꺼내들군 하는 쁠류스안경이였으나 석철룡자신의 표현을 빈다면 그 두터운 도수안경이 자기를 비롯한 군인들의 생활을 낱낱이 투시하면서 자그마한 결함도 크게 확대해보는것같아 눈에 거슬린다는것이다. 그렇게 듣고 보아서 그런지 최진성에게도 그의 안경낀 모습만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도 그 안경이 중대의 몇안되는 군관들중에서 정치지도원의 특수한 지위를 강조하는 어떤 장식물로 보이는것이였다.

이것은 석철룡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야릇한 감정이였다.

최진성은 전직관념도 있고 또 석철룡이 모든 면에서 경험이 풍부하기때문에 중대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거의나 다 그의 의견대로 하였고 철룡이자신도 그것을 응당하게 여기였다. 부중대장의 월권이 좀 차나칠 때도 없지 않았지만 따지고보면 자기 사업을 돕자고 나서는 일들이였기때문에 그닥 불쾌감을 느낀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치지도원은 달랐다.

오늘 아침도 정치지도원은 가설천막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최진성을 따로 조용히 만나자고 하더니 밑도 끝도 없이 협주단처녀에게 회답편지를 왜 안 보내는가고 묻는것이였다.

《회답을 하든말든 그런것도 동무에게 보고를 해야 하오?》

최진성의 말투는 말해놓은 당사자도 후회될만큼 거칠었지만 정치지도원은 시무룩이 웃어넘겼다.

《중대장동지에게 내 손으로 편지를 전해준지가 벌써 사흘짼데 회답을 보내지 않으니 궁금해서 물어본거지요. 어느 소설책에서 보니 처녀들이란 남자들이 너무 오래 속을 태우면 기다리지 못하고 달아나버린다고 썼더군요.

정치지도원이 설아의 편지를 가져온것은 사실이였다.

중대가 석도로 들어오면서 주소불명이 된 편지들이 군단수발소에 머물러있었는데 새로 임명된 정치지도원이 그 편지들을 모두 찾아가지고 들어왔던것이다. 그 편지들속에서 설아의 낯익은 글씨가 적힌 하얀 봉투를 알아보는 순간 진성은 그 처녀를 영영 잊어버리리라고 생각했던 자기의 결심이 얼마나 어리석은것이였는가를 뼈아프게 느꼈다.

면구스러운것도 잊고 덮치듯이 편지를 그러쥐였다. 도망치듯 바다기슭으로 달려나왔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어놓으니 예전보다 약간 흐트러진듯한 글자들이 떨리는 눈동자를 파고들었다.

《무정한 중위동지에게.》

진성은 편지의 첫 글줄을 읽는 순간 설아가 어째서 자기의 이름대신 《중위》라는 군사칭호를 썼는지 인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편지가 저의 마음을 어느만큼이나 담을수 있겠는지 가늠하지도 못하고 두서없이 쓰는것을 용서해주세요. 지금 쓰고있는 이 편지곁에는 그동안 진성동지가 보내준 두장의 편지가 나란히 놓여있어요. 하늘에서 한개 사단의 처녀들이 락하산을 타고내려도 저만은 한눈에 알아볼것같다던 편지 부모없는 저에게 아버지도 되여주고 오빠도 되여주겠다던 편지… 난생처음 들어본 그 살틀한 말들이 철모르는 처녀의 가슴을 얼마나 세차게 흔들었는지 진성동지자신은 아마 다 모를거예요.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수 없지만 녀자들에게는 아마도 그것이 끝없이 의지하고싶은 마음인가봐요. 제가 놓쳐버린 북통을 따라잡으려고 모자가 벗겨지는줄도 모르고 골짜기밑으로 달려내려가는 진성동지의 뒤모습을 눈물속에 바라보던 그때 동지의 땀젖은 어깨에 나의 연약한 마음과 앞날을 남몰래 얹어보았다는것을 저는 숨기고싶지 않아요. 의지하고싶었어요. 나의 앞날에 그렇게 놓쳐버리는 북통이 천개만개가 생긴다고 해도 진성동지가 모두 찾아줄것만 같았어요. 웃으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이것이 나의 첫 사랑이라고 믿었답니다. 동지가 보내준 편지에 사랑이라는 말이 한마디도 없는 그것자체가 진짜배기 사랑이라고까지 믿었댔지요.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가요? 나의 한생에서 아버지와도 같은분이 너는 그 사람과 어떤 관계냐?고 물었을 때 아무 대답도 할수 없었던것은…

몇번이나 동지의 편지를 뜯어보았지만 결국 우리사이엔 어떤 약속도 없고 어떤 맹세도 없었다는걸 깨달았어요. 두려웠어요. 정말이지 내 혼자 어리석은 꿈만 꾸어온것은 아닐가요? 삼촌은 저에게 진성동지를 잊어버리라고 해요. 진성동지의 가정에 대해 말해주더군요. 그러면서 진성동지와 헤여지는것이 앞으로의 저의 장래에 리롭다고묻고싶어요. 혹시 진성동지도 그런 생각때문에 협주단까지 왔다가 저를 만나지 않고 그냥 가버렸는가요? 잃어버렸던 북통 하나와 아무런 뜻도 없는 쪽지편지만 남겨놓고 말이예요. 경박하게 사랑을 애걸한다고 생각하실줄 알아요. 하지만 진성동지의 진심만은 정확히 알고싶어요. 설사 영영 잊어달라는 소식이 온다고 해도 동지의 진정을 모르고있는것보다는 마음이 한결 편할것같아요. 정설아 올림.》

편지는 이뿐이였다. 진성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모진 아픔이 손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지르르 하고 뻗쳐올랐다.

자기가 왜 지금껏 설아에게 편지를 하지 못했던가?

중대에 내려왔던 지도성원의 손에서 하얀 명주손수건이 펄럭거리던 그 순간 최진성은 자기와 설아의 사랑이 종당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는가에 대하여 상상하지 않을수 없었다. 자기들 두사람만의 세계라고 생각했던 사랑이 사회정치적관계라는 피할수 없는 그물안에 갇혀있으며 자기가 양아버지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깨끗하고 순진한 처녀의 장래에 그늘을 지어줄수밖에 없을것이라는것을 그때 비로소 깨달은것이였다. 최진성은 설아에게 자기를 잊어달라는 편지를 쓰려고 몇번이나 작정했다가 끝내 펜을 들지 못했다. 제손으로는 그런 글을 쓰기가 너무나 괴로왔다. 그래서 결심한것이 침묵을 지키자는것이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느라면 모든것은 다 자기 자리로 되돌아갈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설아라는 처녀를 몰랐고 설아 역시 자기를 몰랐던 그때처럼…

그런데 그것은 얼마나 단순하고 리기적인 생각이였던가.

처녀의 이 괴로움앞에 나는 이제 어떤 회답을 보내야 할것인가.

최진성은 처녀의 편지로 하여 무심히 대하려고 애썼던 자기자신의 운명을 두고 또다시 번거로운 고민에 빠져들었다.

사람의 인생이란 무엇인가. 진성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기가 정한 목표에 대한 지향이고 돌진이였으며 그로부터 산생되는 열정과 희열의 총체였다.

진성의 목표란 소박하게 표현하면 항일투사인 양부모들앞에 떳떳하게 살자는것이였다. 그런데 생의 거울로 비추어보던 아버지가 과오를 범하고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였다. 결국 이제 와서 진성은 등대를 잃어버린 배처럼, 불빛을 놓쳐버린 불나비처럼 허둥거리게 되였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기에게 나쁜 추억을 남겼거나 환멸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킨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다면 마음이 오히려 편할것같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히 생각해보면 아버지나 어머니는 훌륭한 사람들이였다. 그러나 그들은 수령님앞에 죄를 지었고 걱정을 끼쳐드렸다. 만약 그들의 과오가 혁명앞에 용서받을수 없는 죄악이라면 그들을 결코 저버릴수 없는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지금까지는 그들앞에 떳떳하기 위하여 남보다 앞서는것이 필요했고 그것이 긍지스러웠지만 이제는 어떤 명예와 성공도 기쁨으로 될것같지 못하였다. 아마도 인간은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존재앞에서만 생의 의미를 느끼는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설아는? 그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 사랑은 양부모와의 의리를 저버릴 때에만 손에 쥘수 있는것이였다.

머리가 둘로 쪼개지는것같은 고민을 안고 한달남짓이 흘러갔는데 그 아픈 속을 정치지도원이 자꾸만 들쑤셔놓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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