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회)

제 1 장

푸른 호수

12

(1)

 

《에구, 얼마나 배고프겠니? 어서 밥을 먹어라.》

송영숙이 집에 들어서자 외손녀를 끼고 아래목에 누워 풋잠에 들었던 문춘실이 일어났다. 그는 서둘러 부엌으로 내려갔다.

《올라가 누우세요. 참, 경아 아버진 식사했나요?》

얼핏 웃방쪽을 쳐다보며 송영숙이 물었다.

《그럼! 방금까지 텔레비죤을 보다가 올라갔다.》

저녁밥이 식을세라 가마목에 놓아두었던 문춘실은 상우에 그릇들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는 딸이 수저를 드는것을 보고서야 방안으로 올라갔다.

송영숙은 밥상에 다가앉았다. 빨간 물이 우러난 햇김치를 보니 부쩍 식욕이 동해났다. 그러나 밥을 몇술 뜨던 그는 인츰 수저를 놓았다. 저녁시간이 퍼그나 지난 뒤여서 어지간히 배가 고팠던 그였으나 정작 수저를 드니 별로 당기지 않았다.

수저를 놓고 밥상에서 물러앉고보니 문득 어머니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끼마다 딸과 사위의 입맛을 돋구어주려고 무던히도 마음쓰는 어머니였다. 어머니에게는 언제나 사업에 쫓기워 식사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자식들이 제일 큰 걱정거리였다.

그래도 사위는 무슨 음식이든 가리지 않는데 딸만은 식성이 까다로와서 항상 마음을 쓰군 하였다. 고기보다 물고기를 더 좋아하고 기름기 많고 느끼한것보다 시원한 김치를 좋아하는 송영숙이지만 국수라면 천길을 뛸 정도로 싫어했다.

사실 함경남도태생인 그의 어머니는 남달리 료리를 잘하였다. 북관녀인들이 거의가 그렇듯이 승벽심이 강하고 열정적인 그들은 자기들의 성격처럼 맵고 쩡하고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김치를 특별히 맛있게 담그었는데 낙지며 명태, 가재미를 두고 담근 식혜나 깍두기를 한번 먹어본 사람들은 두고두고 그 맛을 잊지 못해하였다.

지금도 어머니가 담근 햇김치는 시원하고 향기로왔다. 남새나 산나물찬을 특별히 좋아하는 딸을 위해 품들여 담근 김치였다.

송영숙은 어머니의 수고와 그 마음에 식사를 많이 하는것으로 보답하고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것이 안타까왔다.

그는 김치물을 한모금 마신 다음 밥상을 거두었다.

《왜? 좀더 먹지 않구?》

아닐세라 어머니의 주름많은 얼굴에 근심이 비끼였다.

《많이 먹었어요. 햇김치가 참 맛있더군요. 그저 김치가 제일이예요.》

송영숙은 빙긋이 웃어보였다. 그러나 어쩐지 억지스럽게 생각되였다.

그는 어머니가 혀를 차는 소리를 들으며 조심히 웃방으로 올라갔다.

남편은 콤퓨터에 마주앉아 열심히 자료청취를 하고있었다. 문소리에 그는 눈길을 들고 안해쪽을 돌아보았다.

《이제 들어오오?》

남편의 물음에 송영숙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직 쉬지 않았군요.》하고 동문서답하였다. 안해의 말에 백상익은 싱긋 웃었다.

《〈녀왕님〉이 침상에 드시지 않았는데 내가 먼저 자리에 들면 되겠소?》

계획사업으로 드바쁜 속에서도 언제나 안해의 사업을 헌신적으로 뒤받침해주고 떠밀어주면서도 웃음과 롱담으로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백상익이였다. 그 웃음과 롱담을 대하면 하루동안의 피곤이 다 가셔지고 새로운 의욕이 샘솟군 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남편의 그 웃음과 롱담도 송영숙의 무거워지는 마음을 가셔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번거로와지는 마음을 더 강조해주는듯 싶었다.

《어디 편치 않은 모양이구만?》

백상익은 아예 콤퓨터를 끈 다음 옷을 갈아입는 안해를 주의깊은 눈길로 지켜보았다. 자기의 웃음과 롱담을 즐겨받아들이며 곧잘 소리내여 웃군 하던 안해가 오늘은 웬일인지 잠자코 있는것이 이상스러웠다.

그는 인츰 안해의 얼굴에 한가닥의 그늘이 비낀것을 놓치지 않았다.

웬간해서는 자기 사업의 기분을 집에서 표현하지 않던 안해였는데 오늘은 여느날과 달랐다.

《무슨 일이 있었소?》

백상익은 의자에서 내려앉으며 다시 물었다.

남편의 길쑴한 얼굴에 담겨진 사려깊은 표정을 본 송영숙은 어쩐지 자기의 속마음을 툭 터놓고싶어졌다. 방금전까지만 하여도 집식구들에게 자기의 마음을 절대 내색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그였다.

더우기 남편에게 정의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여 기분을 상하게 하고싶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결심이 물먹은 모래산처럼 허물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실내복을 갈아입고 앉은 그는 남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의 크고 정기어린 눈은 여느때없이 그윽하고 헤아릴수없이 깊어보였다.

안해를 바라보는 백상익의 마음은 은근히 긴장되였다. 그 어떤 운명적인 예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하였다.

이윽고 송영숙은 한없는 리해력을 바라는 마음을 안고 조용히 말했다.

《여보! 내 언젠가 당신에게 말했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소조생활을 할 때 나의 론문을 부정했던 한 청년에 대해서 말이예요.》

안해의 말을 온몸이 귀가 되여 듣고있던 백상익은 꿈쩍 놀랐다.

새 직무를 맡고있는 안해여서 사업에서 제기되는 문제라든가 아니면 건강상문제려니 하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런데…

백상익은 결혼후 언제인가 안해에게서 그 청년에 대한 말을 들었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두사람을 리해하였다.

또한 일생을 처녀로 살겠다면서 모질게도 결혼을 반대하던 고집스러운 처녀지배인의 그 마음도 모두 리해했었다. 행복한 결혼생활로부터 타오른 사랑의 불길은 두사람의 마음속에서 정의성의 존재를 연기처럼 날려버렸다.

그런데 지금 안해는 제켠에서 정의성의 일을 꺼내는것이다.

안해의 모습을 얼핏 쳐다본 백상익은 계속하라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 공장 기술준비소에서 일하고있지 않겠나요? 공장에 와서 처음으로 현장을 돌아보면서야 알았지요. 난 그가 여기에 와있는줄 정말 몰랐어요.》

송영숙은 예상 못한 난감한 일에 부닥친듯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눈빛만은 예리하고 날카로와졌다.

안해의 모습을 지켜보던 백상익은 그만에야 싱긋 웃었다. 그는 정답게 빈정거렸다.

《그거 참 반가웠겠구만, 옛 친구를 만났으니 말이요.》

남편의 롱담에 송영숙은 꾸짖는듯한 눈길로 약간 흘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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