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 회)

제 2 장

파도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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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시계는 벌써 14시를 가리키고있었다. 대충 점심을 걸치고 부대에 나가자고 해도 시간이 빠듯했다. 마음이 바싹 조급해나서 자물쇠를 움켜쥐고 왈캉왈캉 흔들어보다가 쿵 소리가 나게 문짝에 주먹을 먹이였다.

그 소리를 듣기라도 한듯 다급한 발자국소리가 들리더니 대문이 지꿍 열리면서 빨래함지를 머리에 인 안해가 마당에 들어섰다.

산후탈이 심해서 바깥출입을 별로 하지 않는 사람이 또 우물에 나갔던 모양이다. 날씨가 풀릴 때까지만이라도 친정에 가있으라고 몇번이나 말했지만 4살짜리 아들애만 보내놓고 부둥부둥 집에 붙어앉아 자기의 뒤바라지를 하고있는것이다. 리철봉은 안해의 머리우에서 묵직한 빨래함지를 얼른 받아내리였다. 단정하던 머리카락이 이마전에 마구 흐트러져붙은 안해는 빨갛게 상기된 얼굴에 무표정한 기색을 짓고 천천히 자물쇠를 열었다. 안해는 원래 처녀시절부터 저렇게 말이 없었다.

해군대학을 졸업한 리철봉이 어느한 동해기지의 참모로 임명받고 휴가차로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였다. 동북에서 뒤늦게야 조국으로 돌아온 철봉의 어머니는 그때 어느한 군에서 녀맹위원장을 하고있었는데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던듯이 처녀의 사진을 꺼내놓았다.

《자, 봐라. 이 군을 통채로 뒤져서 찾아낸 네 색시감이다. 아버지는 조국광복회 특수회원이였구 본인은 20살에 벌써 당에 들었어. 가정래력으로 보나 본인경력으로 보나 이만한 적임자는 없을것같구나. 흠이라면 말이 좀 없는건데… 하긴 녀자는 입이 다사한게 흠이지 말이 없는게 흠되는 법은 없느니라.》

리철봉은 본인이 여기서 산다는데 같은 값이면 사진으로 선을 볼 필요가 무엇인가고 하면서 처녀를 직접 만나보겠다고 하였다.

박금월이라고 부르는 그 처녀는 군도서관 사서로 일하고있었다.

사복을 갈아입고 군도서관열람실에 들어가 독자들속에 슬그머니 끼워앉은 리철봉은 대출실 유리칸막이안에 조각처럼 앉아있는 처녀를 한겻동안이나 훔쳐보았다. 화보에 낼만한 미인은 아니였지만 이목구비가 깎아다듬은것처럼 단정하였다. 가만히 살펴보니 어머니의 말마따나 벙어리가 아닌가고 의심될만큼 말이 없는 처녀였다. 그저 직업상 책을 빌리러오는 사람에게는 《안녕하십니까?》, 돌아가는 사람에게는 《안녕히 가십시오.》가 전부였다. 리철봉은 그렇게 두마디밖에 할줄 모르는 녀자가 군관의 안해로서는 어떨지 몰라라 가정생활에서는 무척 따분할것같았다. 그러나 철봉의 생각이야 어떻든 어머니는 아들의 휴가가 끝나기도 전에 이 《두마디》를 붙들어다가 벼락잔치를 차려놓고야말았다.

박금월은 살림을 시작해서도 말보다 눈빛과 행동으로 남편을 도왔고 가정을 알뜰하게 꾸려나갔다. 리철봉도 차츰 안해와의 말없는 의사소통과 감정표현에 익숙되여갔다. 사랑은 달콤한 속삭임이라고들 하지만 오히려 소리없는 눈빛만으로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헤아리며 앞질러 행동할수 있다는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날이 갈수록 가슴쩌릿하게 느끼군 했다. 그러던 안해가 《두마디》를 넘어선것은…

《여보, 어째서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구두 가만히 앉아있어요? 난 당신이 군복을 벗구 수리공장에 내려가게 되였다구 해서만 그러는게 아니예요. 배를 넘어뜨린 장본인을 똑바로 밝혀야 할게 아니예요?》

《어떻게 밝힌단 말이요? 아무리 상소를 했댔자 종당에는 민족보위상의 책상우에 놓일판인데…》

《보위성으로 해서 안된다면 총정치국에 보고하면 되지 않아요?》

《당신은 모르면 가만있소. 지금은 정치부사업보고도 참모부를 통해서 한단 말이요… 쓸데없는 소리말고…》

《아니, 난 가만있지 않겠어요. 당신이 총참모장의 등을 믿구 어쩌구저쩌구 했다는데 난 왜 당신과 여태껏 같이 살면서두 그걸 몰랐어요? 돌아가신 시아버님이 유격구시절에 민생단으로 몰려 죽을번한 최광동지를 살려주었다는데 난 왜 여태 그런걸 몰랐는가 말이예요?》

《당신이 그건 알아 무엇하겠소? 그게 도대체 우리가 살아가는데 무슨 필요가 있는가 말이요?》

《난 필요해서 그러는게 아니예요. 당신이 집사람에게도 하지 않은 말을 여기저기 들고다녔다니 믿을수가 없어 그래요! 억울해서 그래요! 난 이걸 해명하러 가야겠어요.》

《가긴 어딜 간다는거요? 민족보위성에? 총정치국에? 아니면 이미 모든것을 다 꺼꾸로 알고있는 총참모장에게? 당신은 가야 발도 못들여놔!》

《중앙녀맹에 있는 총참모장동지의… 부인을 찾아가겠어요!》

리철봉은 안해를 붙들지 못했다.

중앙녀맹에 찾아갔던 안해가 김옥순을 만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것은 그때로부터 얼마후 배수리공장에서였다.

처벌이 해제되여 수리공장을 나서던 날 리철봉은 정문앞에서 자기를 기다리며 서있는 안해가 멀리 다른 세계에서 온 녀인처럼 느껴졌다.

오직 무언의 헤아림과 절대적인 순종, 웅심깊은 정과 두려움에 가까운 존경으로 꽉 차있던 사랑스러운 안해대신 자기의 일거수 일투족을 랭정한 눈으로 지켜보는 시험관이 찾아온것만 같았다. 물론 안해의 목소리는 이전과 같이 부드러웠고 손도 따스하였다. 이전처럼 말도 없었다.

그런데 이전에는 말이 없는 그것이 애틋한 사랑을 자아냈다면 지금은 오히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것이였다.

《수도물이 안 나오는 모양이구만.》

《…》

《그렇다고 불편한 몸에 우물까지 나갈건 뭐요? 하루이틀 빨래를 못한다고 큰일날것도 아닌데…》

안해는 아무말없이 부엌으로 나가더니 이미 준비를 해놓았던듯이 곧 밥상을 챙겨가지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군복을 그냥 입은채로 급히 수저통에 손을 가져가던 철봉은 이상한 륙감이 들어 안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름에 겨운듯한 안해의 시선이 자기의 얼굴을 향해 파들거리고있었다.

《왜 그러오? 무슨 일이 있었소?》

《결심을 내리셨어요?》

《무슨 결심?》

《동네에 소문이 자자해요. 당신이 또 과오를 범할것같다구요.》

철봉은 수저통에서 뽑아들었던 숟가락을 상우에 절컥 내려놓았다.

리철봉은 자기가 지금껏 전투함선의 안정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그 과학성과 기술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심중한 사색을 거듭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우물가 녀인들속에서 오고갔을것이 분명한 그 말이 정통을 찌른것같았다.

내가 정말 함선의 안정성때문에 심중하고있는것일가? 자기 운명의 안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저울질을 해온것은 아니고?

함선우에 대구경포를 올려놓는 문제를 두고 지난날의 《발라스트사건》을 상기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는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의식적으로 생각한적은 없지만 마음속으로는 분명 다시 되풀이하고싶지 않은 쓰라린 교훈을 두려워하였을것이다.

만약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안을 주장했다가 사고가 생기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내가 지게 될것이라고, 《발라스트사건》은 그 누군가의 모해였지만 이번에는 변명할수 없는 나의 과오로 될것이라고

아니, 아니다! 리철봉은 그것도 단호히 부정해버렸다.

나는 나의 운명을 두고 걱정한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가능성에 대하여 책임적인 발언을 하려고 했을뿐이다. 책임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쉽게 어떤 맹세도 다질수 있고 어떤 장담도 할수 있다. 그러나 실천을 전제로 하는 책임앞에서 량심을 속여서는 안된다. 불가능한것을 실천하겠다고 나서는것은 수령님앞에 무엄한 일이고 혁명앞에도 위선이다.

아무런 타산도 없이 할수 있다고 대답부터 해놓는 사람, 그래놓고는 이렇게저렇게 열성을 보이다가 종당에 가서는 할수 있는 모든것을 다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고 말하는 사람, 더우기 애초부터 결과가 좋지 않게 끝날것을 뻔히 알면서 그때 가서 적당히 대답할 말까지 미리 주머니에 쑤셔넣고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일시 충실한 사람으로 평가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만은 그럴수 없다.

수령님의 믿음에 능력이 모자라 따라서지 못할지언정 량심만은 티끌만큼도 곯지 말아야 한다. 량심만은…

리철봉은 수저를 끝내 들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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