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회)
제 1 장
푸른 호수
9
(2)
차수정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녀성의 본능대로 송영숙의 얼굴이며 차림새를 은근히 살펴보았다.
키가 크고 날씬하던 처녀시절에 비해 보기 좋게 몸이 난 송영숙은 수수한 잠바옷에 굽낮은 구두를 신었지만 첫눈에도 큰 일군답게 원숙하고
세련된 기품이 느껴졌다. 해빛에 발가우리해진 길둥근 얼굴에는 건강미가 흘렀고 크고 정기도는 눈가에는 예나지금이나 열정적인 그의 성격과 함께 자기
고상하면서도 현대감이 나게 단장한 그의 머리모양이 특별히 수정의 눈길을 끌었다. 그의 모든 아름다움의 총체인듯 숱이 많은 검은 머리는 동실한 어깨우에서 탐스러운 모양을 뽑내며 유난히 반짝거리였다.
수정은 그에게 머리단장을 어디서 했는가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그에게 자기가 경망스럽고 천박하게 보일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어떻든 송영숙의 모습은 어느모로 보나 흠잡을데 없이 품위있고 아름다왔다.
생의 활력에 넘쳐 녀성의 전성기에 살고있는 송영숙의 모습을 지켜보는 차수정의 마음은 저도 모르게 울적해졌다.
《참! 친정어머니와 함께 산다지? 어머닌 건강하시니? 이젠 퍼그나 늙으셨겠구나.》
수정은 호기심을 안고 연방 물었다.
《그리구… 남편은 군인민위원회에 다닌다던데… 보나마나 훌륭한 사람이겠지? 아이는? … 딸이라구? 곱게 생겼니? 이름은… 경아? 아유! 어쩌면… 널 닮았겠구나. 얼마나 좋겠니?》
수정의 호기심과 부러움은 끝이 없을것같았다.
그를 보며 송영숙은 빙긋이 웃었다.
《우리 집에 놀러 와. 우리 경아 아버지도 반가워할거야. 어머니랑 나랑 네 소릴 많이 했으니까. 그리구 너야 우리 어머니와 친하지 않니? 너를 만났다면 무척 기뻐하실게야.》
《그래, 나도 막 보고싶구나. 너의 어머니가 담근 김치맛도 보고싶구…》
대학시절과 소조생활을 할 때 막내딸을 만나려고 찾아오군 하던 몸매작고 인정많은 송영숙의 어머니를 그려보며 수정은 선이 고운 입술을 오무리며 소리없이 웃었다. 그의 입가에 꽃잎이 곱게 피여났다.
못잊을 추억을 안겨주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송영숙의 마음은 더더욱 즐겁기만 하였다. 그는 따뜻한 우정이 담겨진 얼굴로 다정하게 물었다.
《참, 너의 집은 어디냐? 가정생활은 행복할테지. 응?》
송영숙의 물음에 차수정의 꽃잎같던 입술이 갑자기 떨어진 호박꽃처럼 찌그러졌다.
《행복?》
그는 시답지 않은 어조로 되물었다. 하더니 곧 머리를 끄덕끄덕하였다.
《그래그래, 행복하지 뭐. 아마 나처럼 행복한 녀자도 쉽지 않을거야. 두번째에도 기딱 막히게 멋있는 사람을 만났더랬으니까. …》
쓰겁두루한 그의 웃음은 자기의 말이 그와 정반대라는것을 직관적으로 표현하고있었다.
송영숙은 일순 당황해졌다. 그는 자기가 지금 낯모를 녀인과 마주서있는듯한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꾸밈없이 명랑하고 지나치리만큼 솔직하던 수정의 옛모습은 간데 없고 이지러지고 뒤틀린 성격의 낯선 녀인만이 앞에 있었던것이다. 괴벽스러워진 마음의 반영인듯 꽃잎같은 입술도 그냥 실그러져있었다.
《아니, 그럼 넌…》
송영숙은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거렸다.
《흠, 그렇게 됐어.》
수정은 또다시 시답지 않은 웃음을 지었다. 송영숙은 더욱더 당황해졌다.
그의 뇌리엔 문득 며칠전 지배인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오리털을 분해하여 털단백질먹이를 만들고있는 종금직장 수의사와 출판물보급원인 그 안해의 탈가에 대하여 걱정하던 말이였다.
(그러니 그 수의사의 안해가 바로…)
송영숙에게는 오래간만에 이루어진 동창생과의 반가운 상봉이 그의 불행한 가정생활때문에 색채가 어두워지는것이 못내 가슴아팠다.
더우기 고기생산을 높이기 위하여 남모르는 탐구를 이어가고있는 재능있는 한 기술자가 가정문제때문에 사업에서 지장을 받고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인츰 화제를 돌리였다.
《공장 출판물보급원이라니 앞으로 날 많이 도와줘. 가금부문의 도서가 나오면 선참 보여줄수 있겠지?》
《아무렴! 기사장님한테야 우선적으로 가져다드려야지 뭐.》
차수정의 롱담과 진담이 섞인 말에 송영숙은 빙긋이 웃었다.
《이 공장에도 모범독서가들이 많겠지?》
《그래, 지독한 열성독자들이 몇명 된단다.》
수정은 머리를 끄덕이며 몇몇 사람들의 이름을 꼽아나갔다. 하더니 인츰 머리를 쳐들었다. 그는 송영숙을 빤히 쳐다보았다.
《참! 너 정의성동무가 우리 공장에 온걸 아니? 대학연구소에 있다가 몇년전에 여기루 왔단다. 지금 기술준비소에 있어.》
그는 투시해보는듯한 눈길로 곧추 쳐다보았다.
송영숙은 그만 무안해져서 서둘러 눈길을 떨구었다.
《응, 알고있어.》
《만나봤니?》
차수정은 집요하게 따져물었다. 송영숙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만났댔어. 시험호동과 현장에서…》
《그-래? 정동문 반가워하겠지?》
《반가워하기야 뭘… 헌데 난… 그에 대한 말을 더 하고싶지 않구나. 난 이미 그를 잊은지 오랬으니까. 그러니…》
그는 사정하듯 조용히 말하였다.
차수정은 송영숙의 눈가에서 파릿한 불꽃이 튕겼다가 사라지는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순간 수정은 머리를 끄떡이며 눈길을 떨구었다.
《난 사실…》하고 그는 무슨 말인가 꺼낼듯 하다가 그만두었다.
동시에 그의 얼굴에서 어떤 복잡한 심리가 씌여졌다가 사라졌다.
《넌 지금 어디로 가니? 도서보급하러 가는 길이겠지?》
송영숙이 물었다. 수정은 서글픈 웃음을 지으며 머리만 끄덕이였다.
《그럼 래일이라도 우리 집에 놀러 와. 그리구 이젠 한공장사람인데 자주 만나자. 대학시절처럼 말이야. 응?》
송영숙은 다짐을 받듯 말했다.
수정은 또다시 머리를 끄덕이였다.
이윽고 그들은 다정히 잡았던 손을 놓고 헤여졌다.
자전거를 끌고가는 송영숙의 마음은 무엇을 잃은듯 허전하였다. 그의 눈앞엔 차수정의 여윈 얼굴이 자꾸만 확대되여 안겨왔다. 대학시절 그리도 매혹적이던 모습은 허울뿐이고 지금은 주근깨투성이의 여위고 이지러진 얼굴만 남아있었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아 더 완성되고 또 변화발전되기도 한다. 하지만 몇년사이에 그렇게도 달라질수 있을가. …
그 모든 변화가 불행한 가정생활이 가져다준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송영숙의 마음은 또다시 쑤신듯 아파났다.
(복잡한 인간문제들이 얽히고얽히여 생산과 기술발전에 영향을 주고있구나. …)
그는 언제부터 털단백질먹이를 연구하고있는 종금직장 수의사를 만나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하루이틀 미루어온 자기
그는 끌고가던 자전거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퍼그나 멀리 간줄 알았던 수정은 그들이 헤여진 바로 그 자리에 그냥 서서 자기쪽을 지켜보고있었다.
그들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수정은 방금전과 같이 복잡한 심리가 담겨졌던 얼굴에 억지스런 웃음을 짓고 답례하듯 손을 쳐들어보이고는 홱 돌아서서 걸어갔다.
송영숙은 수정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호- 한숨을 내쉬였다. 몰라보게 달라진 그의 모습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문득 그가 무슨 말인가 꺼내려고 갑자르다가 그만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는데… 그게 뭘가? …)
송영숙은 차수정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에야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