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 회)

제 1 장

눈내리는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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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당에서 승용차의 발동소리가 울리자 김량남은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서둘러 재털이에 비벼끄고 창문쪽으로 달려갔다.

어둠속으로 내려다보아서인지 형태와 색갈은 잘 알리지 않았지만 퍽 귀에 익은 발동소리로 보아 김정일동지께서 타신 승용차가 분명하였다.

퇴근시간이 다되여 승용차에 오르시는것을 보면 영화촬영소나 대극장에 나가실것이다. 행여나 하고 자기를 찾으시기만 기다리던 김량남은 졸지에 무릎이 매시시해났다. 오늘도 또 혼자 나가시는구나. …

방안을 꽉 채운 담배연기에 눈이 쓰려나고 눈물이 찔끔 돋는다.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까지 텅 빈 사무실을 지키고앉아 담배곽만 퍽퍽 료정내고있는지가 벌써 나흘째나 되였다. 오늘도 가방에 담배 두곽을 넣고 나왔는데 이제는 석대밖에 남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피바다가극단과 영화촬영소에서는 련 나흘째 사업보고전화도 걸려오지 않는다. 책상우에 매일같이 쌓이던 새 작품의 총보들이며, 예술단들의 사업일력과 계획서들이며, 예술인들속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건이며 자료들도 다 어디로 날라가는지 출입문 한번 열리지 않았다. 아침마다 신문을 배달하러 들어오는 도서실 사서가 오늘 아침에야 겨우 《요즘 량남지도원동진 호강을 하십니다. 늘 극장에 나가 살더니 방에 앉아 무슨 도를 닦습니까?》하고 싱거운 소리 한마디를 남기고 간것이 요 며칠사이에 처음으로 들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김량남은 멀리 승용차의 불빛이 사라지자 제자리로 터벌터벌 걸어와 덜컥 소리가 나게 걸상에 주저앉았다. 경기장사건이 있은 날 그이로부터 호된 추궁을 받고 나올 때만 해도 하루나 이틀이면 노여움이 풀리시겠지 하고 기대를 품어보았다. 그러나 차츰 날이 가고 시간이 흐르자 김량남은 그이께서 자기를 다시 찾으실 날이 한달후일지 일년후일지 아니면 영영 자기를 잊어버리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럭 겁이 나기 시작했다.

바로 그날 밤, 경기장에서 돌아온 자기를 집무실에 불러세우시고 엄하게 질책하시던 그이의 음성이 귀전에 들려왔다.

《동무는 자기가 아직도 지난날의 꼴머슴인줄 아는게 아니요? 동무는 지금 수령님을 모신 존엄높은 우리 당의 한 지휘성원이요. 사람들이 동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서 우리 수령님의 모습, 당의 모습을 본다는걸 왜 생각하지 못하오? 동무는 선수들사이에 의견상이가 생겨 좀 다툼을 했다고 해서 군대들이 갈갠다고 시비를 했다는데 그것은 누구의 립장에서 한 말이요? 군대요, 사회요 편을 가르라고 경기장에 동물 보낸줄 아오? 군대도 당의 군대이고 인민도 당의 아들딸들이요. 뒤집어놓으면 동무의 말은 당중앙위원회를 사회기관이라고 규정했던 군벌관료주의자들의 언행과 다를바가 없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소? 내가 다시 찾기 전까진 내 방에 나타나지도 말고 일체 사업도 중지하시오.》

벽시계가 뗑뗑 아홉점을 쳤다. 김량남은 맥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벽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벗기다가 돌미륵처럼 굳어져버렸다. 지난가을에 예술인대표단을 데리고 외국에 갈 때 김정일동지께서 해주신 고급모직외투였다. 자기에게도 외투가 있다고 몇번이나 사양했지만 그이께서는 지나치게 그러면 성을 내겠다고 하시며 몸소 입혀보기까지 하시였다.

《재단사에게 짐작으로 치수를 대주었댔는데 재고 만든것처럼 꼭맞누만. 내 실은 동무에게 외투가 있는줄 몰라서 옷을 지은게 아니요. 량남이가 세상에 나서 처음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에 가는데 동무의 부모님들이 살아계셨으면 이런 날에 새옷 한벌 안해주셨겠소? 트렁크안에 갈아입을 내의랑 세면도구랑 넣었는데 마음에 들겠는지 모르겠소. 허허 난 이제 량남이를 보내놓구 보고싶어서 어쩐다?》

보고싶어 못견딜것같다고 하신 그이의 말씀은 인사말이 아니였다.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도착한 예술단이 그 나라 주재 우리 나라 대사관에 들어서자마자 그이께서 김량남의 안부를 물으시는 전문이 날아왔고 다음날에는 국제전화가 또 다음날에는 전보가 왔다. 공연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모스크바에 들렸을 때 거기 대사관으로 또 전화를 걸어오셨는데 이번에는 평양비행장에서 대출력무선기로 찾으신다고 하였다.

《량남동무, 오늘 하루 예술단동무들과 거기서 휴식을 하고 래일 떠나시오. 생각같아선 당장 오라고 하고싶은데 지금 여기 비행장상공에 구름이 껴서 그러오. 난 정말 동무들이 보고싶어서 일각이 삼추같소. 래일 돌아오면 하루종일 마주앉아 어디 얼굴이나 좀 들여다보기요. 하하하

량남은 그날의 음성이 귀전에 마쳐와 외투섶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득흐득 흐느껴울었다.

김량남이 청사구내를 벗어났을 때는 이미 뻐스통행시간이 지난 뒤였다. 뻐스시간은 지났다고 하지만 행길에는 아직 분주히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대회를 앞두고 누구라 없이 바쁜 때이니 자연 밤늦어 퇴근하는 로동자들도 많고 이 시간에 출근하는 후야근도 있을것이다. 부서일군들도 모두 현장에 나가 밤을 새우고있다. 해방산기슭에 이르러 국립연극극장쪽으로 꺾어드는데 앞에서 어린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리였다.

《응야, 응야, 우리 애기 용치? 이제 집에 가서 맛있는거 해주자요.》

일이 바쁜 애기어머니가 늦게야 탁아소에서 아이를 찾아가지고 나오는 모양이다. 아이의 입에 무엇을 물리느라고 그러는지 머리를 잔뜩 뒤로 돌린 젊은 녀인이 한손으로 띠개엉치를 찰싹찰싹 두드리며 어깨춤 절반 걸음 절반으로 쿵덕쿵덕 다가왔다가 멀어져갔다.

금시까지 칭칭거리던 아이는 숨소리조차 안내고 업히워간다.

아이들을 얼리는데는 녀자들이 타고난 재간이 있는것같다.

문득 양자툰에서 머슴살이할 때 지주집의 귀공녀를 등에 업고 저렇게 흥야흥야 얼리던 어느 겨울날의 일이 떠올랐다.

그날은 조국이 해방되기 한해전 섣달, 라지주의 생일날이였다.

해가 지기 전부터 질탕을 치기 시작한 주연이 밤늦도록 끝날줄 모르고 때각때각 저가락장단을 두드리는 소리, 쟁쟁 술잔을 맞찧는 소리, 흐덕흐덕 너털웃음을 웃는 소리가 량남이의 머슴방까지 울려왔다. 소리만 들려오면 그런대로 참겠는데 바람을 막느라고 낡은 걸레쪼박까지 꽁꽁 박아넣은 문틈으로 고소한 기름냄새, 고기삶는 냄새는 어떻게 새여들어오는지 밸이 비틀리워 견딜수가 없었다. 조금전에 작은마님이 부엌일이 바빠 그러니 아이를 좀 봐달라고 맡기면서 꼬리떡 한짝을 쥐여준 이후로는 온 집안이 다 량남이를 잊어버린것같았다. 해가 떨어질만 하면 귀떨어진 토기사발에 골싹하게 담아주군 하던 호밀밥도 먹으라는 소리가 없었다.

김량남은 쌔근쌔근 잠든 계집애를 둘쳐업고 마당에 나섰다. 부엌주변에 가서 서성거리느라면 마님이든 행랑어멈이든 누군가의 눈에 띄울것이고 그러면 생일상 턱물림이라도 한점 얻어먹을수 있을것같았다. 아이를 업은 털띠개가 뜨뜻해서 잔등은 덜 시리겠지만 홑버선을 신고 짚신발로 마당에 나가기가 으쓸했다. 그래도 배가 고픈것보다는 나을것이다.

김량남은 계집애를 업고 마당으로 나왔다.

짜릿한 바람이 기다렸다는듯 목덜미를 덮쳤다. 량남은 으쓱 진저리를 치며 부엌문쪽으로 덜렁덜렁 뛰여갔다.

댈그락댈그락 그릇부딪치는 소리, 뚝딱뚝딱 칼도마소리, 쟁그당쟁그당 가마뚜껑 여닫는 소리

노래가락같은 부엌소음에 반발이라도 하듯 배속에서는 개구리귀신이 더 승이 나서 꽈르륵거렸다. 그래도 량남은 차마 부엌문을 제손으로 열지는 못했다. 언제건 사람이 문을 열겠지 하고 두손을 엇갈아가며 귀를 썩썩 비비는데 취기가 오른 주정군들의 덜썩한 목소리가 등불이 얼른거리는 창호지를 뚫고 새여나왔다.

《암만 봐야 라주사는 모르겠어. 일본사람들한테 비행기헌납금까지 낸 특등공신이 제 집에다 공산당의 새끼를 데려다 기른단 말인가?》

늘 봐야 인력거를 타고 꺼덕거리는 사팔뜨기구장이 씨부렁거리는 소리였다.

《왕형, 우리끼리야 뭐 눈감구 아웅할게 있소? 하루아침에 공산당세상이 됐다, 국민당세상이 됐다, 일본사람들 세상이 됐다 하는 와야판에 이 라한방이 양자툰의 큰 재산을 뿌다구채로 쥐고 앉아있자면 그래도 무슨 방패막이가 있어야지. 페이!- 뭘 모르는 시늉이요? 그래 일본군대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지금 공산군한테 질질 밀려돌아가는걸 이 라한방이 귀구멍에 말뚝을 박았다구 모를것같소? 내 일본사람들한테 공산당놈들을 적지 않게 꽂아넣긴 했지만 설사 이 양자툰에 공산당세상이 선다 해두 저런 애새끼를 건사해준 공을 삭감하면 목숨은 붙어날거라. 흐흐흐

《역시 라주사는 천리안이 있구만. 공산당의 새끼를 마소같이 부려서 리득을 얻으니 하나요. 공산당의 새끼를 내세워서 목숨을 건지니 둘이라 꿩먹고알먹으니 이 어이 제갈량이나 사마의에 비길손가!》

《흐흐그런거나 가지구 제갈량이요? 그런 리득이야 량남이말구두 또 있지요.》

이번에는 뭐라고 쑥쑥이를 하는지 한참 소리가 없더니 우와 하고 징그러운 폭소가 터져올랐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등뒤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아츠럽게 찢어졌다. 부엌문이 벌컥 열리고 작은마님이 뛰쳐나왔다.

《어쨌게 아이가 우니?》

《놀란 모양이예요.》

《그러게 방에 들어가있으라지 않던? 추운데 나오긴 왜 나오니?》

량남은 마님이 뭐라 하건말건 쨍쨍 울어대는 계집애를 덜썩덜썩 들추면서 활짝 열린 부엌문을 들여다보았다. 부뚜막에 놓인 칼도마우에 무드기 썰어놓은 편육쪼박들이 눈길을 붙들었다. 작은마님이 계집애의 띠개머리를 꽁꽁 여며놓고나서 량남이를 내려다보다가 편육 한쪼각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 찰나에 아래방미닫이가 드르륵 열리고 라한방이 비틀거리며 토방우에 나섰다.

《웬 울음소리냐?》

술에 취한데다 꼬리빠진 수닭도 제 둥지에서 운다는 격으로 한껏 건소리를 톺아올린 라주사는 개개풀어진 거적눈으로 아이를 업은 량남이를 내려다보았다.

《이놈의 새끼, 네가 우리 꽁주를 울렸니?》

량남은 추워서 발발 떨고 무서워서 덜덜 떨었다.

《공산당놈의 새끼를 배때껏 먹여주니까 에끼, 이놈!》

라한방의 살찐 주먹이 량남의 머리우에 절구공이처럼 떨어졌다.

량남은 번쩍 하고 눈앞에 별찌가 날아들면서 코허리가 지끈해났다.

김량남은 머리가 깨여져나가는것같이 아프고 눈물이 줄줄 흐르는 속에서도 작은마님이 쥐여준 편육쪼각을 붙들고 끝내 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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