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회)

제 1 장

눈내리는 겨울

8

(2)

 

진실한 사랑이란 무서울 정도로 끈덕진 은페라는것을 설아는 어떤 소설책에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에게서 배웠다. 합숙안의 다른 처녀들은 자기에게 홀딱 반해서 따라다닌다는 어떤 총각에 대한 이야기도 곧잘하고 총각이 써보낸 살틀한 편지들을 낱낱이 함께 읽으며 웃고떠들군 하였지만 진성에게서 첫 편지를 받았을 때 설아는 그것을 베개밑에 감춰두고 며칠씩이나 혼자 보았다. 세면장에 갈 때에는 자기가 없는새에 누가 베개밑을 뒤져보기라도 할가봐 남들이 다 나간 다음 그 편지를 품속에 집어넣고서야 살금살금 따라갔고 출근할 때는 군복주머니에 꼭 찔러넣고야 나갔다.

처음에는 자기가 다른 처녀들보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여서 그럴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소잔령우에서 북통을 따라 령길을 달려내려가는 군관을 바라보며 느꼈던 고마움과 죄스러움, 그 진정에 무엇으로든 보상하고싶었던 충동이 승화되여 처녀의 가슴에 찾아든 애모쁜 진정이였다. 설아는 그처럼 열정적이고 인정깊은 중위-최진성에게 느끼는 자기의 감정이 다른 처녀들이 시시껄렁한 련애편지에서 느끼는 감정과는 전혀 다른것이라고 믿었으며 그로 하여 처녀의 입에 꺼리낌없이 오르내릴수 있는 사랑이란 실지에 있어서 진실한 사랑이 아닐것이라고 단정해버렸다.

얼마전에 날아온 두번째 편지에 진성은 이렇게 써보냈었다.

《나의 첫 편지에 보내준 동무의 회답을 반갑게 받았소. 동무는 이제부터 나를 친오빠처럼 여기고 대해도 되겠는가고 물었는데 왜 오빠뿐이겠소? 동무만 반대없다면 부모가 다 없다는 동무에게 아버지도 되여주고 어머니도 되여주고싶소. 나도 전쟁때 친부모를 다 잃은 고아로서 지금은 훌륭한 양부모님들을 모시고있지만 동무가 얼마나 혈육의 정이 그립겠는가 하는것은 내 마음처럼 눈에 보이오. 솔직히 난 지금 동무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소. 그러나 만약 저 하늘에서 한개 사단쯤되는 처녀들이 락하산을 타고 내려온다면 나는 그들이 땅에 다 내리기전에 동무를 찾을수 있을것같소. …》

설아는 어쩌면 진성의 마음이 그렇게 자기와 꼭같을가 하고 몹시 놀랐다. 자기 역시 진성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옥소등빛이 정면으로 비치는 무대우에서 초만원을 이룬 객석을 마주본다고 해도 그가 앉아있는 곳만은 단번에 알아맞힐것같았던것이다.

설아는 이것이 분명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런 감정일것이라고 믿었다.

그사이 오고간 편지에 진성이도 자기도 사랑이라는 두글자는 써넣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진실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장미는 장미라고 불러도 장미이고 부르지 않아도 장미이지만 사랑은 사랑한다고 찍어말하지 않을 때에만 참사랑이 아닐가.

그래서인지 설아에게는 최진성이 여기까지 왔다가 자기를 만나지 않고 그냥 가버린것도 그것이야말로 진짜배기 사랑이 사나이들에게 주는 소심성일것이라고 너그럽게만 생각되는것이였다.

그래도 너무해, 어쩌면 그렇게 훌쩍…

다음번 편지에는 섭섭한 소리를 좀 써보내야지. 아니야, 그러면 처녀의 속을 너무 빤드름히 꺼내보이는것으로 되지 않을가?

녀자가 남자쪽에 너무 기대면 사랑이 인차 식는다던데…

회의는 두시간이 걸려서야 끝났다.

회관밖을 나서느라니 설핏한 어둠속으로 헤쳐져가는 사람들속에서 제마끔으로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래도 장섭동지같은 사람이 있어서 창조규률이 서는거지뭐. 연출가들이 만만하다면 안삼불은 어떻게 해결해?》

《쉿! 너도 관료주의에 동조했다는 말을 듣자고 그래?》

《어쨌든 관료주의는 뿌리뽑아야 돼. 민주주의도 좀 있어야지.》

《얘가 제법 유식한 소릴…》

《난 오늘 연출가동지에게 막 반했어. 그렇게 무시무시한 연단에 나섰는데도 눈섭 하나 까딱하던? 사나이란 그래야 돼!》

《너 주의해야겠다. 장섭연출가의 색시를 알지? 평양동물원 맹수관리공이야. 그 손에만 걸리면 휘-익! 호호호…》

등뒤로 흩어져가는 쏠라닥소리들을 귀등으로 흘려넘기면서 합숙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방금전까지 연탁에 서있던 연출가가 비자루같은 입김을 퍽퍽 내뿜으면서 달려왔다.

《설아동무, 고맙소. 날 지지해주어서…》

설아는 자기가 장섭연출가의 무엇을 지지해주었던지 잘 기억나지도 않았다. 그렇지, 북통을 가져오라고 한 지시에 별다른 의견이 없다고 대답했지. 그런데 그것이 무슨 고마운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동무는 그때문에 좀 말을 들을거요. 지금식으로 말하면 관료주의에 동조했으니까. … 어떻소, 두렵지 않소?》

설아는 방금전까지 진성에게 어떤 편지를 보낼것인가 하는 생각만 하다보니 연출가의 말에 별로 마음이 씌여지는것도 없었다.

《두렵긴요? 저야 말단배우이고 시키는대로 했을뿐인데 무슨 큰 문제가 있겠습니까? 일없습니다.》

40대에 이르러서도 아직 청년맛을 잃지 않은 장섭은 걸싸게 잘생긴 얼굴에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평시엔 소심한것같은데 이런 때 보면 배포가 유한데도 있구만. 하긴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

연출가는 설아와 나란히 걷기 시작하였다. 장섭연출가는 성격이 급하고 평상시 배우들을 무섭게 드다루는 사람인데 회의에서 받은 어떤 뉴대감같은것이 작용했는지 설아에게는 무척 부드러운 태도였다.

《솔직히 말해서 난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강박을 하면 연출을 그만둘 생각이요. 말이 났으니 말인지 예술창조란 고도의 일치성을 요구하는 일이여서 연출가에게 어느 정도의 강권이 필요한것인데 모두들 이걸 리해 못하거던. 물론 동무는 제외하고 말이요. 허허…》

어쩐지 그답지 않은 허구픈 웃음소리가 울렸다.

이때 그들을 향해 뿌걱뿌걱 눈밟는 소리가 가까와지더니 설핏한 어둠속에서 직일관완장을 두른 《삼각참모》가 불쑥 나타났다.

《설아동무가 여기 있는걸 온델 찾아다녔군. …》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장섭연출가가 설아를 대신하여 물었다.

《설아동무의 삼촌한테서 전화가 왔댔소. 오늘 저녁에 꼭 집에 오라더군. 몇번이나 곱씹는데 무슨 긴한 문제를 토의하려는 모양이요.》

《삼각참모》는 군모를 이마우에 썩 올리밀며 능청스러운 빛을 띄운 두눈을 설아에게 바투 들이댔다.

《설마 벌써 총각선을 보는거야 아니겠지? 동무같이 재능있는 쏘프라너가 일찍 달아나버리면 난 또 큰 역사거던. …》

설아는 롱담 절반 진담 절반인 《삼각참모》의 익살에 화딱 얼굴을 붉히였다. 아무튼 전연군단에 지도사업을 나갔다던 삼촌이 돌아왔다니 설아에게는 무척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설아는 요즈음 너무 번거로운 일들을 겪다보니 삼촌이 자기를 몇번이나 곱씹어 찾았다는 그 리유조차 어쩐지 불안스럽게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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