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회)

제 1 장

눈내리는 겨울

7

(3)

 

상좌는 진성의 가슴속에서 폭발직전으로 치달아오르고있는 불길을 전혀 느끼지 못한듯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세상에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이나 현상이란 없는 법이요. 특히 사람문제에서야 더하지. 그가 누구의 자식이고 어떤 가정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 어떤 사람과 친하며 누구를 사랑하는가, 어떤것을 증오하고 어떤것을 좋아하는가, 이런것을 빙 둘러가며 파보면 그 인간의 전모가 나무뿌리처럼 드러나게 되거던. 동무는 죽든살든 아버지를 따르겠다니까 고집대로 하오만 처녀야 다르지 않소? 동무에게서 어떤 영향을 얼마나 받았으며 현재 어떤 상태인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감성적인 련애단계인가 아니면 계선을 넘어서 이미…》

《그만하십시오!》

최진성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나서 씩씩 숨을 몰아쉬였다.

《난 그 처녀와 길에서 우연히 한번 만났을뿐입니다. 이번에는 북을 가져다주러 갔다가…》

여기서 입이 굳어진 최진성은 정설아의 얼굴이 피끗 떠올랐다.

그 처녀는 지금 어쩌고있을것인가?

최진성은 이번에 설아를 만나지 못하였다. 아니, 만나지 않았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때의 정황으로서는 무슨 일이 생긴것이 분명한 집부터 가보아야 했다.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는 처녀를 만나고싶지 않았다. 집에 가서는 아버지를 만났고 모든 사연을 알게 되였다.

아버지가 총참모장직에서 해임되였다는것을 알게 되자 최진성은 처녀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최진성은 끝내 협주단으로 다시 가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한장의 편지만을 남긴채 남행렬차에 몸을 실었다. 이틀간에 걸치는 귀대길에서 몇번이나 모지름을 써보았지만 진성은 설아에게 자기 가정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설명하는것이 좋을것인지, 그것이 설아에게 어떤 반응을 일으킬것인지 종시 확고한 답을 얻어내지 못했다. 어쨌든 종당에는 그 처녀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야 할것이다. 아버지가 총참모장일 때에는 그것을 숨기는것이 오히려 진정과 순결의 표시로 될수도 있었지만 이제 와서 아버지문제를 숨기는것은 리기이고 불결이며 죄악으로 될것이기때문이였다.

최진성이 이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 민족보위성의 정영묵상좌는 초점을 잃어버린 상대의 눈을 쳐다보며 자기나름의 생각에 잠겨있었다.

사실 그는 여기에 자기 조카딸의 애인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군인들과 담화를 하는 과정에 우연히 협주단이야기를 듣고 설마설마하면서 이름을 캐보았는데 그 설마가 정말로 설아일줄이야. …

그 순간부터 정영묵은 설아를 겨눈 두번째 운명의 화살이 시위에 재워진것같은 느낌이였다. 그 첫번째 화살을 느낀것은 동북에 살던 설아가 자기를 찾아 조국으로 나왔던 10년전 겨울이였다.

생면부지의 숙성한 처녀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자기 맏형의 딸이라고 나타났을 때 영묵은 반가왔던가, 아니면 놀라왔던가!

《어떻게 나를 찾았니?》

그가 자기의 조카라는것을 재삼 확인하고나서 정영묵이 처음으로 물은 말이였다.

《어머니가 대준건 아버지와 삼촌의 이름뿐이였어요. 조국으로 나와서 해당 기관에 이름을 말해주었더니 스무명도 넘는 사람들의 주소를 알려주더군요. 삼촌을 찾는데 두달이 걸렸어요.

《고생을 했겠구나.》

정영묵은 설아의 얼굴과 신통히도 같았던 형수의 모습을 상기하면서 이미 전쟁시기에 전사한 형이 살아있었더라면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하는 생각에 눈굽이 찌르르해졌다.

《그래, 이젠 어디 살아온 이야기나 좀 들어보자. 어머니는 왜 함께 오지 않았니? 혹시

《어머닌 돌아가셨어요. 하지만 살아계셨어도 함께 오시진 못했을거예요. 어머닌 그동안…》

설아는 갑자기 입을 싸쥐며 오열을 터뜨리더니 한동안이나 꺼이꺼이 울고나서야 어머니의 기막힌 인생사를 토설하였다.

왕청현 양자툰의 라한방…

그 악독한 지주놈에 의하여 강요된 비참한 생애

운명의 막다른 고비에서 벌어진 피의 결산

정영묵은 설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덜컥 무너지는것같았다. 어쩐지 그것은 락동강에서 희생된 형의 소식을 들었을 때와는 전혀 상반되는 감정이였다.

《너 그 말을 또 누구에게 했니?》

설아는 두눈에 겁을 잔뜩 담고 고개를 살래살래 저어보였다.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뭔가 하면 내 생각엔 말이다, 이제부터 그 일은 잊어버려라. 앞으로 리력문건을 쓸 때두 어머닌 그저 라지주집에서 심부름을 했다구… 그렇게 쓰는게 좋을것같다.》

《일없지 않을가요? 어머니야

《넌 아직 계급투쟁이 어떤것인가 하는걸 잘 몰라. 중요한것은 네가 락동강에서 전사한 렬사의 피줄이라는것이다. 어머니는 네 마음속에만 새겨두어라.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설아는 침묵으로 응낙하였다.

정영묵은 형수의 불미한 과거지사를 영원히 지워버리는것이 장차 설아의 장래를 위한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그렇게 하는것이 전사한 형의 명예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것이라고.

설아가 자기의 타고난 아름다움과 천성적인 음악소질로 하여 예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인민군협주단에 배치받은지 두해가 지났지만 그의 어머니문제는 아직까지 불거진적이 없었다. 하기야 머나먼 이국땅에서 있은 일을 누가 알겠는가. 장차 설아가 훌륭한 총각을 만나 시집이나 가고 가정생활에 파묻히면 지나간 과거는 영영 그렇게 사라져버릴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최광의 양아들인 최진성이 설아의 운명에 끼여들게 될줄이야. …

정영묵은 설아가 총참모장직에서 해임된 최광의 아들과 사랑관계로 얽히는것이 달갑지 않았다. 그로 하여 자기가 혹 그런 집과 인척간으로 될수 있다는 우려가 매운 연기처럼 끄물끄물 피여올랐던것이다.

정영묵은 최진성을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가지 묻기요. 그협주단처녀의 이름은 뭐요?》

《모릅니다.》

정영묵은 책상을 와락 밀어제끼며 일어섰다.

《그럼 이건 누구의 이름이요?》

진성은 지끈 내리감았던 눈을 치떴다. 상좌의 손끝에서 손수건이 펄럭거렸다. 배낭속에 고이 건사했던 설아의 손수건이였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복숭아냄새가 연하게 풍겨온다.

최진성은 그 상좌의 거치른 손끝에서 자기의 사랑도, 운명도, 처녀의 깨끗한 마음도 갈가리 찢겨져나가는것만 같았다. 화끈 달아오르는 머리속에 이미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진성은 오직 그 손수건 하나를 노리고 무섭게 돌진했다. 무슨 낌새를 챘는지 문이 벌컥 열리고 직일관과 석철룡이 뛰여들었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였는지 진성은 의식하지 못했다.

그가 중대부사무실에 돌아와 앉았을 때 우들우들 떨리는 손에는 반나마 찢겨진 설아의 손수건만이 꾹 쥐여져있을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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