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회)

제 1 장

눈내리는 겨울

2

(3)

 

그렇게 어수룩하던 소년이 이제는 이렇게 끌끌한 군관이 되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감개가 무량하신듯 북통너머로 그의 손을 끄당겨잡으며 말씀하시였다.

《역앞을 지나면서 보니 길가에 빨간 북통이 표나게 눈에 띄우더구만. 그래서 동물 제꺽 알아봤소. 그런데 이 북은 웬거요?》

진성은 무엇이라고 대답올려야 할지 딱히 작정하지 못하고 바재이다가 어줍은 웃음을 지었다.

《이게 사연이 좀 있는 물건입니다. 제가 협주단에 가려는것도

하마트면 설아의 이름이 튀여나올번한것을 가까스로 눌러넘기고 자기가 북통을 안고오게 된 사연만을 간추려 말씀드리기로 하였다.

이제는 벌써 한해전의 일이다.

전연사단의 어느한 독립소대에서 소대장을 하다가 새로 조직된 구분대의 부중대장으로 임명받은 최진성은 소대의 군인들과 인사를 마치자마자 제꺽 길을 떠났다. 독신군관의 살림이라야 나무함통 하나도 다 차지 못하는것이여서 준비할것도 별로 없었지만 최진성이 그렇게 서두른것은 임명받던 날 한 일군이 넌지시 건네주던 말때문이였다.

《진성동무, 이번 임명은 민족보위상동지가 직접 지시한거요. 군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동무같은 수재를 왜 아직 소대장자리에 박아두는가고 책망이 대단하더군. 그러면서 동무를 석박골에 새로 조직된 중대에 보내라고 꼭 찍어서 명령했소. 그게 어떤 중대인지 아오? 얼마전에 새로 조직한 구분대인데 보위상동지가 특별히 관심하는 단위요. 공급도 특수, 편제도 특수, 임무도 특수, 모든게 특수거던. 그만큼 힘이 들고 또 그만큼 보람도 있을거요.》

진성은 날개라도 달린 심정이였다.

어떤 특수인지는 몰라도 이런 부대에서 한번 본때를 보여 아버지앞에 떳떳하게 나서고싶었다. 그래서 급히 떠난 걸음인데 시작부터 일이 안되려는지 온종일 달구지 한대 맞다들지 못했다. 아침부터 80리길을 걸어 소잔령밑에 왔을 때는 이미 석양이 비끼기 시작했다. 석박골까지는 아직 50리남짓한 길이 남았는데 내처 길을 가자니 오르며 20리, 내리며 20리, 느렁뱅이 황소도 지루해서 한잠을 자고서야 갔다는 소잔령이요, 돌아서자니 발에 물집까지 잡히며 걸어온 하루길이였다.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고있는데 죽을 수에 살구멍이라 등뒤에서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귀맛좋게 울렸다. 운전사에게 량해를 구하고 차에 오르니 적재함은 온통 둥글둥글한 북천지였고 사람이라고는 그 북사태 한복판에 꼬부리고앉은 류다른 군복차림의 처녀뿐이였다. 어깨우의 빨간 령장에 하프가 박힌것으로 보아 인민군협주단 배우인것 같은데 혼자서 숱한 북을 그러안고 어디로 가는지 모를 일이였다.

《좀 도와주세요.》

처녀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무엇을 도와달라는것인지 생면부지의 처녀가 다짜고짜 던지는 부탁에 진성은 약간 얼떠름해졌다.

《북이 자꾸만 굴러나서 그래요. 이제부턴 올리막길인데 한개라도 적재함밖으로 떨어지면 난 큰일이예요.》

진성은 처녀의 난감한 처지를 제꺽 알아챘다. 이리저리 들추는 적재함우에서 북통들이 데굴데굴 제멋대로 놀아나고있었다. 최진성은 덜쿵덜쿵 들까부는 적재함을 이리저리 오가며 북통끈들을 얼기설기 꿰여매고나서 그 한끝을 바싹 탈아쥐였다.

《자, 동문 저기 저 끝을 잡소. 난 여길 잡고있을테니. 북통들이 이쪽으로 쏠리면 동무가 저쪽으로 당기고 저쪽으로 쏠리면 내가 이쪽으로 당기고. 어떻소? 이만하면 차를 얻어탄 값은 하는셈이 아니요?》

방금전까지 불안에 싸여 오돌오돌 떨던 처녀는 삽시에 근심이 가신듯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과 함께 복숭아꽃향기와도 같은 향수냄새가 물큰물큰 풍겨왔다. 마치도 그의 웃음속에 향기가 있는것같았다.

《야, 참 정말! 오늘 중위동질 만나지 못했더라면 난 아마 간이 졸아들어서 콩알이 됐을거야요. 중위동지가 아니였다면 난 정말

말투나 행동거지로 보아 아직 군대물이 채 들지 않은 이 처녀배우앞에서 진성은 마음이 별스레 울렁거렸다. 여태 그 누구에게서도 《네가 아니였다면 나는…》하는 투의 운명적인 감사를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진성이였다. 그때문인지 행길에서 문득 만난 이 처녀는 최진성에게 신비에 가까운 호감을 안겨주었다. 그에게는 마치도 키가 좀 작을사하고 해말쑥한 얼굴이 오동통해보이는 이 처녀가 자기가 아니면 그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을수 없는 오직 자기만의 처녀인듯한 생각, 자기가 수십리길을 허위단심 달려와 여기 소잔령밑에 멎어선것이 바로 이 처녀를 도와주기 위해서였던것같은 생각, 적재함우에서 덜렁거리는 이 걱정스러운 북통들도 다 자기와 이 처녀를 위해 누군가 품들여 만들어낸것 같은 뚱딴지같은 생각에 사로잡히였다.

수집음도 없이 자기를 마주보며 새물거리는 눈동자우에 예리한 붓끝으로 살짝 금을 그어놓은듯한 쌍까풀…

따스해보이는 흰 이마, 발기우리한 두볼, 웃을 때마다 가쯘히 드러나는 하얀 이발…

처녀는 무척 아름다왔다. 아름답게 보였을뿐인지도 모른다.

애어린 처녀의 몸으로 한자동차나 되는 북통을 그러안고 오돌오돌 떨고있는 모습이 사나이의 동정을 불러일으킨것인지, 아니면 한개의 북통이라도 잃어버릴가봐 무진애를 쓰는 그 이악한 성정이 어떤 공감을 불러일으킨것인지.…

어쨌든 진성에게는 어머니가 편지에 써보내군 하던 장황한 조항들이 모두 이 처녀에게 체현되여있는것처럼 느껴졌고 《가정환경은 어떻고 학력은 어떻고》하는 이여의 조건들도 다 이 처녀가 가지고있을것만같은 예감에 온몸이 홧홧 달아올랐다.

《우리 장섭연출가동진 괴짜예요. 글쎄 순회공연을 하다가 무슨 북제창이라는걸 착상해가지구는 현장에서 형상하구 즉석에서 공연까지 하겠다는거지요뭐. 그래서 내가 이렇게 협주단에서 북을 싣구 떠났어요.》

적재함에 오른 《고마운 중위동지》가 무슨 명상에 잠겨있는지도 모르고 처녀는 속이 갑갑한 모양 묻지도 않은 말을 제잡담하고 종알거렸다.

《난 원래 소편대에 뽑히지 못했댔지만 북을 가지고 이렇게 멀리까지 왔으니까 도로 가라는 말이야 안하겠지요뭐. 어떻게든 떼질을 해서 아예 공연에 참가하려구 북 한개를 더 가지고 떠났어요. 호호호

최진성은 따라웃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을만큼 명랑하게 웃어대는 처녀를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하였다.

어느 눈이 찌그러진 연출가가 이런 처녀를 공연조에서 빼놓는단 말인가?

내가 연출가라면 이 처녀를 주인공으로 독프로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자동차는 고개마루에 거의다 올라섰다.

그 찰나 무엇이 툭 끊어지는듯한 느낌이 손에 마쳐오더니 처녀의 새된 비명소리가 울렸다.

《아! 북!》

어디서 어떻게 빠져달아났는지 적재함 뒤구석에 있던 북통 하나가 훌쩍 튀여나 길바닥에 쿵더덩 하고 떨어져내렸다. 떨어지는것도 묘하게 중심을 잡아서 모재비로 섰는데 처음에는 움찔움찔 땅뗌이나 하던것이 차츰 속력을 내여 아래로 구울기 시작했다.

최진성은 후닥닥 차에서 뛰여내려 북을 따라 달렸다.

그까짓 몇걸음안에 따라잡을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처음에는 장난삼아 건들건들 뛰였는데 적재함에 잔뜩 쪼그리고앉았다가 내려서 그런지 다리가 뻣뻣하고 그대신 북통은 베아링이라도 달린것처럼 우당탕거리며 빠른 속도로 굴러내렸다. 최진성은 머리가 아찔해지는것 같았다.

저것이 어떤 북통이냐?

저걸 못가져가면 저 처녀가 연출가인지 무엇인지 하는 눈이 찌그러진 지휘관에게 눈물이 찔금 나게 말을 들을것이고…

최진성은 두주먹을 부르쥐고 달렸다.

저걸 못가져가면 설사 연출가가 저 처녀를 공연에 참가시키자고 해도 북이 모자라 빼놓게 될것이고…

모자가 날아났다. 그래도 진성은 달렸다. 마치도 북이 아니라 그 처녀가 달아나버리기라도 하는것처럼.

처녀동무, 기다려주. 내 저 소잔령밑에까지 달려내려가서라도 동무의 북을 꼭 붙잡을테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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