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회)
제 1 장
눈내리는 겨울
2
(1)
평양역의 나들문으로는 금방 도착한 렬차에서 내린 손님들이 쿨럭쿨럭 쏟아져나왔다. 려행용가죽가방을 량손에 들고 목에까지 보따리끈을 걸어멘 껑충한 사나이, 아이를 업은 녀인, 군복목깃에 령장자리가 또렷한 제대군인, 무슨 상자같은것을 잔뜩 추켜안고 힘에 부친듯 비틀거리며 나오는 뚱보, 그런가하면 서너정거장짜리 시내뻐스에서 내려서기나 한듯 손가방 하나를 달랑 메고 나오는 맵시있는 처녀도 있고 어느 책방에 들렸다 나오는것처럼 가생이가 너슬너슬한 소설책에 코를 박은채 남의 잔등에 어청어청 묻어나오는 안경쟁이청년도 보인다.
그러나 형형색색의 그 많은 사람들속에서도 제일 유표하게 눈에 띄우는것은 누빈 겨울솜옷에 군관혁띠를 가뜬하게 졸라매고 보위색배낭을 등에 진 젊은 총각군관이였다. 렬차행군에 갑갑해난듯 휘딱하게 올리젖힌 겨울군모밑으로는 땀에 젖은 곱슬머리가 이마전에 축축하게 들어붙었는데 여드름 몇개가 도드라진 벌깃한 얼굴이며 어글어글한 눈동자아래로 툭 두드러진 코등이며 턱을 치받들고 솟구쳐오른것같은 굵고 기다란 목이며 연신 배낭을 추스르는 듬직한 어깨며에 억제할수 없는 젊음이 넘치였다.
유표한것은 그 젊음보다 군용배낭우에 털썩 올라앉은 빨간 북통이다.
제2차 전국천리마작업반운동선구자대회에서 천리마운동을 더욱 심화시키기 위한 투쟁과업이 제시된지 1년도 안된 때여서 요즈음은 어디가나 써클원들이 기세를 올리고 당 제5차대회를 앞둔 일터들마다에서는 완장까지 팔에 두른 현장기동대가 증산이다, 돌격이다 하고 북을 두드리는 때라 북통 그자체는 별로 새삼스러울것이 없었다. 그러나 내려선 렬차로 보아 전연에서 오는것이 분명한 젊은 군관이 저렇게 북통을 짊어지고 평양에 올라와야 할 리유를 생각해볼것 같으면 아무래도 고개를 기웃할수밖에 없는 일이고 그래서 누구나 이 괴이한 행장의 군관을 한번씩은 흘끔흘끔 돌아보고야 지나치는것이였다. 무리지어 마주오던 어떤 싱거운 처녀들은 아예 걸음까지 멈추고 로골적으로 캐드득거렸지만 당사자인 최진성은 아주 시쁜 기색으로 씽씽 걸어나왔다. 나들문을 쑥 벗어나 인총이 설피여지자 역전공원 돌의자우에 북통과 배낭을 내려놓은 최진성은 그사이 몰라보게 달라진 평양역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이태전에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들렸을 때만 해도 팔목만큼 가늘어보이던 길가의 버드나무들이 이제는 제법 실하게 자라 밑둥에 터슬터슬한 껍질이 일었고 대극장쪽으로 쭉 뻗어나간 도로량켠에는 그새 보이지 않던 아빠트들이 퍼그나 빼곡이 들어찼다.
설이 지난지 스무날이 되여오는데 아직도 설맞이테프를 그대로 늘인 알락달락한 무궤도전차들이 쿵싯쿵싯 허리춤을 추며 지나가고 창광산쪽으로 시원하게 트인 도로량옆에는 참외알만한 전등을 하나씩 입에 문 새 가로등들이 줄느런히 박혔다. 여기저기 고압송전탑모양으로 뻗어오른 기중기들이 집채같은 다공판을 휭휭 물어올리는가 하면 뒤에서는 방금 떠나는 렬차의 기적소리, 어디선가는 호각소리 또 어디선가는 취주악대의 나팔소리, 여하튼 귀가 온통 멍멍한것이 떡갈나무잎사귀만 술렁거리던 석박골초소와는 보이느니 색다른 풍경이요, 들리느니 판다른 분위기다.
붕 뜬 기분이 좀 가라앉자 땀이 내배인 이마전이 썰렁해났다.
습관처럼 군모를 벗어 땀을 훔치려던 진성은 발치에 놓인 북통이 눈에 뜨이자 인차 겨울군모를 깐깐스레 비다듬어쓰고 손등으로 이마를 썩 문질러닦았다.
어디로 갈것인가? 진성은 북통과 배낭을 번갈아보았다.
영범이서껀 달라붙어 석박골의 특산인 마른 고사리며 참나무버섯 같은것을 잔뜩 꿍져넣어준 배낭은 어서 집으로 가자고 잡아끄는것같았고 오늘따라 테두리가 별스레 빨갛게 보이는 북통은 조선인민군협주단의 그 처녀에게 먼저 들렸다가자고 꼬드기는것같았다.
정설아!
이름만 불러보아도 심장이 후두둑거리는 협주단처녀…
오직 자기를 향해서만 그렇게 웃을것같이 느껴지던 정찬 눈…
눈을 마음의 창문이라고 한다면 그 마음속에는 정말로 한점의 티도 없을듯이 맑고맑았던 처녀의 눈…
《중대장동지, 처녀에게는 절대로 아버지가 총참모장이라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자존심이 강한 처녀들은 대체로 남자들이 아버지의 직무를 빗대고 사랑을 흥정하면 코방귀를 탁 뀌고 돌아서버린단 말입니다. 기본은 심장입니다. 심장!》
열아홉살밖에 안된 풋내기주제에 련애소설이나 몇권 읽었을가말가하는 밭은 상식을 가지고 가슴까지 톡톡 두드리며 훈시를 하던 영범이의 얼굴을 생각하니 웃음이 퍽 나왔다. 자기도 애초에 총참모장인 아버지를 빗대고 처녀를 휘여잡을 생각은 없었다. 처녀문제는 둘째치고 다른 문제에서도 아버지의 덕을 입을 생각은 꿈에도 해본적없는 진성이다.
이태전 군관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최진성이 단번에 중위의 군사칭호를 수여받고 집에 들렸을 때였다. 아들이 내여미는 최우등졸업증을 묵묵히 들여다보던 최광은 아무말없이 졸업증을 밀어놓았다.
평시에 칭찬이라는것을 통 모르는 무뚝뚝한 아버지여서 졸업증을 꺼내놓으면서도 별로 큰 치하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그늘밖에서 제힘으로 최우등의 열매를 따느라 퍼그나 공을 들인 최진성은 은근히 섭섭한 생각이 갈마들었다.
《혹시 제가… 아버지덕에 최우등을 했다고 생각하시는건 아닙니까?》
최광은 담배곽에서 담배 한가치를 꺼내려다가 아들쪽을 피뜩 쳐다보고는 담배가치를 도로 쑤셔넣었다.
《넌 내가 한때 군사학교 교장을 했다는걸 잊은게 아니냐? 내 벌써 면식있는 교원들에게 다 알아봤다. 네가… 제 실력으로 최우등을 했다는건 사실이더구나. 그런데 난 그게 오히려 더 걱정스럽다.》
어느새 터밭에 나가 이삭을 따서 가마에 넣었댔는지 김이 문문나는 이삭강냉이를 다반에 담아가지고 들어오던 김옥순이 행주치마에 손을 문대며 혀를 찼다.
《령감은 성미두 참… 남들 못하는 최우등을 제힘으로 하구 단번에 중위군사칭호를 수여받았는데 칭찬은 못할망정 걱정스럽다는건 또 뭐예요?》
최광은 안해의 못마땅한 얼굴을 찌붓한 눈매로 올려다보다가 더운 김이 그물그물 피여오르는 강냉이다반을 받아 방바닥우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진성에게 실한 이삭 하나를 골라 내밀며 말했다.
《개꼬리가 먼저 났다고 이삭이 큰건 아니다.》
진성은 손이 뜨거워나는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버지가 쥐여준 삶은 강냉이이삭만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사람이 젊어서 좀 특이한데가 있으면 인차 소총명에 사로잡히게 되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과 게으름이 생긴다. 그가 누구든 자기가 남보다 좀 앞섰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뒤떨어지기 시작한다는걸 잊지 말아라.》
이 한마디를 남긴 아버지가 문밖으로 나가자 어머니가 얼른 뒤따라나갔다. 진성은 문틈으로 겨우 새여들어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바싹 귀를 기울였다.
《당신두 참… 진성이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친아들이 아니여서 그런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좀 살뜰하게 굴면 못써요?》
《내가 진성이를 양아들로 여겼다면 그런 말을 하지부터 않았을거요. 빨찌산의 대를 물려주자면 신발을 든든히 신겨야 해!》
진성은 멀리서 아슴푸레하게 들려오는듯싶은 부모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떨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사실 최진성은 전쟁때 부모를 다 잃은 고아였다.
이제는 기억도 삭막하지만 분계선너머 지리산기슭에 그의 고향집이 있었다. 폭격에 집과 부모를 잃고 재더미속에 파묻힌 그를 구원하여
자기에게 쏟아온 그들의 진정을 생각할 때 진성은 항일투사인 아버지의 요구성이 얼마나 높고 자기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큰가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최진성은 집에 별로 걸음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처럼 아버지의 몰인정한 처사에서 양자의 서러움을 느껴서가 아니라 군관학교 최우등졸업증도 별로 달가와하지 않는 높은 요구성앞에
당당히 나설만한 일을 해놓기 전에는 아버지앞에 나설수가 없어서였다. 진성은 그렇게 하는것이
하지만 어머니는 진성이 집에 나타나지 않는것이 그날 있은 일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매달 꼭꼭 편지를 보내왔다.
초소생활이 적적하지는 않느냐, 식사는 입에 맞느냐, 석박골은 해가 적게 들어 추위가 심하다던데 소포로 부쳐보낸 털조끼는 어디다 집어팽개치지 않았느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