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회)
제 1 장
푸른 호수
1
(2)
축사안의 놀이장에서는 영양가높은 배합먹이와 보충먹이를 배부르게 먹은 크고 살진 오리들이 해빛쪼이기를 하면서 노닐고있었다.
놀이장 한가운데 길게 놓인 먹이그릇앞에 두사람이 마주앉아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그릇안의 먹이를 가리키며 무슨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누던 그들은 축사안으로 들어서는 지배인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호스를 정돈하면서 오리들을 살피던 관리공처녀도 작업복앞자락을 나풀거리며 다가왔다.
《자! 인사하오. 우리 공장에 새로 온 기사장동무요.》
지배인이 두사람에게 말했다.
축사안의 여기저기를 주의깊게 둘러보던 송영숙은 지배인의 소개말에 눈길을 돌렸다. 그의 크고 그윽한 눈가에 웃음이 흘렀다.
지배인은 걸걸한 목소리로 두사람과 관리공을 소개하였다.
《이 사람은 청년직장장동무고… 저 동문 기술준비소 기사 정의성동무요. 이 동문 관리공이고…》
송영숙은 소개말의 순서에 따라 먼저 체격이 거쿨진 청년직장장에게 가볍게 머리를 숙여보였다.
그다음 청년직장장의 옆에 서있는 기술준비소 기사쪽으로 돌아섰다.
순간 그는 자기의 눈을 의심하며 굳어졌다. 이어 그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소리가 터져나오려는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섭…
정의성의 얼굴도 화석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이마가 넓은 얼굴을 홍조로 물들이며 인츰 겸손하게 인사말을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참 오래간만이군요.》
그의 인사말을 들은 송영숙도 신속히 자기를 다잡았다. 하지만 놀라움이 커서인지 선듯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심장도 놀란듯 쿵쿵 박동소리를 높이며 세차게 들뛰였다.
(이 사람을 여기서 만나다니… 내 가슴에 지울수 없는 상처를 남겨준 이 사람을 여기서 다시 만나다니…)
송영숙의 마음을 알길없는 지배인은 눈을 크게 흡떴다.
《서로 아는 사이였소?》
지배인은 두사람의 얼굴에서 대답을 찾으려는듯 송영숙과 정의성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청년직장장과 관리공처녀도 의혹이 담겨진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일순 창백해졌던 송영숙의 얼굴은 귀뿌리까지 달아올랐다.
그는 뜻모를 애매한 웃음만 지어보였다.
다행히도 정의성이 대답하였다.
《예. 기사장동무가 대학을 졸업하고 3대혁명소조생활을 할 때 거기서 함께 일했습니다.》
그는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그 특유의 발음이 정확한 목소리로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그러니… 닭공장에서 말이요?》
지배인의 눈은 다시 커졌다.
송영숙이 대학을 졸업하고 닭공장에서 3대혁명소조생활을 하였으며 그 공장에 뿌리를 내리고 현장기사와 책임기사를 거쳐 지배인으로 성장해왔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장병식지배인이다.
그는 무척 흥미있는 눈길로 정의성을 쳐다보았다.
정의성은 또다시 넓은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렇습니다. 전 그때 연구사업때문에 닭공장에 나갔댔습니다.》
사색적인 눈빛이 인상적인 정의성은 지성이 담겨진 얼굴에 연한 웃음을 담고 대답하였다.
그의 대답을 들을수록 송영숙은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고 심장의 박동이 빨라짐을 느끼였다.
할수만 있다면 당장 문을 박차고 호동에서 뛰쳐나가고싶었다. 그러나 온몸에 강직이 온듯 뜻대로 두다리가 움직여질것같지 않았다.
지배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즐겁게 껄껄 웃었다.
《오, 그렇댔구만. … 헌데 여기서 이렇게 만날줄은 몰랐던게지?… 반갑겠소. 뜻밖의 상봉은 갑절로 반가운 법이니까. …》
그는 제 기분에 들떠서 그냥 싱긋싱긋 웃으며 말하였다.
송영숙은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한켠에 서있던 직장장과 관리공처녀도 그제야 리해되는듯 마주보며 웃었다.
이윽고 지배인은 과묵해보이는 청년직장장에게 일나이별로 오리몸무게와 생육상태에 대하여 물었다.
지배인은 정의성에게도 먹이조성과 오리의 기호성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지금 적용하고있는 처방대로 배합먹이를 조성하니 먹이를 잘 먹구있습니다. 그리고…》
정의성은 놀이장에서 놀고있는 오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송영숙은 그가 이따금 손빗질로 넓은 이마에 드리운 앞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모습을 온몸으로 지켜보았다.
정의성이 따분하거나 어색할 때 그런 손동작을 하군 하는데 성이 나거나 흥분되면 그 손놀림이 더 빨라진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송영숙이였다.
지배인은 새로 온 기사장이 생산실태를 료해하는데 도움을 주려는듯 보충먹이실태며 소독수사용에 이르기까지 깐깐히 물었다.
잠시후 그는 호동들을 돌아보자고 하였다.
청년직장장이 앞서서 출입문으로 향하였다.
이때 《안녕히 가십시오.》하는 관리공처녀의 인사말이 들려왔다.
직장장과 지배인의 뒤를 따라 호동을 나서던 송영숙은 뒤에서 울려오는 깍듯한 인사말을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관리공처녀의 뒤에 서있는 정의성과 눈길이 마주쳤다.
위구와 불안이 엇갈린 규정하기 힘든 감정을 얼굴에 담고 서있던 정의성은 서둘러 놀이장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송영숙은 그쪽을 외면하였다.
그는 관리공처녀에게 다정한 눈웃음을 보낸 다음 곧 돌아섰다.
호동을 나선 그는 지배인과 직장장의 뒤를 따라 새끼오리호동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석쉼한 목소리로 직장장과 비육호동들에 설치한 먹이운반삭도의 수리보수에 대하여 한동안 이야기하던 지배인이 얼핏 뒤를 돌아보았다.
《정기사동문 호동에 남았소?》
정의성을 두고 묻는 말이였다.
청년직장장이 머리를 끄덕이며 시험호동에 갔을거라고 대답하였다.
《내가 젊은 사람들이 회포나눌 시간마저 빼앗는게 아니요?》
장병식지배인은 송영숙을 돌아보며 물었다.
송영숙은 쑥스러운 웃음을 그리였다.
《회포나눌 시간이 뭐 따로 있습니까?》
호동을 나서니 혀가 자유로와지고 온몸의 강직도 점차 풀리였다.
지배인은 머리를 끄덕끄덕하였다.
《그야 그렇지. 한공장에 있으니 아무때건 만날수 있으니까. … 어떻든 기쁘겠소. 오랜 친구와 함께 일하게 되였으니 말이요.》
장병식지배인의 석쉼한 목소리에는 진정이 담겨져있었다.
송영숙은 례사로운듯 빙그레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은 결코 례사롭지 않았다. 그 어떤 운명적인 예감으로 긴장해지기도 하였고 불안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불쾌해지기도 하였다.
그에게는 지배인과 직장장이 나누는 현행생산실태에 대한 말이 전혀 귀전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의 온몸에 굽이치던 후더운 열기와 상쾌한 흥분은 여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생각은 바늘끝처럼 예리해졌다.
(연구소에 있던 그가 언제 이 공장에 왔을가?… 그리고 무엇때문에 여기에서 일하고있을가?…)
정의성에 대한 생각을 털어버리려고 애를 쓸수록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무거워지는 마음을 안고 지배인과 직장장의 뒤를 묵묵히 따르기만 하였다.